해질 무렵
황석영/ 문학동네/ 2015.11.30/ 198쪽
황석영 : 고등학교 재학 중에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에 등단한다. 월남전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만해문학상, 단재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객지』,『삼포가는 길』,『한씨 연대기』,『무기의 그늘』,『장길산』,『오래된 정원』,『손님』,『심청, 연꽃의 길』,『바리데기』,『개밥바라기』,『강남몽』,『낯익은 세상』,『여울물 소리』,『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등이 있다.
우리나라 소설의 유명 작가 중 한 명인 황석영씨의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소설은 잘 안 읽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읽게 되었다. 예전에 독서토론의 공통 주제로써 유럽의 작품을 읽은 적은 있었고, 국내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읽은 작품이다.
제목이 우선 ‘해질 무렵’으로 작가의 황혼기에 대한 이야기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저녁 무렵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내용인지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일어나는 일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이 황혼기에 든 그런 작품이다. 또한 작가 역시 황혼기에 들어서있다는 것도 공통점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황혼기에 대한 회한으로 썼을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작가의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긴 원체 좋은 작품 그리고 많은 작품을 썼으니 모든 작품이 작가의 실제 상황을 근거로 썼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을 주제로 하여 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격변기 즉 일제 말기에 걸쳐 해방과 한국 전쟁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가는 짧은 순간의 과정을 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작은 경상도 영산읍에서 자란 기억과, 말단 서기로 근무하다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옮긴 아버지를 따라 주인공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달동네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중에서는 제법 부유한 축에 드는 여고생을 만난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구두닦이 왕초에게 시집을 간 여학생을 중년이 되어 추억 속의 한 장면 기억으로 만난다. 그러나 여인은 남편이 죽고 아들마저 자살한 상태로 세상의 삶을 한으로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친구가 건설회사 사장이 되었고,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며 주인공이 자라서 건축설계사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자주 만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도 건축 비리에 관한 문제가 끼어들어 멀어지게 되었고, 건설회사 사장인 친구가 병으로 죽는다. 우연히 알게 된 젊은 아가씨가 달동네 여학생의 며느리감이 되었으나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않았고, 그 아가씨를 통해 달동네 여고생의 슬픈 소식을 듣는다. 한때는 자신도 그 여고생을 좋아하였었는데 차마 말도 못하고 헤어진 두 사람의 감정은 비슷하였다. 주인공 역시 하나뿐인 아들이 미국으로 가서 생활을 하며, 부인마저 아들을 따라 간 후 자주 오지도 않아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그러나 옛 고향 여고생과 합친다든지 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아예 자주 만나는 일도 없다. 그냥 아련한 과거 제2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 그런데 그 여고생이 마지막 죽으면서까지 간직하다 전해준 것은 과거 달동네에서 일어난 여러 이야기와 자신의 삶이었다. 그런 원고를 받은 주인공은 역시 덤덤하다. 한때 자신이 좋아했던 것처럼 그 여고생도 마음속으로만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만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내용적으로는 주인공이 사업 관계로 알게 된 한참 위 연배의 형님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강화도에 바람 쐬러 간 어느 날 지는 해를 본 적은 있다. 그렇다고 전체 줄거리에서 저녁 무렵이 자주 등장하거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단 한 줄 그냥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환경적이고 자연적인 해질 무렵이라는 단어가 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황혼을 이야기한다. 해질 무렵에 생각해보니 과거 추억이 떠오른다든지, 아니면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정한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였다든지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이라고 짐작가게 하는 대목도 없다. 그저 그런 황혼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 나머지 연결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소설의 배경이 일제 말부터 한창 달동네의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때까지 연결된다. 줄거리의 소재는 물론 달동네를 재개발하는 순간이다. 그 과정에서 얽힌 내용이 서로 다른 환경에 의해 다른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 쫓기고 저리 쫓기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으며 누구하고 상의할 곳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을 말한다. 경제적으로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그렇게 하자고 하면 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배고프면 물 한 바가지 마시고 헛트림 하면서 이빨을 쑤시면 될 것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가진 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에는 주먹 센 사람의 힘을 빌리지만, 나이가 들면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서로 없을 때에는 그냥저냥 살지만 막상 가진 자와 비교가 되면 어딘지 씁쓸하고 부족한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황혼이 되면 이런 것쯤은 모두 경험한 터이다. 이제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체념하고 산다. 이런 것들을 황혼 즉 해질 무렵에 느끼는 게 인생이다.
주인공 박민우의 해질 무렵은 어떤가. 옛 고향 친구였던 건설업자도 병으로 죽었고, 풋풋한 첫 사랑의 여고생도 죽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동네 왕초도 죽었고, 그와 싸웠던 인텔리의 상징 체육관관장도 도망쳤다. 여고생의 유일한 아들은 자살하였고, 주인공의 딸은 미국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다. 거기다가 아내마저 딸을 따라 미국에 살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해 뜨는 모습은 없다. 해질 무렵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는 시작이다. 모든 것이 죽는 시점이다. 이제 주인공도 나이가 많아 스스로 해질 무렵임을 느끼고 있다. 물론 내일 아침 해가 뜨겠지만, 그 해는 내가 보는 해가 아니라 내 자녀들이 보는 해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이미 해질 무렵이 나의 황혼일 뿐이다. 그런 해를 바라보는 저녁 무렵에 내 자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시각에 해가 뜨고 있는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황혼은 아름다운 황혼일까 아니면 을씨년스러운 황혼일까. 해질 무렵 수평선 너머를 바라볼 때 지난 삶을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대로 말할만할 것인가 참으로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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