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시대의 창/ 2005.08.15/ 516쪽
김삼웅 : 1943년 전남 완도 태생으로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취득.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입상하면서 언론계에 진입하여,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지냈고, 신민당보 편집장, 평민당보 편집장, 대한매일 주필을 역임하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옥고를 치렀으며,『한국현대사 바로잡기』, 『백범 김구전집』 등 3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진보적 『기독교 사상』에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과 부원장,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단재 신채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단재에 대하여 그저 역사서를 저술한 사람이었다는 너무나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의 작금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빈약하고 그들에 대한 조명마저 어두운 판에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단재는 단순한 사학자가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투쟁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몸과 무기를 통한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크고 더 많은 힘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란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민을 일깨우고 동포애를 일으키며, 조국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그렸으며,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사람이었기에 말이다.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신광식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한 선생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주하여 자랐다. 조상은 대대로 봉건적 양반 집안으로 멀리는 신덕린과 신숙주가 계보를 잇고, 조부는 신성우이다. 정몽주의「단심가」에서 따온‘일편단생’을‘단재’로 고쳐 호로 사용하였고, 혼자서 잡지를 만들다보니 여러 필명으로 금협산인, 무애생, 열혈생, 한놈, 검심, 적심, 연시몽 등 여러 필명을 사용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면서는 변장을 하기 위하여 유맹원, 박철, 옥조숭, 윤인원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13세에 조부의 사숙에서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시문에 밝았다. 이는 나중에 1905년 성균관의 박사로 임명되고, 장지연이 황성신문에‘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 뒤를 이어 항일 논설문을 쓰고 각종 매체에 기고문을 쓰면서 조선사를 연구하는 등 학자로서의 기질을 쌓았던 것이다.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에 날카로운 비판과 비평을 쓰면서 민족혼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여느 신문과 달리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일본이 어쩔 수 없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재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신문과 달리 많은 논설 및 조선인을 부추기는 역사물을 저술할 수 있었다. 훗날 배설이 대한매일신보를 조선인에게 넘기고, 다시 일본인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선생은 논설문 쓰기를 거절하였다.
1907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고 취지문을 작성하면서 선생의 독립운동은 그 정도를 높여나갔다. 한편, 독립군 양성소를 건립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만주를 방랑하면서 고구려 유적지를 방문하였으며 민족의 정기를 받아 백두산에도 올랐다.
1936년 2월 18일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돌연 뇌일혈로 쓰러지자, 19일 오후 3시 서울을 떠나 20일 심야에 뤼순에 도착한 후 여러 경로로 물색하였으나 21일 오후 3시에 겨우 만나볼 수 있었다. 불원천리 달려간 가족들과 급거 면회를 하였으나 정작 선생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며 차가운 바닥에 그냥 누워있는 채로, 담당의가 겨우 한두 시간 길어야 그날 밤을 넘길 수 없다고 진단하였으나 면회 시간이 초과되었다는 이유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지만 매몰차게 밀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면회를 마친 한 시간 뒤 오후 4시 20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옥사하고 말았다. 그때가 만기출옥을 1년 8개월 남겨 놓은 상태였기에, 타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랑하는 조카가 일본인과 결혼한다는 것을 말리다 말리다 막지 못하자 의를 끊는 표시로 자신의 손가락을 단지한 선생, 독립운동에 방해가 될까봐 전처와 이혼을 하고 홀홀 단신 만주로 떠난 당신, 독립운동 자금이 모자라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투옥된 독립운동가, 중국에 대한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하여 매개체에 기고를 하여 받은 돈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국내의 유수 신문「조선일보」는 안재홍이 사장으로 있으면서‘조선상고사’로 알려진‘조선사’가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연재되었고‘조선상고문화사’가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일 그리고 1932년 5월 27일부터 31일까지 연재되었는데, 이때 조선일보가 일본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하여 연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로는 단지 자신의 글을 좀 더 다듬고 고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철저한 독립운동가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자기 신문에 글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선생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처지를 정확히 대변할만한 지면에 글을 실었던 것이다. 홍명희는 1924년부터 1925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단재의 글을 모아 1930년 6월에‘조선사연구초’를 출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선생에 대하여 너무나 먼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단지 조선상고사나 저술한 역사가 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저술한 역사서는 모두가 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에 맞서 싸우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은 고구려와 단군 조선의 강력했던 힘이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면면히 이어온 훌륭한 민족임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의 삼국사기기 한 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는 것처럼 단재가 저술한 역사서 역시 어떤 목적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현재의 사학자들은 여기에 덧붙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저술한 역사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를 부정하는 그 어떤 사람도 선생처럼 훌륭한 일을 하지 못했기에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작품 중 소설은 꿈 하늘, 백세 노승의 미인담, 일목대왕의 철추, 일이승, 류화전, 용과 용의 ROEUR전, 건륭황제의 꿈, 고구려 3걸전 등이 있다. 시로는 너의 것, 매암의 노래, 1월 28일, 새벽의 별, 나비를 보고, 한나라 생각, 금강산, 고려영, 현량사 불상을 보고, 육십일일 계단의 보고, 백두산 도중, 도제사 언문, 고원, 무제, 몽견김연생, 계해 10초 2일, 가형기일, 증 기생연옥, 증 결기당 안태국, 북경우금, 서분, 영오, 독사, 구역세제봉술회 등이 있다.
사학(史學)논저에는 역사총론, 강역고, 선랑사통론, 전설시대사, 고구려사, 단군강역도만주국, 해북열국과 고구려, 중국사관, 조선사를 외국인에게 배우지 말아라, 조선사 정리에 대한 사의 등이 있다.
단재 신채호 평전을 읽으면서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느꼈다. 나라가 흥하고 쇠함은 국민의 애국심도 작용하며, 오랜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도 한 몫 하는 것이다. 과거 쓰라린 경험을 한 우리가 지금 그 당시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거스르는 일이다. 역사를 바로 알고 다시는 그런 쓰라린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너는 그렇게 힘들게 해라 나는 그 동안에 입신양명을 위해 개인 치부를 할 것이다 하는 얄팍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는 한 이 나라는 바른 독립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빌붙어 흘린 것을 주워 먹는 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주인이 바뀌거나 떠나버리면 그는 끈 떨어진 가방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라도 눈을 바로 떠야 한다. 그 많은 선열이 피를 흘리며 찾아 놓은 나라를 어떻게 지켜 갈 것인지 아로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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