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톨레랑스
조형숙/ 나노미디어/ 2015.06.25/ 288쪽
조형숙 : 1969년 밀양 출생, 부산대 영어교육과 졸업, 고등학교 교사와 국제교류교육원 연구원을 지냈다. 미국 조지아주 조지아대학 석사 과정과 플로리다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미국에 유학을 가면서 아들의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하여 동반하고, 생활에서 겪은 것 그리고 교육을 받으면서 이문화 가족으로 느끼면서, 소수자에 대한 그리고 문화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의무감을 느꼈다.
이 책은 책의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다문화 가정이 겪는 여러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역설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다문화로 인한 갈등과 소용돌이를 사회문제로 다루고 점차 제도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공동사회 혹은 지구촌에서 다문화 가정은 쉽게 일어날 것이고, 혼합된 다문화 가정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다문화 가족과 함께 살아가야할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다문화에 대한 편견이 심한 편이다. 그것은 우리라는 범위를 한 핏줄 혹은 대대로 이어온 한 가문으로 국한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문화 인종이 우리와 섞인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가까이는 강점기가 그랬고, 조금 더 올라가면 직전의 서양문물의 혼입이나 몽고의 침입이 그랬다. 더 멀리는 신라의 향가에 나오는 처용이 벌써 아랍인이라는 해석은 어찌 할 것이며, 백제와 부여가 중국 본토를 점령하여 살았던 것은 어떤가. 또 단군 설화에 나오는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찌 해석할 것인가. 모두가 다문화를 상징하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문화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실상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이 파고 들어왔는데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심하면 자기부정일 수도 있다. 나는 남에게 내세워 뭔가가 특별하고 싶다는, 잘 알면서도 내 가족은 그렇지 않다는 억지 말이다.
대체로 짐작은 하고 읽었지만, 역시 빈민가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그런 가정에 또 그런 지역에 지원하고 제도적으로 부유층과 유사하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 혹은 기득권자들의 우선권이 지배하는 나라다. 이런 것들을 잘 아는 미국 정부는 앞으로 미국이 더 강한 나라 더 부유한 나라가 되기 위해 좀 부족한 지역 부족한 가정에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문화 정책으로 나타난다.
다문화 정책은 원래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이 유지되고 세계의 강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원주민 혹은 미국 토박이는 그 숫자도 적을뿐더러 서로서로 유대 되는 경향이 적은 편이다. 그것은 지역이 넓은 반면 인구가 적어 서로 부딪칠 기회 자체가 적으며, 그들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농장을 운영하면서도 노예라는 사람을 이용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무나 아무 때나 오고 싶은 사람은 오라는 이민 권장국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에 대한 지원이 약하면 그들은 거의 노예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로 변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들은 언제까지나 대물림하면서 그런 생활을 할 것이다. 반면에 백인들 혹은 토박이들은 그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민자의 수가 늘어나면 토박이들은 이민자 즉 다문화 가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을 먹고 살게 만들어주어야 노예로 부려먹든 사회적 약자로 이용하든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도 약자는 좀 더 강해져야 하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다 할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말하자면 약자에게 베풀고 약자의 약점을 발견하여 그것을 개선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것을 좋은 말로 바꾸면 사회적 제도 개선이며 서민을 위한 중점 복지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 어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차별적 복지는 또 다른 문화적 이민자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복지는 보편적 일률적 복지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충분한자는 그런 복지 혜택을 받는 대신 자신이 알아서 수혜를 거부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어린이 무상급식이 이루어지고, 학교 급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만 도시락을 싸오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이며, 반대로 전교생은 도시락을 싸와라 그 대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학교에서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차별적 복지인 것이다. 어찌 보면 그 둘 사이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난 차이를 품고 있다.
차별적 복지는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선을 긋고 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상호 나타나지 않게 유지하면서 자신이 선택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면 보편적 복지는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내면서 상호 보완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국민에 대한 혹은 시민에 대한 복지이면서 의무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의미로는 배려와 봉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면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차별화를 전제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없고, 특히 우리나라처럼 인구가 줄어들면서 다문화 가정 혹은 다문화 가족이 들어나는 추세에 있는 나라는 지구촌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내가 편해지려면 내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부하 직원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내가 바쁠 때 그 사람을 잘 활용할 수 있고, 나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수자 혹은 이민자를 잘 활용하고 싶다면 그들을 잘 가르치고 보살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내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 팽개치고 나몰라라한다면 그들도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에 나몰라라할 것이다. 아니 도와주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도움을 줄지 혹은 도움은 주고 싶은 데 능력이 없어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다른 말로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한 가지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맨 뒤에 있는 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도 이 책의 전달사항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단지 에필로그만으로는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부담스럽지 않고, 미국까지 가서 비싼 수업료 내고 공부를 하니 반드시 성공을 해야 하고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책은 아니다. 물론 그 성공이라는 기준 역시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기에 저자가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느냐 마쳤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말하는 공부를 잘 한다고 하는 아들이 하버드대학에 갈까 하는 질문에 아니라고 말한 부모가, 그 이유로 너는 하버드대학에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참교육에 대한 일깨움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하버드대학에 가고 싶으면 하버드가 원하는 인재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저자가 미국에서 겪은 차별화 즉 다문화 가족으로 살면서 느낀 것들이, 다시는 다른 이민자 혹은 다문화 가족에게 되풀이 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도 다문화 사회가 된다면, 이미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면, 앞으로도 다문화 민족이 더 늘어날 것이라면 그들을 위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소비가 될 것이며, 비용이 아니라 투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