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솔/ 2004.09.24/ 436쪽
정주영 : 1915.11.25 강원도 통천 출생, 현대그룹의 창업자이다. 대한민국의 현대 경제계를 일군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때마다 새로운 도전과 희망을 가꾸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경영자로 칭송을 받는다. 2001.03.21 세상을 떠났다. 소학교를 졸업한 학력이지만 국내외 대학에서 공학박사, 경영학박사, 철학박사, 경제학박사, 인문학박사까지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한국 경제계 발전사를 이야기하면서 정주영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어릴 적에 가난이 싫어서 가출을 세 번이나 하였고, 그때마다 부모에게 다시 끌려갔다가 드디어 네 번째 가출을 한 후에는 가족과 소식을 끊고 지냈다. 행여 부모님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다시 찾아올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잔심부름꾼부터 시작하여 자그마한 쌀가게 주인이 되면서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또한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시기 적절하게 시작한 사업들이, 조금은 무모하다고 할 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이 앞서가는 경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저자 정주영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에 있어서도 남과 다른 방법을 도전함으로써 성공시키는 놀라운 실천력을 보여준다. 남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혹은 간섭되는 방해 요소들로 불가능을 이야기하지만, 정주영은 그런 중에도 가능한 부분 즉 좋은 점을 찾아 집중 공략함으로써 일을 성사시키는 면밀함과 예리함을 보였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울산의 현대조선소를 만들 때의 일화는 우리를 가슴 벅차게 한다. 황량한 모래 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서 세계 최대의 선박을 건조하겠다는 계획은 당시 울산이나 현대의 여건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선박 일등국인 유럽의 기업이나 정부 그리고 아시아의 선박 맹주인 일본과 일본 기업들은 한국의 선박 건조에 대해 그것도 초대형 선박에 대한 도전을 불가능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기에 필요한 자금부터 기술 등 어느 한 가지 순조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차례 방문하고 두드려서 겨우 얻어낸 것이 바로 영국의 수출보증국에서 보증을 서고 영국 은행이 돈을 빌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대는 입장에서는 조선소가 완공되고 선박 건조 능력이 충분하다고 해도 돈을 대려면 그에 대한 타당성이나 상황 여건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으로, 선박을 발주할 선주가 있다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주 입장에서는 돈을 빌려주면서 기업을 지원해줄 형편이 아닌 기업에게 선박 그것도 초대형 선박을 발주할 사업가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을 만나 설득하여 발주를 얻어냈다.
이를 정리하면 황량한 바닷가 사진을 보여주고 거기에 조선소를 지을 것인데 아직 돈이 없어 부지 매입도 안 된 상태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면 그 돈으로 땅을 사고 조선소를 지은 다음, 필요한 설비를 사고 선박을 만들어 팔아 남는 이득금으로 돈을 갚겠다는 것이다. 이때 활용한 것이 5백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이었고, 발주한 선박의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수하지 않아도 좋다는 계약서였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었다는 해석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차관을 도입했고, 그리스의 선박 발주자 리바노스와 계약을 맺게 된다. 이후 부지 60만 평에 건평 14만 평, 최대 건조능력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한 전에 당당히 완공시켜 세계 조선사를 다시 쓰게 한 것이다. 이는 조선소를 지으면서 선박을 동시에 건조하는 방식으로 공기를 앞당기는 한국인 특유의 공법을 활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배를 만들겠다는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현대맨들의 자부심과 당찬 각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에도 오직 한 사람이 가능하다고 외쳤는데, 그 중심에 정주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조선공사에서 17,000톤 규모의 선박이 가장 큰 건조 경험이었으나, 현대는 26만톤 초대형 선박을 그것도 아직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겠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니 가히 웃음거리가 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는 현대자동차를 설립할 때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그리고 부수적인 시멘트와 정유업을 계획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88년 올림픽 경기를 유치할 때에 모두가 나고야로 이미 결정 난 사실이라고 믿었을 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서울올림픽을 위하여 선전하면서 일궈낸 것은 정말 집념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단 1%의 가능성만 있다면 그것을 집중하고 확대하여 공략하는 정신이 바로 정주영식 경영 기법인 것이다. 이런 예는 천수만 매립에도 나타났다. 마지막 공구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물결이 세지자 어떤 방법으로도 끝막이 공사가 불가능한 때에 폐 선박을 활용하여 물의 흐름을 차단한 후에 공사를 끝낸 것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중동 건설 시장에 처음 도전한 것은 낮에는 40℃에 육박하는 열기와 모래 사장뿐인 벌판에서 공사를 하는 것이 무모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을 뒤집으면 밤에는 서늘하니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될 것이고, 천지인 모래를 활용하면 공사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이용한 사람이 바로 정주영이다. 한 겨울 부산 대연동 유엔군 묘지에 잔디가 없어 황량한 것을 보리로 덮어 푸르게 만든 것은 귀여운 애교에 속하기도 한다.
혹자는 다 늘그막에 대통령병에 걸려 도전한 1992년 통일국민당의 창당과 대선 후보로 나선 것을 두고 망령이 들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마지막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미친 짓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그간의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무능한 대통령이 힘만 앞세워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경제를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런 경제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나도 이런 점에서는 정주영을 이해한 사람 중의 하나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나는 정주영을 잘 몰랐기에 그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그가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돈에 목숨 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으며 돈 때문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돈보다 경제에 우선권을 두었고, 그로 인하여 생활의 편리함 혹은 국가의 부강함을 앞세웠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며 경제인들이 가져야 할 덕목 중의 첫 번째였다. 최소한 정주영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가출할 때에 짚신 한 켤레 신고 나왔으니, 실패한다고 해도 없어질 돈이 아까워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실패하면 다음 도전할 사람들이 이처럼 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자신은 경험자로서 수업료에 해당한다는 신조였다.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기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는 노망일 수도 있겠으나 누구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남이 할 실패를 내가 대신 해주는 지침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는 되지도 않을 일을 어리석게 도전하는 과대망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정주영이 도전한 모든 일들이 후세에 보는 관점에서 훌륭한 도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 말은 정주영의 판단이 옳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이다.
옷은 태양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주고 찬바람을 막아 보온을 해주는 것이면 족하지 그것이 사람의 위상을 평가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는 집은 거처하면서 같이 모여 식사하고 우애하면 족하지 집이나 방의 크기가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타는 자동차는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차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권력이나 직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정주영의 생활관이었다. 낡은 옷과 구두를 고쳐 신고 꿰매 입는 것은 정주영의 기본이었다. 그러기에 서민 일반인들도 정주영을 좋아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타고난 천운이 없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근검절약하면 누구나 작은 부는 축적하여 밥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말로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람도 정주영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정주영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터득한 사람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면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래서 미국의 존스 홉킨스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의 저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정주영이 북한의 행정구역인 통천에 계속 살았었다면 북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월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비약적인 생각도 해본다. 정주영이 서울로 가출하여 살았다는 것도 어쩌면 우리나라의 행운 중 하나일 것이다. 정주영! 그는 세기가 낳은 경영학자였다. 다만 형식을 갖춘 논문을 쓰지 않아서 학회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에게는 굳은 철학이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지금의 역경을 딛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래서 그는 어려운 환경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실천하였다. 그리고 이루어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에 도전하여 남보란 듯이 크게 만들어놓았다. 기회는 도전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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