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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의 대화

꿈꾸는 세상살이 2016. 8. 24. 16:53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 북스코프/ 2014.09.15. 21쇄/ 444쪽

 

신장섭 : 경제학자로 한국경제사를 주로 연구한다. 일본과 한국의 20세기 경제 관련과 19세기 후반의 유럽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기술적, 제도적 요인들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였다. IMF이후 처방 및 구조조정에 비판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한국 특유의 대안을 모색해왔다.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 때에는 국제금융시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매일경제신문의 논설위원을 비롯하여 경제부 기자로, 기획재정부장관의 자문관을 지냈다. 저서로『금융전쟁』,『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삼성반도체 세계 일등 비결의 해부』등이 있다.

 

이 책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로 알려진 대우그룹의 회장이었던 김우중과의 대화를 글자로 풀어놓은 것이다. 잘 알다시피 대우는 우리나라 5대 재벌에 들었던 거대기업이었다. 그러나 1997년 IMF를 맞고,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우리는 대우의 몰락에 대하여 경영인의 방만한 기업 운영과 거대한 자금의 해외 밀반출, 분식회계 작성으로 기업의 부실 초래,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기업으로 인정하고 있다. 최소한 이것은 정부의 혹은 고위 관료들의 분석이며, 대우 몰락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기업 회장으로 있었던 김우중씨는 이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정부의 분석은 잘못 된 것이며, 대부분 대우를 강압으로 누르기 위해 짜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부분 정부의 약속 불이행 혹은 정부의 규제 강화와 기업 지원시스템의 가동 부재를 든다. 말하자면 대우는 스스로 잘못으로 인해 망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해체 수순에 의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다. 저자 신장섭씨는 2010년부터 약 2년간 김우중 전회장과 대화를 나눴고, 그 이후 대화 내용을 책으로 엮기 위하여 20여 차례를 더 만났다. 그리고 대우 몰락에 대한 일반 인식과 다른 시선을 담았다.

 

책에 의하면 대우는 세계경영을 외친 선구 기업이었다. 물론 현대나 삼성, 혹은 LG처럼 선대가 일구어놓은 기업을 잘 승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대우는 그야말로 새로 탄생한 신생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우가 여타 그룹과 겨룰 수 있었던 것은 국내보다 국외 즉 세계로 눈을 돌린 데 주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생기업이 기존의 기업들과 맞닥뜨릴 수 있는 방법은 독특한 제품이거나 월등히 싼 가격이거나 하는 것이지만, 대우로써는 아직 그렇게 정면 승부를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런 요인을 다 감수하고라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해외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수출 위주의 전략을 세웠으며, 거기에 신용과 선점 전략으로 우위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세계 경영의 기초가 되었다.

 

아직 내수로 성장하던 다른 기업들과 달리 해외에서 그것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대우는 국내에서도 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대중대통령은 그런 김우중씨를 불러 경제계의 커다란 별로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무슨 경제 회담이나 주요 행사에 경제적 신분자의 입장으로 대우의 회장인 김우중씨를 대동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구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경제 관료들은 이런 국제 정서나 기업 경영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없이 그냥 이론적이거나 혹은 산술적인 이론을 내세워 김우중씨와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김우중의 손을 들어주었고, 모두들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갖도록 무언의 압력을 받고는 하였었다.

이런 일은 김대중과 김우중 두 사람의 관계로 따지면 국가적인 이익으로 볼 수 있지만, 개인 그것도 권위적인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 있었던 대목이다. 훗날 대우에 대한 처방이 내려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래서 결국 대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내가 알기로도 김우중씨는 몇 차례의 사재를 털어 기업 회생에 열정을 보였다. 여타 기업 총수들은 사재를 털 경우에 대체로 기업의 부정이나 개인의 사회적 지탄을 받았을 경우에 국민들의 입막음용으로 내놓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최소한 김우중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다. 한국중공업 인수 당시 정부와 대우의 약속에 의해 강요에 의한 인수였기에, 차후 대우그룹에 대한 금융지원을 약속하였으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고, 김우중씨는 사재를 털어 한국중공업의 정상화를 꾀하게 된다. 또 대우조선을 인수할 당시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본의 아니게 원하지 않는 기업을 인수하면서 그 대신 정부의 지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어쩔 수없이 개인이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업들 역시 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대우는 기업 회생의 처방사로 불리게 된다. 이 외에도 여러 회사들을 인수하면서 부실 기업을 정상화시키면서 얻어진 이름이기도 하다.

 

김우중씨의 전략을 보면 남들은 다른 회사를 매입하는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어차피 그 사업을 하려고 한 마당에 그런 사업을 하던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더 빨리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하였다. 남들이 회생할 수 없다고 판단한 기업이라도 김우중씨는 그를 인수하여 정상화시키면서 얻은 부정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런 기업을 인수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업망과 제품의 구성 등 여러 면에서 경쟁하기에 좋다는 말이다. 물론 그 기업이 정상화될 경우에 국한되지만 말이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도 김우중씨는 기업을 매입하였다. 그것은 세계 경영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이요 그렇게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기업 경영의 길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던데 대우는 세계화를 외치면서 국내보다 국외에 더 많은 투자를 하였고, 혹은 외국 업체의 은행에서 돈을 빌려 바로 다시 국외의 현지에 투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 국내의 금융을 국외 지사나 공장에 보내 운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훗날 이런 부분은 국내 자금의 해외밀반출이라는 오명을 쓰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반대로 이런 운영은 남들이 투자하지 않은 아프리카의 오지 국가나 공산권 국가들에서도 일어났다. 그런 관계로 우리 정부를 대신하여 수교를 맺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런 점은 국가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바라고 했던 대우는 아니었다. 대우는 그냥 먼저 가서 시작하면 성공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는 오지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김우중씨가 말하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대우를 잘 알아주지 않았어도 국외에서는 대우를 성공한 기업 그것도 신흥국가로서는 최초로 등장한 다국적 기업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우중은 하버드대학교 같은 외국의 유수 기관에 이사로 등재되어 있으면서 자문도 해주고 도움도 받았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김우중을 기업 경영의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때 김우중은 미국의 유수 기업들이 지향하는 단기 성과위주의 경영방식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주주들에게 잘 보이면 그만이라는 경영을 못마땅해하였다. 그러기 위해 미국의 기업인들은 잦은 해고와 잘 나가는 기업마저 팔아서 자신이 임직한 동안에 성과만 내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GE의 회장 젝웰치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퍼져있어서 그를 탁월한 기업인으로 존경하지만 결국에는 GE가 존경받는 기업에서 밀려나는 꼴을 자초하였다. 더구나 이런 경영방식을 우리 한국에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을 당시에 김우중은 커다란 실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죽어도 종업원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IMF는 우리나라의 기업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한다. 이에 맞춰 정부와 관료들은 기업에 대한 윽박조르기가 시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IMF는 국가 즉 정부가 잘못 해서 일어난 것인데 마치 기업이 무엇을 잘못하여 벌어진 것처럼 비쳐지고 그런 죄과를 기업에게 물었던 것이다. 각 기업마다 자구책을 제시하고 기업의 부채는 1년 6개월 이내에 200% 이내로 조정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때 다른 기업들은 국내 투자에 중점을 두었기에 정부와 금융계 그리고 기업 간의 조정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요구를 실행해나갔다. 그러나 대우는 유독 해외 투자가 많았고 그것도 해외 은행으로부터 빌려온 돈이 많았으며, 그렇게 인위적으로 기업의 부채를 조정한다고 하여 IMF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대우는 기업의 부채 비율 감소를 시행하지 않았고 사원감축 등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정부와 관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에는 대우에 대한 저평가 혹은 기업 경영인에 대한 부도덕적 인신공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과는 기업의 부실 회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마침 IMF의 요구에 의해 한국 기업의 매각은 대우로 통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대우는 순식간에 몰락하게 된다.

이때 김우중씨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IMF가 한국을 좋게 보아줄 리가 없으며, 오히려 과감한 경영으로 성공하여 한국식 IMF극복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니 김영삼정부부터 이어져온 정책 과실을 숨기면서 기업인에게 덮어씌우는 작업은 한바탕 잔치면 충분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 미국과 선진국의 금융그룹들은 대우를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우처럼 희생양이 나오더라도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국의 IMF체제를 몰고 가려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재건을 위하는 방법이 아니라, 신흥국에서 세계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 나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말하자면 대우가 미워서 한국을 밉게 본 점도 숨길 수 없는 추측이다. 이참에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우의 김우중은 이런 것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IMF가 들어오기 직전에 동남아시아에 불어 닥친 구제금융 체제에서도 그랬고, 그 후에 미국에 영향을 미친 구제금융 당시 미국 정부는 전혀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많은 투자를 하여 극복한 사례도 있었다. 말하자면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유례없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였고, 그렇게 해서 헐값으로 매겨진 기업들에 대하여 미국 등 선진국 자본이 거저 줍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정부가 제조업을 죄악시하고 서비스업 혹은 금융업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우리나라 제조업이 하루아침에 멈춰 서게 된 것이다. 그 많던 투자가 멈추고 이미 투자된 것은 불용이라 치부하고, 오로지 금융과 부동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만 쫓아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김우중을 좋게 평가하였으나 휘하의 관료들이 하나같이 김우중 타도를 외치니 어쩔 수 없었으며, IMF의 요구를 전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어 그냥 관료들의 편을 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당시 김우중은 적극적인 해외투자와 공격경영으로 IMF를 극복한 묘안을 제시하고 그렇게 실행하기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물론 정부는 그런 제안을 거절하였고, 오히려 정부 정책을 따르지 않은 부도덕한 기업을 낙인찍히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훗날 신장섭씨는 이런 김우중의 의견을 토대로 분석하면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그 당시 3만 불 혹은 4만 불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풀어쓰기도 한다.

대우그룹의 해체와 동시에 김우중은 출국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놓고 세간에서는 해외 도피라고 말하며 어찌하여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김우중은 정부의 권유에 따라 해외로 나가 있었으며, 당시 지병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만약 정부와 관료들이 말하는 대로 김우중이 대역 죄인이라면 해외로 나갈 때에 출국금지조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나가 있다가 들어오면 그 사이에 대우를 약속한대로 처리하겠다는 말을 믿고 합법적으로 해외로 나갔던 것이다. 또 김우중과 그 측근들에게 매긴 약 40조원의 추징금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관료들 보고서에는 추징금을 매겨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검찰은 해외 도피성 자금이 아니라서 그 부분에 대하여는 벌을 물을 수 없다고 하였고, 법원 역시 벌을 줄 수 없는 형편이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 시범 케이스로 죄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고 판시한다. 말하자면 (해당하는 일부 항목에 대해서는) 정식으로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우는 해체되었다.

 

김우중은 이렇게 정부에 대하여 몇 차례나 속으면서 기업을 정상화시킨 경험이 있다. 나중에 한국중공업이 된 창원중공업이 그렇고, 조선공사가 짓다가 만 대우조선이 그렇고, 삼성차를 인수하면서 그룹 간 업종 재분배시에도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IMF구제금융을 받는 순간에 정부 혹은 관료들에게 속으면서 기업이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한마디로 비운의 기업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베트남에서 후진을 위하여 노력 중이다. 우선 배워야 생산성이 올라간다고 하여 무학자 혹은 저학력자를 모아 고등학교 교육까지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각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고, 그러면 기업은 양질의 인력을 수급 받아 생산성이 향상되고 성공하는 기업이 되는 선순환을 진행 중이다. 이것이 진정한 김우중의 인간성이라 할 수 있다.

 

김우중은 대우 그룹을 지배할 적에도 자신이 가진 주식의 비율에 따라 지배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여러 차례에 걸쳐 사회에 환원한 바 있으며, 오로지 창업주로서 그런 예우에 따라 기업 회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해석해보면 직원들이 그렇게 존경하며 떠받들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으로서 공과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적 측면에서는 김우중이 잘했다고 생각된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5년 만에 자신이 창업하고 일구어낸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 우리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존경받아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그를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물을 알아주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를 매도하고 경제사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정부 혹은 사법부는 그를 잡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으로 보아 김우중에게 그렇게 큰 죄가 없기에 그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희대의 기업인, 김우중과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적은 나라에서는 오로지 수출로, 혹은 글로벌 경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우중의 의견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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