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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한국땅인가?

꿈꾸는 세상살이 2019. 3. 7. 14:02

 옮김 : 오구룡초부 2007.08.31 11:55 에서

대마도는 부산에서 지척이라 경비가 작게 들면서

(제주도 보다 별로 비싸지도 않다고)

그래도 외국이며, 조그마한 섬치고는 올라갈 만한 산도 있고,

싱싱한 생선회도 잘만하면 제주도 보다  싸게 먹을 수 있어

요즈음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다.

 

......쓰시마섬에는 신라시대의 박제상, 조선 말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숨진 곳 등

역사 유적이 많다. 우리나라 사투리도 들을 수 있고, 농기구 사용도 비슷하다.....

 

쓰시마섬이 한국인들의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

이 때문에 쓰시마섬은 주 산업을 수산업에서 관광업으로 바꾸기로 하고,

한국 관광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로표지판에 한글을 함께 쓰고,

식당 메뉴판도 한글과 일본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

쓰시마섬의 이런 노력은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올해는 7월 말 현재 3만683명으로 연말이면 5만5천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쓰시마섬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한국 관광객이 찾는 셈이다.

일본 방문 때 비자 면제, 경부고속철도 개통, 주 5일제 시행 등도 쓰시마섬

관광객 증가에 한몫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8월 31일자 '쓰시마섬, 한국인 관광객 북적 발췌요약)

 

이렇게 다녀 와서는 대개 거 대마도가 원래 우리나라 땅이라는데요 한다.

왜 그렇습니까 물으면, 현지 가이드들이 (아마도 한국사람일 것임)

대마도가 조선시대 계속 우리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모양이다.

 

또한 마산시는 2005년 4월 06일 ‘대마도(對馬島)의 날’ 조례를 공포하였다.

 

..마산시의회는 일본 시마네현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한 후인

지난달 18일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고 영유권 확보를

그 목적으로 하며, 조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내용의 조례안을

제정해 마산시에 이송했다..

 

역사에 무심한 관광객들이 자질(資質)이 떨어지는 현지 가이드가 되고 마고

떠드는 것 듣고 옮기는 것 까지야 있을 수 있지만, 지방자치 단체가 덜컥

조례부터 만든 것은 경솔한 처사다. 일본 시네마 현 다케시마의 날 조례에

상응한 조치라고 하지만, 상대가 도둑질한다고 우리도 따라서 할 것인가?

 

현지 가이드도 그렇지 그런 식 해설은 일본에서 공연히 반한 감정 만 불러

일으킬 것 아닌가? 입장을 바꾸어 놓고 우리나라에 있는 화교가 중국관광객

상대로 안내하면서 한국이 실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면

(아마 그런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여론이 가만히 있겠는가?

 

이제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주장의 근거인 조선에 조공 바친 것을 알아 본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대마도토산물 두 단어를 검색어로 넣고 치면

엄청 쏟아지는 데, 그 중 하나 ;

 

세종 3년( 1421 신축) 8월 3일 계사

 

대마도 도만호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사람을 보내어 유황(硫黃) 5백 근,

서각(犀角) 한 쌍, 단목(丹木) 3백 근을 바치고,  일기주태수(一岐州太守)

원중(源重)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유황 1천 4백 근, 기린향(麒麟香) 8근,

소유(蘇油) 50근, 서각 한 쌍을 바쳤다.

 

이런 기사가 조선 시대 통틀어 무려 281건이 나온다.

따라서 대마도가 조선에 조공 바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대마도가 조공 바쳤다고 우리 땅이라면, 우리나라는 역사상 중국에

계속 조공 바쳤으니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대마도 우리땅의 증거로 조선 조정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내려 준 임명장-교지(교지)를 들고 있다.

 

 




사진 : 가정 34년(嘉靖, 1555년, 조선 명종 10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내린 교지(敎旨)

 

이 교지를 내렸다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면, 우리가 대대로 중국에 책봉(冊封)

받은 것은 어찌 설명하나? 조선 왕조 들어서는 임금이 새로 즉위하면

책봉(冊封) 받는 것은 물론 승하하면 시호 내려 받는 등등 중요한 일 있을 때 마다

중국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아 그것으로 왕권의 정통성(正統性)을 삼는 도구로

활용한 바 있다. 이제 우리 한국은 꼼짝없이 중국의 일부 아닌가?

 

우리의 대응논리는 당시 책봉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있어 외교적 프로토콜이고,

조공은 실재 내용은 국제 무역이다. 조공 바치면 중국의 답례품이 몇 배가 되어

무척 남는 장사로 주변국에서는 형식에 구애치 않고 무역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한 것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독립국이었고 중국에서도 내정에 간섭한 바 없고

(실은 간섭한 적이 더러 있다.) 우리를 외국 취급을 했다 이다.

 

 

대마도에서 왜구(倭寇)가 자꾸 침범하니 조선에서 무마 내지 방지책으로

많은 물자를 내려 주었다. 자기들 토산물 조금 바치면 엄청난 답례가 오니

그거 받아 먹는 맛에 조공(朝貢) 형식에 구애치 않은 것 뿐이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로 주변 오랑캐 특히 북쪽의 유목민들을 달래기 위하여

생필품 일체를 내리고 형식적으로 중국에 별 필요도 없는 변변치 않은

초원의 산물을 받은 것이 조공(朝貢)이었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려면 조공 정도가 아니라 지방관도 파견하고

세금도 걷는 등 여러 가지 행정을 한 레코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종 3년( 1421 신축) 4월 7일 기해

 

……예조에서 종정성(宗貞盛)의 사절인 구리안(仇里安)에게  묻기를

“전번에 서계에 이르기를, ‘대마도가 경상에 예속되었다는 말은 역사 문헌을

상고하나 노인들에게 물어보나 아무 근거가 없다.’ 했으나, 이 섬이 경상도에

예속되었던 것은 옛 문헌에 분명하고, 또한 너희 섬의 사절인 신계도

(辛戒道)도 말하기를, ‘이 섬은 본시 대국에서 말을 기르던 땅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과거에 너희 섬에서 모든 일을 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나라에 올린 것은 이 까닭이었다. 조정에서는 너희 영토를 다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구리안이 말하기를,

 

“본도가 경상도에 소속되었다 함은 자기로서도 알 수 없는데, 계도가 어찌

저 혼자서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망녕 된 말입니다.

가령 본도가 비록 경상도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보호하고 위무하지

않으면 통치권 밖으로 나갈 것이요, 본디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만일

은혜로 보호하여 주신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대마도는

일본의 변경이므로, 대마도를 공격하는 것은 곧 본국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이전(小二殿)에서 귀국과 교통할까 말까를 어소(御所)에

아뢰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도주가 나를 보내어

와서 조공한 것입니다.”하였다.

예조에서는 임금의 지시를 받들어서 물은 것이었다.

 

위 실록기사를 보면 혹시 우리 땅이 아닌가? 알아보기는 한 것 같으나

우리도 상대도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이종무가 정벌했다고 하나 그러면 중국에 수없이 침략당한 한국은

중국에 수없이 편입된 것인가?

 

(이종무의 정벌도 저쪽에서는 침략을 격퇴한 것으로 해설한다.

상대가 있는 역사는 상대방 주장도 들어 봐야 한다.)

 

역사해설은 어찌 보면 넓은 지역에 쳐진 거미줄을 건드리는 것 같아

한 곳을 건드리면 저 멀리 엉뚱한 것이 흔들린다. 대마도 좋아 하다가

한국사(韓國史)를 통째로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