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어린 양이 그립다

꿈꾸는 세상살이 2020. 10. 6. 10:13

어린 양이 그립다

 

어린 양을 보았나? 최근, 어린 양은 몰론 보았겠지! 내가 말하는 어린 양이 그립다는 것은 추억이다. 새 하얀 양은 내가 어릴 적에 쉽게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양에 대한 추억도 없다. 다만 어린양만 추억으로 남았다.

어린양은 어린 양처럼 귀엽고 착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예쁜 아이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당연히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동물이 아니라 항상 부대끼면서 살아왔던 동생에 얽힌 기억이다.

동생은 터를 잘 팔았다는 이유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나는 터를 잘못 팔아서 나와 같은 동생을 두었단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닌데 유독 나한테만 터, , 터 타령이었을까? 해답은 아주 쉽다. 나와 같은 성별이 아닌 사람을 기대하였다는 말이다. 아들 다음에는 딸, 딸 다음에는 아들을 바라고 있었다. 내 다음에 태어날 동생을 내 마음대로 정해주고 뱃속을 나오는 방법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내가 태어난 터를 동생에게 팔았다면 어느 정도는 내가 받아야 하지 않는가? 돈이나 혹은 금품, 없으면 사랑이라도 어느 정도는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요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동요가 유행한다. 동생이 잘 되었다면 반드시 내 몫의 일부는 인정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좋은 터를 헐값으로 팔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받아야할 복에 비해 나는 어림 반품의 가치도 받은 적이 없다.

어쩌면 동생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나는 동요가 생기지 전에 이미 태어났다는 해석인가 한다.

보릿고개를 같이 넘던 그 시절, 어머니께서 동생과 나를 세워놓고, ‘야들아! 너희는 집에서 놀아. 둘이 있으니 심심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놀아라하셨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 힘차게 대답하였다. 어머니께서 일하러 가시는 것을 보면서 배웅 드리고, ‘안녕히 다녀오세요씩씩하게 말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시자 동생은 ~ ’ 하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디 갔을까?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갔을까 구름타고 하늘로 솟아올랐을까! 동생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 내 몫이요 정해진 일과였다. 어머니께 한 번이라도 일러바친 적도 없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었고 동생은 사랑을 받기위해 태어난 숙명이었다. 내가 좋은 터를 아무런 금품을 받지 않고 팔았는데 왜 보상을 해주지 않느냔 말이다. 이것도 숙명에 해당되는가?

동생을 둔 사람은 보호자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보호자는 보호자다. 그런 어린양을 부렸던 동생이 그립다. 지금 벌써 이순이 된 사람이라, 미운 정을 넘어 고운 정이 차고 넘친다. 가족 간의 추억이라는 연결고리가 남았다. 이제 남은 고리를 꿰찰 시간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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