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남긴 두려움
6월 25일에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민 간의 전쟁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쟁은 국가 간 분쟁과 공식 전투를 의미한다. 한국전쟁은 한국 국민들 간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따져보면 한국 국내분쟁이라고 본다.
전쟁을 떠나 일단 휴전 협상을 조인하여 지금도 인정하는 휴전 상태다. 넓은 의미로는 아직도 전쟁 중에 속한다. 휴전도 전투에 개입한 타국에서 주관하였다.
휴전이 되자 부상자들이 속출하였다. 부상자가 치료를 받았지만 장애로 부자유스러우며 생업에 종사하기 어렵다. 정부에서도 마음은 있지만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보상 혹은 대우가 내세울 것이 없는, 불쌍한 나라였다. 어쨌든 전쟁 후유증이다.
그 때 내가 집에 있었고, 부모님은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서 밖으로 돌았다. 집에 혼자 있으며 심심하고 먹을 것도 없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동생 혹 형과 함께 있더라도 어린 나이뿐이다. 나이가 있으면 무조건 나가서 벌어야 했다.
홀로 집에 남아 있다가 손님이 오시면 난감해진다. 지인이 오시면 만사가 해결되고, 타인이 오시면 난망이 동행한다. 경제 환경이 원만하지 못해서 손님 대접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더구나 전쟁이 남겨준 몸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지는 못했으니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어느 날은 타인 손님이 혼자 오셨다. 옷도 남루하고 몸도 일명 갈구리 손이 된 상이용사였다. 오면서 둘러보시다가 어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대뜸 마루에 걸터앉는다. 다음 코스는 무조건 도와달라는 요청을 들이 내민다. 나는 겁이 나서 주춤하면 손님은 저기 쌓여있는 식량을 달라고 말한다. 이것은 창고도 없이 그냥 보이는 대로 놓고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마치 ‘전원일기’에서 마루에 가마를 쌓아놓은 것처럼.
아무런 거절도 없이 퍼 주었다. 그러나 가기 힘든 것처럼 다시 한 번 퍼 달라고 요청한다. 또 주었으나 돌아선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퍼 달라고 말했다. 나는 또 퍼주었다. 세 번씩이나 …
그래도 대문을 넘기가 힘들었는지 지금 먹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그것도 조금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아무런 반감도 없이 순순히 내밀었다. 많은 것을 받고 떠난 손님 뒷모습을 보면 비로소 해방된 느낌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 덩치와 전쟁을 겪어 찌든 역경, 목발과 의수(依手)를 보면 안타까움보다 두려움이 크다. 시쳇말로 거지를 보낸 일을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촌 동생 즉 나의 오촌 아저씨도 바로 목발에 의지한 상이군인이셨다. 그 분의 딸이 내가 사는 집에서 1년 반 넘도록 같이 살았다. 그것이 한국 전쟁의 후유증이었다. 어린 아이의 두려움을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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