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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이 통계

꿈꾸는 세상살이 2020. 10. 6. 14:16

깜깜이 통계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조밀한 나라이다. 그 중에서도 선두그룹에 속한다. 말하자면 토지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다는 뜻이고, 매일 부딪치는 사람이 많아서 사람이 흔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세계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32개국 평균은 일반인 1,000명당 의사가 3.5명이란다. 의료업 종사자 비율이다. 우리나라는 1,000명당 의사가 2.4명인데, 서울에 집중된 숫자는 3.12명으로 조사되었다.

내가 직접 조사한 적도 없어서, 대충 잡아 내놓을 숫자도 부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공식 발표를 무조건 믿어야한다. 평균 3.5명 대 2.4명이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왜 서울에는 그런대로 비슷한 3.12명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서울 사람들이 자주 병을 얻고 많이 다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의료진과 의료 장비가 고가인 탓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시골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서울로 서울로 모여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는 의료 업자가 수입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많은 환자가 모일 수 있는 서울을 고집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이 바로 의료계 파업이요 약사업계 파업이다. 길게 파업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펼치는 파업이 바로 적폐이다.

최근에는 서울을 떠난 지역 즉 대도시 밀집을 피하기 위하여 분산을 유도하였으나 성공적이지는 않다. 강제적으로 분산시키는 경우는 좋든 싫든 상관없이 따를 수 있으나, 개인 경제활동을 빌미로 삼아 저항하고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도시는 살아남고 인구감소와 재정 감소로 인해 결국 파멸되는 지방이 넘쳐날 것이라는 보고서도 있다.

그런 중에 지방 의과대학이 존립하지 못하고 학교 법인이 파멸된 사례가 주목받았다. 이런 아까운 의과대학을 살려 존치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지방 재정을 지원하면서 탈서울 지역의 의료계를 늘리자는 취지로 느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의과대학 졸업생 즉 기득권들이 반대한 이유는 인구 당 의료인 숫자를 늘리지 말자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고가 장비의 구입과 의료인 자질을 핑계 삼아 막는 의도라고 여긴다.

밝히지 않은 깜깜이 통계,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스텔스 계획, 앞뒤가 다르게 만들어낸 눈감고 아웅식 이율배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아전인수식 의료정책 등을 보면 슬프다.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금전적 수입을 앞세우고 환자를 부추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충남에서도 1,000명당 의사 수는 1.5명에 지나지 않다. 경북에서는 1.38명에 이른다. 조금 더 열악한 지역에서는 물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내가 사는 지방에서도 대학병원이 있어 서운하지는 않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서울로 간다. 환자가 가지 않겠다고 해도 지인들이 서울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병을 고치고 살아남고 싶으면 서울로 가야만 한다는 조언이다.

일견 수긍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병을 고치려고 서울로 갈 필요는 없다는 병도 많다. 그러다 죽으면 인생이 짧다며 안타깝고 아깝기는 하겠지만, 한 시 한 끼를 연장해가면서 살아가기에 목숨 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울로 가야할까? 현실적으로는 지방에 의사가 없어서이다. 환자 대비 수입이 적어서 탈지역 의사가 서울을 선호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아직 서울도 3.5명에 미치지 못한 3.12명이니 마음 놓고 개업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다.

의사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환자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현시대는 자유경쟁사회이기 때문에 시장(市場)에 맞는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다면, 잘 지켜지고 있을까? 간호사가 나이팅게일 선서를 했다면 잘 지켜지고 있을까? 환자에게는 적합한 선서가 없는가? 있는 선서를 직접 낭독했는데 복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저 돈만 내면 끝인가? 돈 있어도 안 내고 죽으면 되지 따져 더 무엇에 쓸까?

 

사회는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신이 만들어놓은 법이다. 각자의 욕심과 과욕이 넘쳐도 누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쥐고 지고 이고 업고 갈 방법도 없다. 돈 방석에 앉아도 돈 침대에 누어서도 갈 수도 없다. 다른 사람과 서로 돕는 방식이 바로 만족을 같이 누리는 최선의 지름길이다. 나는 어느 정도 달성하였을까? 달성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어느 정도 노력하였을까? 나 자신도 모르는 깜깜이 미지수다.

단시간을 다투는 심근경색과 뇌경색을 지나면서 지역에서 치료받았던 나다. 물론 생사를 다루는 골든타임을 지나 완급과 상태에 따라 이송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와 환자가 명확한 판단을 내린 후 상의 협의하고 결정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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