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셋 먹을까 저녁에 셋 먹을까
아침에 셋 먹을까? 저녁에 셋 먹을까? 선택권을 줄테니 손들고 말하라는 문장을 줄여서 조삼모사(朝三暮四)라고 부른다. 먹여 줄 수량이 홀수로 한정되어 있어서 반으로 나눠 세 개 그리고 더하여 반씩을 줄 수도 없다. 주는 입장에서는 수량이 이미 정해져 있으나 저녁에 줄 분량을 우선 빼돌렸다가 다른 목적으로 활용할 묘수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아침에 셋을 먹으라면 그 수량도 감사하다며 군소리 없이 받아먹는다. 한국인의 기질이었다. 겸양과 겸손을 떠나 근면과 끈기, 열정으로 뭉쳐온 국민성이었다. 부농이 많은 농사를 지으려면 힘들고 고된 일 너무 벅차서, 머슴을 두고 일하면서도 고된 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일을 해보아서 심정을 안다는 말이다.
내가 아는 지인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어느 친척이 중농을 천직으로 삼아 농사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논으로 가서 해가 져서 어두울 때까지 매달렸지만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몇 명을 두고 같이 일을 해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논고랑에 같이 들어가서 풀매기를 하면 훨씬 쉽다. 한 번 허리를 굽히고 열심히 일하다가 저쪽 고랑 끝에 도착하면 허리를 펴는 하나의 공정이다. 해녀가 물속에 참았던 숨을 휘이유~ 하고 고개를 드는 것처럼 정해진 습관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일꾼은 그렇지 않았다. 가다가 허리를 펴면서 주위를 둘러본다거나, 허리를 편 김에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자주 허리를 펴면 혹시 눈치 먹을까 슬그머니 허리를 굽히고 일을 한다. 또 아무도 모르도록 조용히, 자주 눈치껏 허리를 편다. 이것이 일꾼과 주인의 차이다. 좋게 표현하면 일꾼과 삯꾼의 차이다.
주인공 친척은 항상 허리 펴지 않기 운동을 해왔다. 처음부터 한 고랑 끝까지. 그러고도 삯꾼을 나무라지도 않았고, 품삯을 깎지도 않았다. 그저 내 뒤를 따라 열심히 일해준 것에 고맙다는 뜻이었다. 다 알면서 모른 척 속아주면서.
그런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88세를 넘은 현재까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본 적도 없다. 지금도 꼿꼿한 허리를 가지고 당당하다. 80살이 넘자 운전면허를 취득하면서 중소형 승용차를 구입하였다. 가진 것은 있으나 얼마나 살다가 죽을 것이냐고 작은 차를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삯꾼은 왜 상일꾼처럼 묵묵히 일하지는 않았을까? 원조 한국인은 그렇지 않았었는데 왜 갑자기 변해버렸을까? 이것은 사람의 몸 상태와 마음가짐 형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무조건 참지 말고 우선 편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속셈을 굴렸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단어 조삼모사의 병폐다.
조삼모사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의 형편과 받아 먹을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삼모사가 생겨난 유래에서는 다르다. 원숭이를 가르치거나 생리를 파악하려는 목적을 두고 실험한 결과라고 믿는다. 원숭이는 주인의 마음을 모르면서 우선 많이 먹고 보자는 말이니 원하는 단어는 조사모삼이 정답이며, 주는 주인의 마음은 가르친다는 조삼이 먼저이고 모사는 칭찬이라는 당근이었다. 주인의 당근책은 순수한 칭찬이 아니라 꼬임의 일종이었다. 실험 목적이 그렇다면 원조 사기다.
강점기 때에는 군림자가 우리 천진(天眞)한 삯꾼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회유와 어쩔 수 없다며 찬성하고 따르도록 유도하였다. 싫어도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내가 앞장서서 찬성한다면서 점수를 따고 보자는 유인책을 썼다. 이른바 세뇌작업이었다.
나는 반항했다고 힘차게 웅변을 해보아도 점차 오랜 습관에 젖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동요하고 만다. 온통 조사모삼이 차지한 현 실정이다. 누려온 호강을 내놓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안고 가는 길이 망국길이다.
국가적 원수를 언제까지 안아주어야 하는가! 알고도 반성하지 못하는 원수를 언제쯤 버려야 하는가! 풀뿌리 민초를 짓밟아놓고서 지금도 짓누르는 원수를 언제쯤 놓아 보내야 하는가!
그 끈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사람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대하고 있다. 그 사람을 구해놓고 보니 잃어버린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주장 일색이다. 아직도 그 달콤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바로 세뇌작전용 사탕발림도 우선 먹고 보자는 파렴치들! 공짜라면 일단 양잿물도 먹고 보자는 말도 있는데 아직까지 왜 먹지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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