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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의 계단

꿈꾸는 세상살이 2022. 1. 10. 14:27

용상의 계단

 

용상은 임금이 받는 밥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임금님은 매일 먹고 살 때 받는 밥상만이 아니라 업무를 펼쳐야 하는 책상(簀床)도 받아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 책상(冊床)도 받아야 한다. 그 와중에 국방을 지켜내야 하는 책상(柵床)도 받아야 한다. 물론 그 상을 받은 후 해결해야 하는 자리 즉 용상(龍床)에 앉아야 하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단하는 것이 용상에 오르는 조건부 용상(龍狀)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상 살펴보는 용상으로 가는 계단이 길고 높아서 내가 넘보기에도 아득하다. 구시대적 단어이지만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위계질서와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만 할 도리가 있다.

왕상은 예전부터 흠모의 대상이면서 희망의 대상, 바라는 대상, 탐나는 대상, 대대세세(代代世世) 소유하고 싶은 도구로 통하는 상감(上監) 자리이다. 말하자면 임금의 길은 이미 정해졌다는 성골(聖骨) 임금의 전유물인 듯 전해왔다.

 

내가 생각해온 용상은 조건부 상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충족시켜야 할 조건은 아주 쉽고 간단하고 평이하다. 모든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고 타당보편성 있는 조치를 내야 한다. 어진 임금도 이미 알고 있는 조건부였기에 암행어사를 만들어 냈다. 그저 들려오는 상소가 정말인지 조작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 필요이었고, 결단하기 전에 빨리 파악해내야만 하는 필요충분의 조건이었다. 물론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도록 약자의 호소를 들어보는 필요조건이다. 요즘으로는 충분한 소통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는 결단이 요구된다.

예전 왕상도 소통과 결단의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 있었으나 미흡하였다. 그래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문이 돌았다. 임금님 귀가 흉해서 긴 머리를 했다가 깊은 모자를 써서 숨겼다는 말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왕은 무조건 귀가 커서 민중의 의견을 잘 들어야 하는 성골의 태생을 버리고, 그저 쉽게 따 놓은 왕상의 길을 꼬집은 동화다.

여기서 임금님 귀는 코끼리 귀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면 어떨까. 당나귀 귀는 크기는 크지만, 용상의 귀로는 부족하다면 어떨까. 귀가 커서 흉측하고 느낀다면 그 임금은 용상 감이 못 된다. 비유의 전초판(前哨版) 동화다.

용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먹을 때도 쉴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뛰어다닌다. 게으름을 피우면 바로 떨어져서 머리가 깨져 죽는다. 부지런히 날개짓을 하면서 휘하 식솔을 다스릴 때도 바쁘다. 용은 사람이 그려낸 완벽한 왕의 상()이다. 처음부터 용이 생겨난 동물이 아니라 이무기가 개천에서 천 년을 도를 연마한 후 올라갈 때를 알아야만 가능한 동물이다. 천 년을 참고 견디면서, 포식하지 않고, 탐색하지 않으면서, 멀고 먼 길을 올라갈 심신을 단련해야만 했다.

그 전에 이무기가 되려면 천 년을 살아야만 하는 지렁이가 있다. 지렁이 생활을 천 년 동안 어떻게 살면서 견뎌냈을까. 지렁이가 처음부터 용을 생각하면서 2천 년을 생각해보았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럴 수는 없다. 지렁이는 이무기가 되고 싶은, 이무기는 용이 되고 싶은 단계적인 희망이 있고 바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용이 되려면 단계를 따라 인정을 받아야 올라간다는 결론이다. 그림에서 보았던 용상은 최소한 3계단, 조금 넘어도 5계단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상상의 계단도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가능한 꿈이다.

 

인왕산(仁王山)에 나타난 호랑이는 분명 호랑이가 맞다. 영웅호걸이라며 아무리 뛰어난 호랑이라도 사람을 다스릴 만한 호랑이는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호랑이 지배를 살아야 하나? 그럴 수도 없다. 호랑이 언어와 사람의 언어가 달라서 소통이 절대로 안 된다. 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호랑이가 사람을 지배하면 안 된다. 호랑이는 호랑이일 뿐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명제가 엄연하다.

호랑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배부르거나 쉬고 싶으면 그저 어슬렁저슬렁 걸어 다닌다. 걷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식솔을 다스리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호랑이는 없다는 말이다. 그저 단순하게 내 앞에 닥친 문제를 중시하며, 사냥한 먹이도 내가 먼저 먹는 것이 우선이고 연약한 새끼는 한참 뒤에 먹는다는 호랑이 세상의 법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도 새삼 떠오른다. 사람이 벌거벗으면 웃음거리가 되는데 임금님이 벗어버렸다면 얼마나 체통이 없을 것인가. 옷이 없어서? 피부가 두꺼운 말 엉덩이처럼 두꺼워서? 솜털이 호랑이 털처럼 길고 많아서? 쇠진하다 옷이 무거워져서? 임금이 백성에게 민낯을 보였다면 얼마나 창피해졌을까. 그래도 숨기면 안 된다는 비유의 결정판(決定版) 동화다.

예나 저나, 임금은 민낯을 백성에게 미리 보여줘야만 한다. 임금 귀는 얼마나 큰지, 임금 입은 얼마나 작은지, 임금 눈은 얼마나 큰지, 임금 가슴은 얼마나 넓은지, 임금 품은 얼마나 따뜻한지, 임금 마음 씀씀이는 얼마나 신중한지, 임금은 발을 뻗을 자리와 꿇을 자리를 아는지, 임금은 무엇을 먹고 무슨 똥을 쌌는지 모든 민낯을 샅샅이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고 숨기면 안 된다. 임금 휘하의 일개 백성이라고 해도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만일, 만약에 말이지만 임금이 부족해서 다스릴 부분에 미흡하다면 적시에 보필해야 한다. 이때 등장하는 섭정(攝政)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임금을 대리하지 못하고 일파에 휩싸인 섭정으로 처리하면 파멸의 지름길을 만들고 만다. 백성보다 개인 이해관계를 따져서 많이 빼앗아 먹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호랑이해가 좋다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항상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랑이와 용의 다른 점은 인정하지만 태생부터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현실에서 힘을 가진 자와 꿈속에 그리던 상상의 희망봉 차이, 힘을 부리는 약육강식(弱肉强食) 대명사와 약자를 대변하는 홍길동의 율도국 차이다. 물론 용상과 왕상이라는 단어에 매달리지 말고 그에 안아야 할 의미를 품어야 한다. 용상만 있어도 안 되고 왕상만 있어도 안 된다. 그에 대응할 백성이 있어야 하고 응대해줄 백성이 있어야 한다.

 

옷을 온통 발가벗고 당나귀 귀를 힘껏 돋워 세우고 듣는 임금만이 바로 선 어진 임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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