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3일
나는 새해가 되면 작지만 그래도 마음먹을 결심은 있었다. 물론 세상의 나 혼자의 결심만은 아닌 진리이다. 그래서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이유는 많은 사람이 따라 했었기 때문에 굳어진 단어가 생겨난 이유이다. 쉽게 해석하면 어떤 결심을 하면 3일에 멈춘다는 말인듯하다.
올해의 작심은 몸을 관리해야 겠다는 혼자만의 약속이다. 만약 달성하지 못했다면 누가 욕 할까봐, 누가 핀잔 할까봐, 가족이 알아내면 체신이 서지 못할까봐, 자신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들까봐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약속을 세웠다.
예전에는 주로 걷기를 했었다. 오전에 산책하기 1시간, 그러다가 오후에 기분 내키면 또 산책하기 30분, 그것도 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지금은 ‘자전거 타기’가 생겼다. 야외에서 타는 운송용 자전거가 아니라, 스피드 운동용 자전거가 아니라, 매니어가 선호하는 산악용 자전거가 아니라 그저 방 안에서 타는 자전가 타기를 선택했다. 자녀가 장만해준 자전거였으나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올해에 들어 새로운 결심이 생겨났다.
‘하루에 30분씩은 자전거를 타자’ 누가 따져보아도 작은 결심이고 누가 확인하지 않아도 지키든지 말든 상관없을 정도의 소소한 결심이었다. 그러나 나 생각으로는 크고 중대한 결심에 속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몸 구석구석에 생겨난 질병과 신체적 부조화를 극복하지 못해서 연약한 몸으로 처지고 말았다. 누구든지 걷기에 충실하다면 충분히 극복해낼 것이라고 믿었으며, 걷기가 운동의 시초이면서 결정판으로도 통한다. 그런 진리에 부응하여 걷기를 했으며, 욕심을 빌려와서 자전거 타기를 보탰다.
만약 내가 야무지다면 만사오케이 되겠지만, 나는 그리 영약하지는 못한다. 나약하고 뒷감당을 하지 못한다. 그저 되면 되겠지 하면서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다. 그런 위인이 무슨 각오를 믿고 자전거 타기를 목표로 삼았을까. 무슨 배짱으로 선전포고를 공포하였을까. 어떤 뒷배를 가지고 있었을까. 분명 있기는 있다. 내가 자신 있다고 믿은 것은 바로 한 달 정도로 타왔던 자전거가 친구 되자고 불러냈던 점이다. 자전거도 나를 지켜보다가 ‘됐다. 그 정도 되면 너를 믿어도 좋겠다’ 느꼈을 것이다. 대신 나도 ‘이제 자전거를 타도 되겠다’ 내심 자신감이 붙은 듯싶다.
새해가 되기 전초전으로 한 달 정도로 연습해온 자전거 타기가 제법 친숙해졌다. 힘이 부쩍 늘었다기보다 타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본 결과를 얻었다. 하루 24시간 속에 30분을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 고되다는 것, 쳇바퀴를 돌아가는 다람쥐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 것, 야외에서 타는 것은 다리가 아프더라도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반겨주면 얼마나 즐겁지 않겠는가. 설령 무리한 거리를 갔더라도 다시 돌아와야 할 거리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고행길이다. 밖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될 의무를 동반하지만, 집에서는 힘들면 바로 쉬어도 좋고 바로 멈춰도 좋고 그저 사소한 환경을 탓하며 그만해도 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5분되면서부터 갈등이 올라온다. 10분이 되면 짜증이 나기도 한다. 15분을 넘어가면 살살 멈춰도 될까 하는 반항이 고개를 내민다. 이제껏 했는데 아직도 15분을 어떻게 감당할까 의구심도 든다. 20분이 되면 등짝에 삐실삐실 땀이 솟는다. 25분이 되고 보면 내 한계인가 하는 감정도 있다. 30분이 되면 ‘아, 이제 해냈다’ 기쁨이 번진다. 끝났다 생각하고 내리면 다리가 후들후들 주저앉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전거 타기 30분 완성 후 증거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나는 ‘자전거 타기. 1일 30분’ 운동일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새해 작심 기념으로 운동일지를 그려 만들었다. 이제 조금은 더 신중해야 되고 조금은 더 친숙해져야 된다는 각오도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단어 중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나와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불러냈다. 정초 휴일을 지나 첫날에 세운 목표이다. 벌써 1일과 2일에는 이미 달성한 판이라서 자신도 있었다. 3일 월요일 아침, 컴에서 한글을 불러냈다. 대체로 이런 일지는 엑셀이 편리하지만 그래도 한글을 더욱 활용해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이도 첫 번째 일지 쓰기부터 실수가 닥쳤다. 좋은 일에 항상 찾아오는 것이 호사다마(好事多魔), 정말 방해꾼은 없는가?
1월 3일, 월요일 아침 자전거 타기 30분을 완성하고 오후에는 걷기 1시간을 마쳤다. 그 시각은 15시 30분. 그때 호출이 들어왔다. 바로 나오라는 전갈이었다. 보통 ‘그래 알았어. 몇 시에 만날까’ 하고 물어도 대만족이다. 그러나 이 호출은 선뜻 대답하기도 어렵다. 대충 4시간 30분 쯤, 차도 2시간 마다 20분은 휴식을 주어야 하는데 가다가 밥을 먹어야 한다면 최소 5시간을 달려가도 힘들 정도로 먼 길이다.
이 시각에 긴급 호출을 내렸다면 얼마나 다급했을까. 그러니 분명 반항하거나 거절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래 알았다’ 한 마디로 끝냈다. 마치 군에서 ‘5분 대기조’를 불러낸 느낌이다. 만약 군장을 싸놓지 못했으면 미안하다고 변명해도 소용없다. 군장을 세탁하려고 불가피하게 풀어놓았다면 이미 버스 지난 뒤에 손을 들고 만다. 그 와중에서도 짐을 꾸려야 하고 없는 것도 챙겨야 하는데 그저 ‘알았다’ ‘알았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때 새해 목표 계획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작심3일이 왜 생겼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사람의 일은 3치 앞도 모른단다. 자기 자신의 속에 있는 마음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모르지만 3치 앞을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작심 후 3일 째에 결심이 흔들렸다. 나와 내가 한 약속이지만 번연(蕃衍)히 어겼다. 자녀가 선물한 자전거인데 무슨 뒷배로 거역하는지, 자녀가 나를 약속 잘 지킨다고 믿어왔는데 실망을 주어도 되는지, 나는 나 자신의 약속은 지켜내자고 믿고 싶었는데 양심을 버리다니!
그러나 작심삼일이라는 단어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순리인 듯하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그 순간 최대의 최선을 따라 지키면 된다는 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만들어내기보다 없으면 없는 데로 있으면 있는 데로 지키면 된다는 해석이다.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지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더 열심을 내면 된다는 판결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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