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 후 벌어진 일
새해가 되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것이 상례다. 이것은 나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을 고치거나 새로 시작하는 규칙을 지키기로 다짐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본다. 나에게도 새해에 작심이 있었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서 후회하고 반성하다가 내 마음에 자책이 일어났다.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새 각오를 느껴 계획을 세우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을 새해 목표로 잡으면 되겠지 하는 희망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새해 각오도 거창하거나 어려운 목표도 아니었고 나 혼자만의 소소한 약속이었다. 작년까지도 게으르고 나약한 자신을 남이 알지 못하도록 빨리 다그쳐, 작년부터 건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자고 조용한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방안에서 자전거 타기 30분씩, 방안에서 팔굽혀펴기 20개씩, 야외에서 산책 걷기는 조금씩이라도 덤을 보태서 작정한 나와의 약속이다. 새해 건강 목표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려면 그래도 어렵기는 어려울 것이라서 떠벌리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정해놓았던 것이었다.
이 새해 목표 중 하나는 시작했으나 3일이 지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첫날 1일이 토요일이었고 3일이 바로 본격적으로 맞이해야 할 월요일이었는데 복병을 뒷배 삼아 덮쳤다. 물론 새해 첫날 전부터 실천 시작용으로 돌입해왔으니 분명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벅차올랐으나, 3일 오후 3시에 굴러온 돌멩이가 뚝 솟았다.
서둘러 채비를 꾸려 떠났다. 정확하게 오후 5시에 출발하였으나 10시에 도착하고 말았다. 야간 운전에 돌입했으니 분명히 마음은 급해졌지만 최대한 규정 속도를 지켜냈다. 어차피 늦었으니 마음이라도 느긋해 보려고 다잡았다. 다음날은 하루를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엄마 아빠를 외출 보내고 쌍둥이를 보는 날이었다. 늙은이가 애를 보는 것도 새롭다. 늘상 하는 일이 아니라서 하는 행동마다 힘들다. 다른 다음날 또 다른 다음날 운전은 불가피해졌다. 생소한 지리에 장거리 운전은 출발부터 돌아올 때까지 긴장에 긴장이 겹쳤음이 분명하다. 최소 2시간부터 5시간 운전으로 강행하였다. 다시 채비를 꾸려 돌아오는 귀향길도 5시간 운전 여정에 들었다.
내 새해 목표에 봉착한 문제라는 명제는 이러한 단어가 아니었다. 분명히 운동을 해보자고 다짐하였으나 운동하기도 방해하는 요통이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밤을 잘 잤다고 생각했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허리가 시비를 걸어왔다. 이것이 바로 작심 후 3일에 벌어진 일과 단순히 삼 일째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거창하게 시작하다가 흐지부지 뱀꼬리처럼 슬쩍 끝내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작심 후 삼 일에 벌어진 일과, 그 삼 일 후에 벌어진 일을 뭉뚱그려 묶었다. 참기 어려운 요통이라도 이를 악물고 할 수 있는 동안은 운동을 이어보자는 오기였다. 전에 느꼈던 오십견처럼 고통스러웠는데, 비슷한 통증을 경험해보았으니 그냥 버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큰 낭패가 올 수도 있겠으나, 할 수 있는 동안이라는 한계를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밖에 없다. 반대로 의사는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거기에서 발생한 요인을 제거한다는 방법밖에 없다는 정론인가 싶다.
나는 요통에 거스리지 않고 슬슬 다독이면서 몸을 추스렸다. 처음 마음먹은 것처럼 소소한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요통은 ‘이것 봐라?’, ‘아니 나를 무시하다니!’, ‘너 어디 혼나봐라!’ 하는 도전장을 대놓은 듯하다. 마치 ‘1인시위’는 언제 어디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1요통시위에 돌입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 허리 아픈 것도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나?’, ‘요통? 너 당장 물러가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하는 생각으로 버티기로 정했다. 그러기를 3일이 지나니 정말 요통이 자신감을 잃은 듯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살만하다는 몸을 알아챘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만 알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진리를 실감했다.
나를 위한 주치의의 처방 중 ‘절대로 그런 것은 안 된다’, ‘그러다가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등 여러 문구를 듣는다. 가끔 듣기도 한다. 종종 아는 사람이 들은 문구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의사와 내가 내린 처방에 대한 차이가 있고 대안의 다른 점이 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사람의 목표가 다르고 보편적인 의사의 목표가 다르다. 따라서 내가 내린 처방과 주치의가 내린 처방에 대한 협의와 합의에 따라 결정을 내리면 최선의 방책이요 최대 효과이다.
나는 몸에 대한 의학적인 전문가도 아니며 마음에 대한 의학적인 전문가도 아니다. 그저 가까이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다. 물론 그에 내가 내린 적합한 처방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린 처방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으로 내리는 처방도 아니다. 그저 요통을 추스르다가 다독이다가 타협하다가 으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최후의 극약 처방법으로 ‘요통? 네놈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얼마나 버티는지 네가 뭘 알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요통이 버티지 못하다가 포기하고 떠날 수도 있겠다.
나는 소소한 작심삼일 후 처방에 더했다. 아플수록 더, 꾸준히 더, 운동 강도를 2단계나 올렸다. 내일은 3단계로 정할 예정이다. 오래부터 해 온 사람들은 이 정도는 그냥 풋내기라는 알겠지만 나는 운동 초보다. 세상에 초보 없이 전문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없다.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운 것처럼, 밥을 떠먹는 것도 처음부터 배워 나온 전문가도 없다. 그저 오로지 풋내기투성이다. 나는 운동 풋내기라서 위안이 든다. 그렇지만 바로 과격하게 덤비거나 협박하지는 않겠다. 아플 때마다 타협하자고 어설픈 협상안을 내놓기도 않겠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편해지면 상대를 살펴보고, 몸이 편해지면 게으르기 전에 상대를 돌아보고, 무조건 굽실굽실하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당기는 협상이 바로 상생안 인듯하다.
내가 허리 아플 때도 요통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요통의 눈치를 살피면서 운동을 했다. 어떤 때는 밀고 어떤 때는 당기는 운동이었다. 요통이 마음 놓고 발 뻗었다가 갑자기 덤비는 운동을 예측불가로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른바 명현(冥顯)반응이라고 믿고 싶다. 이 순간에도 버틸만하다는 생각이 난다.
글을 쓰는 것도 운동에 버금가는 힘든 작업이다. 한 장 쓰려면 벌써 1주일 전부터 소재를 찾고 주제를 정하는 중노동이며, 수정과 교정 그리고 첨삭을 거쳐 퇴고까지 해야 하므로 하루 이틀 끝날 일이 아니라 일상이 예상되는 상노동이다. 이 글은 오전 3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쉬지 않고 썼다. 새벽 3시가 아니라 내 시계에는 아침 3시가 분명하다. 나는 걸작을 못 냈지만 다작은 틀림없다. 그래서 줄기차게 써도 3시간 이상 걸린다는 문필력 인증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불 위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은 가장 나쁜 자세다. 10분 혹은 15분 읽으면 그럴만하겠지만 1시간 이상 독서한다면 안될 일이다. 정좌하고 독서대 없이 읽었다면 이미 선을 넘어섰다고 본다.
내가 느낀 허리 아픈 요인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 다분하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몸의 반응은 가까운 내 안에서 발현(發現)되었다. 이때다 틈을 타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명현반응을 아는 요통이라면 내가 허술하게 행동했다는 위기를 빌미 삼아 경고를 냈을 것이다. 의사가 보편적인 처방을 내리기 전에, 반성할 기회를 한 번 주는 요통의 처방인가 느꼈다.
작심삼일 후에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고 다시 새로운 작심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한 해 동안 또 작심한다면 계획을 이룰 것이다. 미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다시 작심해도 늦지 않았다는 말이다. 작심 후 삼일이 지나면 반드시 다른 위기가 닥친다. 그 위기를 극복할 처방은 바로 나 밖에 없는 처방문이다. 누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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