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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이 된 전기 충격파

꿈꾸는 세상살이 2022. 7. 17. 17:36

만성이 된 전기 충격파

 

2020년 작년은 지루한 장마가 지났으나, 기록적인 집중호우와 일상 기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진탕 홍수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련도 지나갔다. 설상가상, 코로나 19와 함께 이중적인 난리가 겹쳐왔으나 국민의 애국심과 십시일반의 이타성에 힘입어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경자년이 지났고 이제 희망찬 신축년이 되었다.

 

우연히 모집 공고를 접하고 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를 방문하였다. 신축년이니 새로운 마음의 건축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내 집을 직접 지어보자는 꿈을 꾸고 산다. 요즘 대세가 아파트라서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올해가 신축년이니 얼마나 경사스럽지 않겠는가!

사실은 신중년과정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정말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여겼던 옥내 배선과 태양광을 접목해보고 싶다는 과정이었다. 나는 호기심 반 배워보자는 욕심 반으로 채워졌다.

신중년특화과정의 모집 요강에는 40~60으로 적시되어 있었다. 굳이 해석하면 69세 이하에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접수하면서 나는 65세이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뜻을 이루었다는 결과를 내겠다.’라고 호언하였다. 풀이 해보면 전기 관련 종목 시험에 합격한 후 폴리텍에서 성공적인 사례를 남기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접수자가 많아서 나는 당연히 합격권을 넘어 권외에서 관망하는 신세였다. 젊은이에게 기회를 더 주면서 후원하여 구만 리 창창한 길을 열어 주겠다는 국가의 백년지대계라는 차원인가 싶다. 결과는 보나 마나 따지나 마나 분명하다. 응시원서 접수 기한은 우선 24일이었고, 서류 심사 후 8일에는 수학능력 여부를 판단하고 지원 동기와 취업 의지를 따져 최종 적부를 210일 결정하겠다는 내용도 보았다. 명색이 국립 대학이라서 절차와 서류 및 신상 면접 등으로 나름 할 것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격이라는 기쁨에 따라 215일까지 등록을 해야 되는데, 아직도 미등록자를 가려내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기다렸으나 결국 32일 입학하라는 통지서를 받지 못했고, 혹여 입학하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 38일 추가 합격의 기회를 준다는 대기자 명단에 들어 서성거리고 말았다. 그것도 5순위라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지, 한동안 기회는 나를 기다릴 법이 없다. 행운도 나를 찾아오는 행운은 없다. 오로지 내가 찾아 나서야 멀든 가깝든 내가 바라는 무지개를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신중년 기회를 알고 보니 전기에 관한 슬픈 이야기가 설핏 떠올랐다. 벌써 오랜 전의 일이지만, 전기 공사에 얽힌 사연이었으니 새삼떠오를 수밖에 없다. 직장인으로서 회사의 장비 증설로 인하여 전력을 증강할 때가 되었다. 그것도 단체 휴가를 가는 틈을 타서 전기 공사를 하게 되었다. 업자를 불러 견적을 받았다. 규모도 작고 짧게 잡았으니 빨리 진행해야만 했다. 금액을 따져보니 인건비가 100만원, 재료비가 150만원, 관리비와 이윤을 50만원을 감안하면 총액 300만원으로 적정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계 휴가를 떠나기 전에 보고하였으며, 승낙을 받은 후 업자에게는 차질이 없도록 끝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하계 휴가가 끝나자 돌아온 상급자가 호출하였다. 가보니 왜 이렇게 비싼 공사비를 줘도 되냐고 반문하였다. 아니 그럴 수가! 벌써 보고 한 것인데 이제 와서 뒷북을 치고 있는지 말문이 막힌다. 그것도 금액이 큰 것도 아니고, 우리 하기 휴가 기간 중에 뻘뻘 흘리면서 일해준 업자에게 그 정도는 해야 합당하지 않느냐는 내 주장이었다.

그래도 너무 과하다고 하면서 200만 원만 주겠다고 한단다. 그럼 이미 공사가 끝났는데 100만 원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약속한 업자이니 회사가 먼저 불러서 견적을 냈고, 회사가 믿고 허락했으니 회사의 체면과 이미지는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우선 내가 사비를 지불하였다. 발주의 명예가 떨어지면 어찌 될까, 그렇지 말아야지. 내가 모든 것을 업고 갔다.

그러나 참아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상급자에게 가서 따졌다. 이미 보고한 것인데 무슨 이유이며, 뒷북을 치면서 생색을 내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회사 직원 중에 전기전문가가 있어서 물어보았단다. 내가 그 전문가를 찾아가서 따졌다. 무슨 근거로 그 가격이 너무 높아서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200만 원만 주라고 보고 하였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답은 간단하고 명료하였다. 재료비는 인정하고 관리비와 이윤은 그렇다 치고, 인건비는 뺐단다. 이유를 다시 물어보니 회사 직원들이 공사를 한다면 무조건 인건비를 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답이다. 직원들이 하기 휴가 동안에 출근하여 공사를 한다면 무료봉사라는 어거지다. 그럼 자기는 돈을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업무 중에 벌어지는 일과 업체 공사도 구분하지 못하다니! 회사 직원들은 임금 자체도 전기공사 직원들보다 높고, 유상휴무에다가 휴가비는 휴가비대로 줘야 하는데 말이다. 그때 공사 감독한 나는 하기 휴가를 가지 못하고 지켜봤는데 사무직이라서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것이 합당한 주장이며 공정한 처사인가. 겹쳐 올라오니 한심한 처사였음이 확실하다.

 

그때 지불한 금액은 어음이어서 적은데도 바로 현금으로 바꿔줄 수는 없었다. 공사업체는 적은 금액을 할인할 수도 없다면 하소연하고 찾아왔다. 그래서 그것도 내가 해결해 주겠다면서 어음 할인율만 떼고 현금으로 대납하였다. 그 할인율이 소문나서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업체를 대상으로 돈놀이한다는 소문이 들어왔고, 회장이 직접 진상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순간 뒷퉁수를 맞은 듯하지만, 오히려 살아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회장은 마침 잘됐다고 건수를 올릴 기회를 잡았으나 결국은 대리 해명을 증언 서준 셈이었다. 그래도 회장 역시 나에게 보상은 없었다. 보상은 물론 최소한 정당한 금액은 줘야 되지 않느냐는 내 주장이다. 어처구니 없는 상급자와 회장 그리고 회사는 지금도 떵떵 누리고 있다. 이것이 어린이 코 묻은 돈을 빼앗아가는 욕심쟁이요 칼을 보여주면서 알아서 내라는 것과 같다. 정말 칼 없이 코를 베어간 사람이 있다니 살기 힘든 곳이었나보다.

시간을 지나보니 성형수술이 없어도 코는 복원되었으나, 마음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콧등은 화장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면 덮어질 수 있지만, 옷을 껴입어도 두꺼운 옷을 입어도 속마음은 지울 수 없다. 남에게는 콧등에 감기 걸린 것을 무슨 대수냐고 여길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가르쳐줘야 한다는 말이다.

정말 전기 관련 신중년과정은, 정말 안타까운 과정이었다.

 

나는 한국폴리텍대학 익산캠퍼스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돌리다가, 가깝고도 가까운 지척의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를 발견하였다. 내가 알았던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는 인근 동 지역에 있었던 학원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같은 동 지역에 나타났다니 어떻게 된 연유였을까?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눈 수술 일정이 잡혀있는 나 입장에서는 분명 착각이었을 것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보아도 동아기술전문학교라는 단어가 맞았다. 그러면 좋은 현상일까 나쁜 징조였을까.

나에게는 다른 기회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폴리텍대학보다는 동아기술학교가 가까워서 좋고, 수강 기간도 폴리텍대학의 4개월은 동아 7개월에 비유되지 못한다. 세세하고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매력으로 포장하여 유혹해왔다. 간혹 처음에 실패하더라도 남은 기간 동안을 십분 활용하여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는 희망도 기대하고 남는다.

 

동아기술학교를 방문하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 도전이요 떠나기 전에 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무작정 방문하였으나 이런저런 질문을 늘어놓아도 기술학교 입장에서는 상세한 모집 요강을 설명하였다. 나는 그런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냥 돌아설 정도라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기기를 다루지도 못하니 그저 도와달라는 요청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워크넷이라는 둥 큐넷이라는 둥 새로운 단어가 왜 지금 나타났을까? 외계어처럼 느끼다보니 생소하였고, 폴리텍대학의 신중년특화과정이라는 단어도 역시 나를 위해 만든 단어인가 싶었다. 접수 담당자는 수강생을 확보하기 위하여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워크넷과 큐넷에도 가입하면서 수강신청을 마쳤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니 제동이 걸렸다. 폴리텍대학의 신중년특화과정에 신청한 것이 빌미로 다가왔다. 모집은 이미 지난 일이고 합격자 발표도 끝났으며, 조촐하지만 입학식도 마쳤는데 또 무슨 일이 남았다는 말인가. 필시 폴리텍에서도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대기합격자 명단을 안고 있었다는 결과가 분명해졌다.

동아기술학교의 조언을 듣고 풀이해 보면 폴리텍에서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구애도 없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남이어야 한단다. 1시간 뒤 갑작스런 전화가 울렸다. 고용지원센터에서는 2중 신청자에 해당되므로 동아기술학교에 지원이 불가하다는 통보였다. 그럼에도 한 가지 조언으로는 반드시 택일하여 결정한 후 연락을 해달라는 전화였다. 개인 입장에서는 황당한 규칙이었고, 무리한 규정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나는 무진 진정하면서 폴리텍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폴리텍대학의 입장에서는 왜 벗어나고 싶은 것이냐고 물어왔으나, 나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누누이 부탁하였다. 내가 직접 방문하여 신중년특화과정에 원서를 제출했을 때 담당자와의 목소리가 다르기는 했지만, 그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지금 당장 처리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전달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그래도 말미에는 오늘 중으로 합격자 대기 명단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시한까지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했느냐고,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어보는 고용지원담당자였다. 그런 전화 취지는 아직도 미결이라서 2중 신청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내가 항의성 전화도 없었는데 앞장서서 솔선지휘를 실천하는 공무원이었고, 민원이 생기기 전에 미리 차단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즉각 폴리텍대학을 방문하였다. 왜 이렇게 느리냐고, 왜 이렇게 헤매느냐고, 나를 좋아하느냐고, 내가 필요하느냐고 따지고 싶어서 갔을 것이다.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나와 함께 약속한 말을 왜 어겼느냐고 따지고 싶어서 갔다. 어렵고 힘든 민원도 아닌데 국립대학이 왜 이런 행동을 해도 되느냐고 화를 내고 싶어서 찾아갔다.

이번에는 내가 민원성 전화를 걸었으니, 답변했어야 할 담당자 대신 어제 받아 준 사람이 부재중이었다. 공무원이 숨바꼭질하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따질 상대인 정식 해당 담당자는 이런 항의성 자체가 처음 듣는 말이어서 처리하지 못했다고 머뭇거렸다. 물론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면피를 업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그래봤자 아무리 항의하고 피 터지게 싸워본들 정해진 답은 확실하다. 미안하다면 끝나고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죄송하다고 하면 그만일 것이다. 폴리텍대학이 강자이요 내가 약자이니까.

어렵고 힘들게 해결한, 간단한 민원이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내가 고용지원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전화번호를 기억해놓았는지 바로 말귀가 통했다. 알았다고, 내부 통신망에 이미 해결된 것으로 수정되었으니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들러리 된 셈이다. 정말 내가 들러리여도 좋다.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해결되었다면 겉저리가 되어도 좋고 할아버지가 총각김치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이다.

나는 애초에 지원한 동기가 나도 할 수 있다.’는 포부를 안고 덤볐지만 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결과였을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중년특화과정에서 나 같은 나이에 입학과 수료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자격증 하나라도 취득한 사람이라는 표본을 만들자고 덤빈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입학과 자격증 취득까지 넘보았다가 보기 좋게 나가떨어진 패배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미리 내가 받을 상처를 어우르고 예단했던 선견지명으로 위로했을 수도 있겠다.

 

새옹지마를 잠깐 잊었을까! 기쁜 마음에 들떠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를 다시 찾아갔다. 많고 많은 인적사항과 국가에서 요구하는 규제사항을 망라하여 기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교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아무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추진하는 것을 달성한다는 것은 이미 반성공이라고 익히 들어왔다. 반갑다, 고맙다를 연신 거듭하면서 일단락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317일 목요일.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에 입교를 하게 되었다. 간단한 입학식은 아침 9시라서 이전에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하긴 입학식이 아니라 입학에 가름하는 간단한 소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입학은 절차대로 입학이다.

나는 가까운 동아기술학원에 시간을 맞춰 출발하였다. 걸어서도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첫날, 벌어진 일은 내가 실수를 한 예라고 여겼다.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뿐이었다. 분명히 책상과 의자는 있지만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인다. 둘러보아도 어안이 벙벙하여 빈 자리가 없었다. 순간 얼음으로 변했다가 잠시 후 살펴보니 보이는 것은 모두 빈자리로 변해있었다. 바로 코앞에서부터 먼 저쪽 끝까지 4개의 여유가 들어왔다. 마지막 입장하는 지각생 아닌 지각생다운 사람이 바로 나였나 보다.

 

이미 자리 잡은 수강생들은 모두 초면이라서 궁시렁궁시렁거리지 않았으며, 혼잣말이나 옆사람에게도 아무런 귓속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한 교실에서 들리는 낯익은 기계음이 있었다. 컴퓨터를 이리저리 서핑하는 소리가 고요를 깨고 적막을 흔들었다. 진정하고 살펴보니 내가 앉은 자리에는 아예 컴퓨터가 없었다. 일어서서 눈치를 보면서 둘러보니 반대쪽 자리에는 컴퓨터가 남아있었다. 다행이다, 됐다 싶어서 과감히 자리를 이동하였다. 아무리 늦게 왔다 치더라도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물론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며, 무료한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도 컴퓨터를 다룰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면서 버튼을 누르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이럴까? 진짜 내가 컴퓨터를 켜지도 못하는 컴맹인가? 당황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다시 한 번 둘러보니 중간의 빈자리가 보였다. 무색하지만 또 자리를 찾아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란히 앉은 짝꿍이 하는 말, ‘여기도 선이 없어요.’ 본체 몸통과 모니터가 있을 뿐 기기를 연결해주는 코드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늦게 온 내가 앉을 자리는 이런 저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을 자리가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 폴리텍대학 신중년특화과정에서 거부당한 것과 비교하면 과분할 정도로 넘치고 남는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뒤, ‘컴퓨터에 이상이 있어요!’라며 건의하면 되겠지! 끝까지 수리해주지 않는다면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오면 안 될까? 데스크탑은 없어도 노트북은 2개를 가지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없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저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반복하였다.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는 첫날부터 고된 시련으로 시작되었다. 9시에 시작하여 오전 수업시간은 1250분에 끝난다. 오후는 1340분에 시작된다. 내 생각으로는 40년 가까운 세월을 8시에 시작하는 습관이 있어서 빨리 시작하면 좋겠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아무리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는 것이 빠듯했다. 시내라서 오고 가는데 신호등에 걸리면 마음도 바쁘기 마련이다 오후 시작 시간에 대려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도착 후 숨 돌릴 여유는 없었다. 1340분 정각에 학교의 정문 현관을 통과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강의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교사는 출석을 부르는 사이에 내가 도착하지 못하자, 나를 찾아 나서면서 나머지 수강생들에게 경고성 멘트를 날렸을 것이다. 이렇게 늦으면 안 된다, 바로 지각으로 처리할 것이다, 늦을 것 같으면 미리 늦을 것이라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단호한 규칙을 일렀을 것이다.

나도 할 만큼 했지만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도시락을 싸서 학교로 갔다. 65세를 넘어 이제 국가에서 인정하는 노인인데, 도시락을 껴안고 공부하다니 설핏 처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승강기가 없는 구형 건물에다가 층고가 높아서 4층을 오르내리기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무리수다.

아파트는 층고가 낮아서 그보다 2배나 되는 8층 이상도 단번에 걸어 올라가는 입장이지만 사무실 혹 업장의 4층은 무척 힘들다. 게다가 일찍 일어나서 아침 6시에 밥을 먹었는데, 점심을 1250분 이후에 먹는다는 것은 배고프다는 감정이 오르면 허기를 느낀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젊은 일반인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병원에서 인정하는 심신미약자 축에 든다. 동료들도 누구든 알 수밖에 없었고, 적은 숫자이지만 행정실에 소문이 돌아나서 교사들도 다 알게 되었다. 나는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에서 벌써 유명세를 타면서 출발하고 있었다.

 

입교 후 첫날을 그렇다 치더라도 둘째 날부터는 줄기찬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마치 군에 입대한 것처럼, 군 입대 환영식을 뒤로하면 부모님이 안 보이는 순간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긴 천당과 지옥이 공존하는 세상은 없다. 마치 냉탕과 온탕을 두었으니 본인이 선택하면서 오고 가도 탓할 사람이 없어 자기 책임만 있을 뿐이다.

직업전문학교에 온 이상 목적을 달성해야 되지 않을까? 직업을 구하든지, 놀면서 오고 가든지, 동종 업계에 있을 인맥이라든지, 뭐라도 건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다못해 국가에 지원하는 보조금을 목적으로 두었다고 한다면 왔다는 것 자체가 목적달성일 것이고.

나도 여러 동료들이 있는 시간에 목표를 밝혔다. 우선 내선공사용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킨 마음에 이미 취득한 소방설비기사 기계분야에 이어 전기분야를 추가로 취득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후자는 그저 희망 사항을 가진 청사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축년과 얼토당토하지 못한 무지개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전기기능사가 급하고, 당면목표 달성 후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봐야 된다는 수순에서 밀리고 있다.

 

317일 입교하였으나 하루 6시간씩 공부로 이어졌다. 그러나 교재는 받지 못해서 그저 귀로 듣기만 하게 되었다. 물론 올 때 공책과 필기구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필요한 책은 주지 않았다. 그럼 그렇겠지! 인원을 파악하고 입교자의 수강 의사를 헤아린 뒤 고가의 교재를 신청할 것이다.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에 받을 수 있겠지! 교재에 언급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만 바라보는 희망 사항이었다.

그러나 쉬이 수령하지 못했다. 책이 없다고 공책을 가지고도 공부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의 마음과 배우겠다는 열망을 가진 수강자의 불꽃 튀는 전쟁이 벌어졌다. 동상이몽이 아니라 오월동주라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교실의 분위기는 열강하시는 교사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새내기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아마도 냉랭한 경쟁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시대와 같이. 솔직히 첨언하면 강사도 수강자도 책으로 된 교재가 필요한데 먼저 나서지 못하는 피차간의 애로사항이 매우 컸다.

나는 가끔 분위기를 깨고 싶어서 질문을 하곤 했다. 비유하자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꼭 둘이냐고 물어보았다. 교사는 그저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요구하는 답은 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둘이라는 정답이었다. 그런 첨언을 듣고 싶었다. 전기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 역시 하나 뿐인 정답은 아니다. 언제는 갑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을이라고 하면 듣는 새내기는 헷갈린다. 그때 미리 알려준다면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질문하는 요인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처음 듣는 단어를 갑이냐 을이냐를 두고 어떻게 해석 해야 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실은 그 외에 일방적인 강의실을 주고받는, 말하고 듣는,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골수자에게는 내가 너무 튀었다거나, 내가 혼자 주도하고 싶었다거나,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교사를 골탕주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내가 하는 돌출 발언은 이때쯤 등장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면 일부러 만들어내는 질문이었다. 침울한 분위기보다는 명랑한 분위기, 냉랭한 기온을 온화한 기온으로 만드는 마중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교적 전기를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접촉하고 보니 지금은 전기에 대해서는 전무한 초보에도 비교되지 못한다. 학교 시절에는 이과에 속해 있었지만 기계를 배웠고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전기의 맛을 보았다고 섣부리 던진 말이었다는 것은 일견 이해는 갈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 전국에서 일정 자격을 가진 자 대상으로 기술장교 공개 모집을 거쳐 공병장교로 복무하였다. 공병의 임무 중 평시에는 건설과 토목공사 및 건축공사가 중요한 부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일부에 전기가 들어갔으나 장교는 그저 지시와 감독을 담당하기만 한다. 그런 탓에 수박 겉핥기로 전기맛을 보았다고 자부했다.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일반 건축과 전기공사를 포함하여 발주 및 직접 실행시에는 감독과 검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런 기간이 무려 25년 이상이라니 일반인도 보나 마나 건축과 전기에 관한한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도 충분하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감독 전에 직접 실무자 속에 들어가자 머뭇거리고 주춤하기만 했다. 말하자면 말과 실행,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경험이 있어야 다룰 수 있다는 정설이 부러워졌다.

 

진짜 모른다고 하더라도 교재 책을 받았으면 한 번이라도 넘겨보면서 눈 구경이라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재를 받을 수가 없으니 그저 눈만 부릅뜨고 쳐다 보았지만 강의는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공책에 판서하는 것도 힘들다. 생소한 단어와 무수한 공식을 이해하기 전에 그림 그리기 수준도 못 따라간다. 보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강의는 계속 진도를 나가는데 그림 그리기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 하면서 진도를 따라가는 것처럼 알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현실에 빠져든 것처럼 느꼈다. 한 발을 빼놓으면 다른 한 발이 빠져서 헤어오기가 어렵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알고 보니 순수한 전기맛을 예전에 보았던 사람이 여럿 되었다. 20명 중에서 예닐곱 명이 이미 맛본 식은 죽이라니! 천양지차를 실감하고 말았다. 유사한 한국전력공사와 한국통신의 관계라든지, 전기계통에서 근무한 사람이지만 이론을 배우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고, 이론은 이미 배웠지만 실무를 배워보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기회를 무한정 줄 수는 없다. 현업에 바빠서 참여할 수 없었고,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고 싶었으나 변경할 업종에 지식과 실무가 없어서 쉽게 덤빌 수는 없다. 그래서 한 발짝 쉬고 비우기 연습을 한 후에 온 사람도 있다. 이런 부류는 전기 맛을 본 사람에 들 것이다.

 

알고 보니 나는 쌩초였다. 초보자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교과서이다. 말하자면 해당 교재라고 본다.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에 입학 후 교재가 받은 것은 한참 지난 뒤였다. 첫날을 접하니 마음이 설레졌고 교재를 학수고대하였지만 하루 이틀 지날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외우지 못한 공식과 이해하지 못한 단어가 산더미처럼 누적되고 말았다. 확실하지 못하지만, 교재를 받은 날은 41일이 아니었다. 빨라도 4월 첫 주중에 받은 것 같다.

 

그런 상항에 전기기능사 필기시험은 접수 기간이 330일부터 42일까지로 되어있다. 시험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일괄 주관하므로 일목요연하게 작성하고 1년 동안의 계획을 일괄 발표한다.

나도 빠르게 시험을 치르고 싶어서 응시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막상 응시 절차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하였고, 동료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어서 아는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정보를 종합하여 결단을 내려서 접수한 것인데 절차가 복잡하고, 인터넷 시대의 접수는 미리 준비해놓고 시간이 되면 일제히 접수가 폭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굿을 보고 떡이나 먹자는 것처럼, 한발 늦은 지난 구문을 신문이라고 믿는 사람과 비슷하다. 내가 응시한 시험은 4회 중 2회 째 시험이었다.

 

동아기술측에서는 1년 계획 중 이미 지난 1회는 물론이며, 돌아오는 중에서 가장 빠른 기회인 2회 시험에서도 모두 응시하지 말라는 주문도 있었다. 3회 시험 기회에 모두 합격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부여하면서, 그 안에 철저히 준비한 강의 계획과 그에 맞게 따라주는 사람은 모두 합격일 것이 분명하다는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교재가 늦어진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는 서로 교통한 것인가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마다 사정이 있고, 일부는 불가피한 상황이 닥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는가 느껴졌다. 317일 입교하였으며, 42일까지 응시원서 접수 기한이라니 정말 촉박해졌다. 422일 필시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조건으로 실기 시험도 625일 치르겠다는 각오로 도전하였다.

일반적으로 시험에는 각오라는 것과 해당 사항은 전혀 상관이 없지만, 629일에 눈을 수술하기로 예약된 상태였었다. 만약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면 눈 수술로 인하여 흐름이 늦어질 것이고, 고삐를 늦추다가 도전하는 시험 일정이 불투명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느꼈다.

 

그보다 더 주요 요인은 가족 중에 대수술을 앞두고 긴장 속에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과 직계 가족의 일원으로서, 전부 매달려서 수술 당사자와 쌍둥이 갓난아이 수발에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그 일정은 무더운 여름을 지나서 그래도 견딜 수 있다는 계절이 적기이며, 빠르면 10월 늦어도 12월 정도가 그때라고 생각했었다. 이러니 나 개인 입장에서는 422일 필기와 625일 실기시험은 최적기였고, 오로지 그 기회 외에는 나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숙명처럼, 절대절명의 단 한번 뿐인 기회라고 믿어졌다.

 

말하자면 필기시험을 치르려면 반드시 인터넷으로 응시원서를 접수시켜야 한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예전에는 인터넷 접수와 인터넷 은행업무, 인터넷 구인 행정처리 등을 무난히 처리해왔었다. 그러다가 신병상 문제로 둔감해졌고, 인터넷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게 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뇌경색증으로 언어기능과 기억기능에 현격한 차이가 생겼다. 손과 발에 일어나는 증상은 그나마 약해서 다행이었으나, 뇌에는 심각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일을 대처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오로지 노력밖에 없다는 결론에 닿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 치더라도 결국은 매번 불가능을 극복하지는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해석하면 나의 이야기에 해당된다. 시험 원서 접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전적으로 타인에게 매달렸다. 너무 늦어져서 내가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시험 장소를 선택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남은 시간에, 그저 남은 장소로 선택하고 말았다.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2회 필기시험은 시험을 준비할 교재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접수를 해야만 했다. 말이 되는 시험인가. 내가 얻은 시험 장소와 시간은 선택이 아니라 남은 것을 그저 감사하다고 주는 대로 받았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시험을 보류하고, 3회 시험으로 넘기고 말 것이다.

317일 입학부터 424일까지, 시험을 보게 된 것만 해도 과분하였다. 생전 처음 접하는 전기 이론을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나는 시험 날을 잡고 나서도 교육 시간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군것질을 하거나 여기저기 모여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처럼 시간을 때우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집에 가면 시험 공부를 하기도 힘들다. 이런저런 말을 시키면 어느 정도는 대꾸를 해야 되니까, 그냥 막무가내로 넘길 수도 없다. 또한 공부하다가 남는 시간에 일을 하고, 간혹 공부하다가 남는 시간에 말을 하는 것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누구든지 초지일관, 필요 없는 걱정 근심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내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데다가 주말이 되면 봄날에 집에만 앉아있기도 그렇고, 비가 오기 전에 봄맞이 산행이 좋을 것이고, 혹시나 언제 미세먼지가 닥쳐올지도 모르니 좋은 기후가 되면 바로 운동 겸 등산이나 산책을 해야만 했었다.

사실 나와 가족은 산행을 좋아한다. 높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 그런대로 걸을 만하는 산이 좋았다. 바다도 좋지만 물속에 들어 가는 것 외에는 바다보다 산이 더 좋았다. 힘들면 쉬고 그늘로 들어가서 경치를 보는 것도 좋은 공부라고 믿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험공부를 했을까? 나는 휴일에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다녀온 행선지를 동료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2회째 시험을 보기로 한 동료들이 모이면 한결 같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어려울 것이라고, 시험을 치르기로 한 문제 중에 계산이 나오면 필요한 공학용 계산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능숙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얼렁뚱땅 계산기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될 상황이었다.

나는 공학용 계산기를 구입하기는 하였지만, 다루다보니 정작 적용하기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좋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습득할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도 다분하다. 이번 시험에 합격하면 이라는 화두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하거나 부럽다거나 혹은 로또라는 말도 나왔다.

나는 내가 합격하면 바로 떡을 돌리겠다고 공언하였다. 굿이나 보고 떡이라도 얻어먹으면 좋다는 말처럼, 내가 공짜로 얻은 결과가 좋게 나오면 그에 상응하여 보답하겠다는 뜻이었다.

 

시험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눈을 뜨면 꾸역꾸역 다가왔고, 당일에서도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분명히 떨어질 것이 확실해졌으니 시험장에 가겠다는 말도 없이, 나중에라도 시험을 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시험 날에 가족을 대동하여 갔지만, 나는 오늘 실습을 하려고 온 것이니 그 동안 혼자서 산책이라도 해보라고 권유했었다.

동아기술측에서도 예상 문제와 시험 출제 경향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고, 평가 고사도 없었다. 조언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기출문제를 복습하라는 말뿐이었다. 그것은 미리 시험을 치르지 말고, 충분히 익힌 다음에 도전하라는 방침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험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알아보자는 생각 삼아 치르게 되었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마음을 비웠다. ‘벌써 불합격이라는 전제하에 시험 방법과 시험에 대한 면역력을 얻어 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진짜 시험을 보니 컴퓨터에 의해 처리하고 제출하면 당장 당락을 결정하는 점수를 본인이 알 수 있었다. 이런 것도 나에게는 생소한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 과정에서도 감독관이 왔다갔다 하면서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물론 나에게 정답을 알려주거나 오답을 지적하여 고치라는 힌트를 주지는 않았다. 하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이 마치 외계인이 와서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는 후문이었다.

 

그러다가 합격이라는 문구가 뜨자, 시험이 처음입니까? 어디서 공부하고 왔습니까? 예상 문제를 얼마나 공부했습니까?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그래도 자랑스럽게 아닙니다. 처음입니다.’만 반복하며 대답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종료 5분을 남겨놓고 답을 수정한 것이 3문제나 되었다. 그때 수정한 것이 전부 정답이어서 겨우 턱걸이를 하면서 합격하였을까? 아니며 3문제를 정답에서 오답으로 수정한 결과 근근이 합격하고 넘었을까?

이제 더 풀어도 맞는 답을 찾아낼 방법도 없었고, 더 수정해도 점수를 올릴 수도 없다고 생각되자 조용히 완료한다, 제출한다는 문구를 클릭하였다. 이제 시위를 떠난 화살로 돌아온 것은 당락을 알리는 예상 점수가 떴다.

‘63.5.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드디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수험생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시험장에서 교실을 지키는 사람은 나와 감독관뿐이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나갔는지도 모르고 골돌히 풀고 있었다니! 감독관이 나를 가엽게 생각했을까? 애처롭게 여겼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말은 안 해도 이심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을까? 한 문제에 1점 혹은 1.5점에 해당되는 문제로 만들어졌다.

최종 5분 전, 그때 답을 수정한 문제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수정한 답안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나 기억력의 한계라고 여긴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에 돌아와서도 한 동안 변화가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한참 후에 자체 평가 고사를 치렀다. 말하자면 진짜 시험이라고 생각하면서 치러보자는 문제였으니 제법 난이도가 나오는 정식 시험과 유사하다고 믿는다. 예전에 나왔던 기출문제를 보고 추려내면서 예상 문제로 뽑아냈을 것이니, 평가 고사에서 합격권에 들면 안전하게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정식으로 계산한다면 평가 고사에서 합격권에 들으면 그냥 시험을 치르게 하고, 만약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고득점 훈수를 둘 것이다. 그런데 내가 평가 고사에서 얻은 점수는 30점이었다. 이럴 수가! 말하자면 이 상태로는 분명히 본 시험에서 불합격일 것이니 아예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포기를 종용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본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얼마나 지난 후일까! 진짜 만일에, 시험에 불합격하고서도 이런 시간에 더 공부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이제는 합격권에 들을 만한 점수로 올랐어야 맞을 것이다. 이미 허가 난 시험 성적이 아직도 평가 고사에서 밑바닥을 기다니...

그런데 나는 이토록 저조한 성적으로 시험에 어떻게 합격했을까? 이것은 교사들도 불가사의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으며, 본인 나는 당연한 불가사의라고 단정한다.

동료들은 아마도 나의 초단기 기억력만을 따진다면 영재에 버금간다고 믿을 정도였다.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는 초단기 기억력은 아마도 처음 접하는 갓난 아이가 엄마를 배우는 기억력과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눈 동료와 교사는 이미 나를 허가 난 환자로 알고 있었다. 뇌경색으로 고생하였고, 그 후유증은 손이 차갑게 변해져서 냉혈인간이 되었고, 기억력이 떨어졌으며 언어력도 떨어졌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같은 말은 두 번 이상 반드시 물어보고서야 대화가 되었으며, 어떤 단어가 생기면 갑자기 동문서답으로 되물어서 일반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지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기억력과 언어력은 일반인처럼의 정상은 아니었다. 물론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은 없다고 들을 만했다. 첫 마디를 트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간혹 첫 마디라도 천천히 음미하면 잠자던 기억을 깨우는 마중물을 붓는 격이었다. 이런 사람이 무슨 공식을 외워서 시험을 치르다니, 얼마나 가상스러울까! 그 많은 공식도 엄마, 아빠, 맘마를 배우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은 그 공식을 외우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출발부터 부족하기만 했고, 남는 것은 조급함과 불안뿐이었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등장하는 이론과 공식을 반드시 외워야 하기 때문에, 전기 이론을 처음 접하는 초보에게는 애처로워서 휴일에서는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을 하시기 바랍니다.’를 연발하였다. 나는 한 마디 위로에 힘입어, 휴일이면 반드시 돌아올 기회가 없을 듯한 때라고 믿었고, 가벼운 등산과 해안으로 쫓아다녔다. 그 이유는 물론 내가 시험에 불합격일 것이 분명하니 가족이 등산하자고 하면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 그런 몸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겠다면 가족 구성원 전부가 극구 반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언반구도 없이 외줄을 타면서 속을 얼마나 졸였을까? 그래서 나는 앞장서서 재촉하고 또 다른 목적지를 찾아내는 새로운 문제를 떠안았다.

 

필기시험을 정식으로 합격 발표하기 전, 시험 날 현장에서 등락을 가늠하는 예상 점수가 나왔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말과 같이. 그래서 나는 기쁘고 기뻤다. 나는 시장에 가서 떡을 사왔다.

시험 보기 전에 농담처럼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이 시험에 합격하면 내가 떡을 돌리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동료 20명과 교사에게 조금씩이라도 나눌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숫자로 똑 떨어질 수는 없다. 그래서 여분이 필요하고, 그런 말이 소문이 난다면 행정실과 교무실의 타과 교사들도 입맛은 다실 정도로 나눠야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각자 돌아갈 몫이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외려 다른 동료들에게는 부담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필기시험 합격이 발표 되자, 나는 교무실에 가서 실기 시험 접수를 부탁하였다 동아기술측에서는 필기시험도 벌써 제3회 째에 치르라고 당부했었고, 실기 시험도 필기 합격 후 반드시 3회 째에 응시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회 실기를 접수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교사에게 부탁하여 접수하겠다니 얼마나 듣기 거북한 단어였을까? 기계치 그것도 요즘 컴퓨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서 부조건 반대할 수도 없어서, 아마도 눈엣가시로 두고두고 남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실기 시험을 위하여 실습 기능을 연마할 기간은 필기 시험을 합격한 424일부터 625일뿐이었다. 그렇지만 동아기술전문학교에서는 교육 교안과 계획안을 준수하면서 아직도 이론에 집중하고 있었다. 개인 생각으로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기가 절실히 중요하다고 믿고 말았다. 이론은 혼자 책을 본다고 해도 그렇지만, 실기는 혼자 할 수 있는가? 실기를 독학이라고 한다면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어깨너머와 곁 눈도장이라도 필요하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다 보니 마음이 급하고, 교사에 대한 반응이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출근하면 오늘은 실습다운 실습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부딪치면 속수무책이었다. 교사는 일정대로 새로운 과제를 배부하면서 가르쳤지만, 나에게는 이미 벌써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고 여겼다. 한 번이라도 어려운 문제를 주면 스스로 공부하고 터득하면서 해결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힌트를 주는 것이 좋고, 예습을 하고 선행학습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절실하였다.

 

그러면서 시간만 갔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정말 안타깝고 애석하기만 해졌다. 벌써 결전의 6월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이제 특단의 비상수단을 선택하였다. 실습 훈련을 집에서도 하고 학교에서도 했다. 그러자 학교 측은 이제 비로소 혼자 실습한다고 인정해주면서, 상응하는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말하자면 정해진 교과 순서를 따르지 않아도 묵인해주고, 혼자 스스로 과제를 만들어 가면서 실습을 해도 좋다는 말이었다고 본다.

마음이 급하니 정말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피곤하다고 초저녁에 들었다가, 12시가 지나면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못한다. 그러다가 숙제를 풀지 못한 문제가 생각나서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러니 이런저런 궁리 끝에 이론으로 답을 알았다. ‘그럼 당장 확인해 보아야지!’하면서 벌떡 일어나서도, 도구를 가지고 답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가정에서 전기 관련 도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론을 기본으로 하여 실제를 확인하고 정답인지 오답인지를 즉각 확인하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학원에 가면 바빠서 깨끗이 잊고 만다. 또 저녁에는 다른 과제가 생각나서 잠이 오지 않는 경우도 가끔 생긴다. 그러다가 다시 12시에 깨어나서 고민하다가, ‘이거다.’ 하고 장담하지만 그 역시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밤을 꼬박 새어도 확인할 정답은 없었고, 학원에 가면 진도가 나가기 때문에 또 잊어버린다. 이것은 실기 시험용 도구가 없어서 마음만 바쁘지만 몸은 게으르기가 한량없다. 말하자면 불비한 독학생, 나는 많은 수고와 무제한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요즘에 생긴 예상 문제 시리즈가 15번까지 있다던데 나는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열심히 배우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통적으로 독학생이 즐겨 사용하는, 돌아가든 넘어가든, 가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답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나는 정통 코스를 이수하지 못해서 하는 것마다 실수를 했다. 미리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독학에 가까운 형태로 배웠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다 했다고 점검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실수가 나왔다. 그것은 당장 시험장이라면 불합격이라는 판정이었다. 말하자면 탈락이라는 말이다.

따져보니 그렇게 사소한 문제로 실수를 하다니! 다음에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다음 문제를 풀고 점검해달라고 부탁하면 또 다른 곳에서 실수가 벌어졌다. 한 번은 떡을 먹다가 떡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번은 콩가루가 떨어질 수도 있다. 떡고물과 콩가루는 귀한 음식이니 절대로 흘려 먹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과제를 풀었다가 점검을 의뢰하면 또 다른 형태로 실수를 발견하고 말았다.

 

급하니 나에게 급행 탑승권을 사오라고 훈수하였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희망에 들떠있었지만 사 온 승차권은 급행이 아니라 완행 승차권이었다. 빨리 가서 급행으로 바꿔오란다. 다시 가보니 그 사이에 매진되어 직통으로 가는 급행이 없단다. 할 수 없이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는 환승용 급행권을 사 왔으나, 다시 가서 빨리 가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가서 물어보니 다른 창구에 가면 직접 가는 급행이 있다는 조언을 귀띔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다른 창구에 가서 급행표로 바꿔왔으나, 이제는 입석표는 장거리를 서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좌석표를 구입해야지 그저 조금이라도 절약하려고 입석을 선택했다면 손해라는 말이었다. 이것이 모르는 독학생의 민낯이었다.

 

나는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점검해보니 결과는 단골 실수였다. 아니다. 실수는 한두 번에 족하다. 실수에 실수를 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패의 경고장이다. 축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실수에 실수를 한 사람은 절대로 국가대표로 선발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만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나는 그렇게 실수를 했으니 벌써 실수왕이라는 닉네임이 붙었을 것이다. 실수왕은 실전에서도 실수한다는 정설이다. 빗대면 시험장에서도 실수하고 말 것이다. 그 말은 반드시 불합격하고 말 것이라는 속설로 들렸다. 그러나 나는 실수라는 실수는 모두 해보았으니 더 이상 해볼 실수도 없다는 희망을 품고 도전하였다. 만일 혹 만약이라면 벌써 9999번째 실수를 해 본 경험상 이제 만 번째에서는 반드시 통과할 것이라는 이론이다. 정말 통할까?

 

그 와중에 새로 바뀐 전선 색깔이 등장하였다. 법령에서는 벌써부터 예고되었다가 비로소 올해 그것도 2회 째 실기 시험부터 새로운 전선을 취급한다는 말도 들렸다. 그럴까! 새로운 전선을 가져온 교사가 하는 말은, ‘이렇게 하면 반드시 탈락합니다.’라는 충고가 있었다. 나에게 들리는 말은 항상 조심하고 신중하게 마무리 하세요.’로 들렸다. 말하자면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며, 이미 하고많은 실수를 넘어 다음 번째에서는 합격하고 말 것이라는 희망으로 받아들었다.

필기시험에서 이미 보았듯이 실수왕이 실기 시험에서도 실수왕이 될까? 실수왕의 권위를 빼앗기고 말 것인가? 실수왕이 좋은 것인지 왕위를 빼앗기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실기 시험장에 들어서기 전에, 여러 가지 도구를 챙겨서 무겁지만 가볍게 출발하였다. 시험에 들어가는 사람이 도구를 무겁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시험을 치르게 해준 것이 고마워서 가볍게 느껴졌을 것이다. 연장 탓을 하는 목수는 대목이 되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저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행복이 된다는 말이다.

실기 시험장이 무겁거나 칙칙하지도 않았다. 혹시 시험장이 아니라는 착각이 들자 들러보고, 두 사람에게 물어본 다음에야 확실해졌다. 마치 고등학생의 평상시 실습장처럼. 사실 그 장소는 군산기계고등학교의 전용 전기 실기 시험장이었다.

막상 들어가니 젊은 학생뿐이어서 나는 외롭고 쓸쓸해졌지만, 그래도 포부를 부여안고 늙은이 티 내지 않도록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갔다. 거기서도 반갑습니다!’를 힘차게 외쳤다. 그래도 눈여겨보는 학생이 없었고, 나처럼 일반인 성인은 하나도 없었다.

학생들은 그저 교복을 입고 평상시 등교한 것처럼 보였다. 나처럼 도구를 잔뜩 들고 오는 학생들은 없었고, 그저 전동드릴 하나만 들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저렇게 나대면 시험 칠 사람의 마음이 아닌 것 아니냐는 의문도 들었다.

 

드디어 시험 안내를 전달해주는 감독관 한 명이 들어왔다. 나는 이때다 하면서 말을 걸었다. ‘감독님! 분위기를 풀어주시고 학생들이 많으나 어른이 적으니 힘 좀 팍팍 밀어주시면 안 됩니까?’ 농담을 던졌다. 감독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자세히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전까지는 내가 두 번 물어봐야 비로소 질문을 알아챈다는 눈치였으나, 이제는 나와 반대상황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상황에 저승사자같이 보이는 감독관에게 농담을 날리는 사례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감독관도 알아챘고, 내 질문에 가볍게 호응하였다. 나는 감사합니다.’로 화답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오늘 모인 수험생들이 느닷없이 얻은 수확이었을 것이다.

시험장 배치는 내가 첫 순서로 추첨을 받았으며, 내가 뽑은 시험장 위치는 1번 이었다. 시험 시간과 주의 사항을 설명한 후, 실전에 투입되었다.

 

갑자기 드드드...’ 하는 소리가 들렸고, ‘툭툭툭...’ 하는 소리도 들렸다. 웬일인지 주위를 돌려보니 학생들은 벌써 실습 도구를 들고 열심을 내었다. 정말? 나는 아직도 준비 중인데... 나는 학생들보다 아마도 15분 넉넉히 20분 정도는 늦을 것이 분명해졌다.

아뿔싸! 학생들은 눈만 뜨면 하는 일이 전기 공부였으니 이런저런 주의 사항은 이미 곱씹었을 것이 분명했고, 시험장에 가져가야 할 도구도 이미 터득하고 남았을 것이다.

내가 가져 간 도구는 기본인 전동 드릴, 십자형 수동 드라이버, 50cm 플라스틱 자, 2m 줄자, 펜치, 디바이스, 소형 금속가위, 전선 피복 벗기기, 백묵, 3색 볼펜, 네임 펜, 전선관을 굽히는 스프링 관, 전선관을 끊을 수 있는 가위, 그 외에 비상용으로 전선관을 선택한 후 신호를 알리는 벨테스터, 여분의 나사못 다수, 전기용 테이프, 퓨즈에 퓨즈홀더와 퓨즈커버, 견출지, 접속할 전선의 위치를 알려주는 자석 다수 등 많고 많은 도구들이 나와 동행하고 나섰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또 하나 큰 부담이 동행하였다. 만약, 진짜 만일 시험을 치르다가 갑자기 전동 드릴이 고장 난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갑자기 충전이 방전된다면? 이해가 된다. 그래서 가기 전에 반드시 충전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첫 순위였다. 그러다 갑자기 고장 난다면? 우선 믿어야지 거기까지 대안은 없다. 이것은 진리다.

그러나 나에게는 만약 갑자기 고장이 난다면?’에 대안을 준비해야 했었다. 내가 도구를 고칠 자격도 없고, 고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여분의 전동 드릴을 준비해서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나는 내 스스로 준비를 해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실패는 또 하지 않는다.’는 준비사항이었다.

무슨 뜻인가? 내 말은 이미 많고 많은 실수를 해놓았으니 실수왕이므로 실전에서도 실수할 것이라 믿어, 실수를 하지 말자는 유비무환이었다. 정말로 시험장에서 전동드릴이 고장 났다면 내 말이 맞지?’ 이러면 되겠는가? 아니다. 내 성의를 보아 전동 드릴이 고장 나는 대신 다른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토록 생돈 들여서 사서 고생한다는 짓일까? 쓸데없이 없는 것을 만들어놓고 걱정한다는 바보였을까? 아니다. 내가 할 것은 내가 하고, 남은 것은 내 능력 외의 바라는 희망이라는 주장이다.

 

주어진 시험 시간은 4시간 30분이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단일 문제로 나온 어떤 시험을 어떻게 보았을까? 나는 동작도 느리고 실수가 많아서 번복하고 수정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마음이 불안해지면 으레 얼마나 남았나요?’를 물어보았다. 세 번씩이나. 그래도 감독관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돋우지도 않았으며 상냥하고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 지금~ 1시간 30분 더 남았어요.’, ‘. 지금은 1시간 남았습니다.’, ‘아직도 30분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듣다 보니 물어보는 나도 부담이 들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런 것도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라며 퉁명스럽게 혹은 절대로 시간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보나 마나 없는 트집을 만들어 가면서 감점 요인을 샅샅이 살펴볼 것이다.

 

그러던 중, ‘나도 이제 마감할 시간이구나!’ 느끼자 고개를 들어 둘러보았다. 학생은 벌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남은 사람은 어른 셋뿐이었다. 그 순간 안 됩니다. 이래서 탈락입니다.’라는 멘트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이미 시험을 본 사람인데 지난번에는 시간 초과로 탈락해서 다시 보았다는 말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 내에 마치기는 했지만 복병 실수를 만나 탈락하는 결과인가 싶다.

나는 심각하지만 그래도 타산지석을 활용하여 다시 점검해 봐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되자 감독관님! 마쳤습니다!’를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감독관은 득달같이 달려왔다. 두 명이 점검하였으며 한 명은 입회자였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부정행위를 하거나 안전에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을 살펴보면서 일상 감독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감독관은 다시 한번 정말로 끝났습니까? 바로 점검해도 됩니까?’를 물어왔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어졌다. ‘, 점검해도 됩니다.’를 대답하고 퇴장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랬더니 감독관은 안 돼요. 가면 안 됩니다말하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알기로는 응시자가 퇴장하고 대기하다가 ‘00번 들어오세요!’라는 호출을 들으면 실기 시험 탈락 요인을 설명하는 순서라고 들었었다. 감독관이 혼자든 둘이든 상관없이 작동 테스트를 할 때 합격하면 호출이 없고, 탈락하면 이런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를 확인시켜 준다는 수순이었었다.

그런데 직접 테스트를 시연하는 장소에서 감독관의 위치로 서서 보니 내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합격의 기쁨을 쳐다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탈락하는 순간을 감내해야 한다니 얼마나 조아렸을까?

실수왕이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 것인가, 실수왕의 권좌를 쥐어짜고 지켜낼까? 차마 눈 뜨고 보는 것도 남의 일처럼 난감해졌고, 그러다가 그만 멍해지자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감독관은 나의 심정을 알고 있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몰랐을 것이다. 왜냐면, 자고 나면 다른 응시자를 대상하므로 일일이 파악하고, 애로사항이 있다면 그를 도와줄 방법에 대한 공부를 해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됐습니다. 이제 나가도 됩니다.’ 하는 말이 들렸다. ! 나도 제어판에서 드디어 전기가 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뛸 듯이 기뻤다. 마치 필기시험에서 축하합니다. 점수는 63.5점입니다.’하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 알고 온 실기 시험의 합격선도 60점이었다. 실기 시험의 성적 최종 발표는 2주 후, 실기 제출물을 놓고 많은 감독관이 모여 상의하고 매기는 점수란다. 자동차 운전 시험에서 2종에서 60점을 넘어 61점 맞았으면 창피해서 불합격인가?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전달할 장소는 동아기술직업전문학교이고 당일 담당 강정용 교사가 먼저 떠올랐다. 물론 전화를 건 것도 강의 시간과 휴식 시간 등을 고려하여 조정하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도 건 사람도 반갑고 즐거운 대화였음이 분명하다. 자기가 가르친 학생이 그 어렵다던 시험에 합격하면 좋지 않을 것인가? 설령 쉬운 시험이라고 믿어도, 이왕 치른 시험이라면 반드시 합격이 목표이자 물론 희망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근래 2년 시험이 대폭 줄었다니 얼마나 기다리던 시험이었을까?

그런데 전화를 끝내고 다른 곳을 생각해보니 가족이 등장하였다. 가족에게는 아직도 시험 자체를 알려주지 않았으니 늦게 알려도 좋고, 최종 시험 결과를 발표한 다음에 밝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필기와 실기를 위해 도움을 준 조력자들이다. 그들은 나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세세히 누누이, 꼬치꼬치 따져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도우라면 아무 말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도와주는 것이 바로 기댄 사람이었다. 누구든지 도와주는 것과 도움을 받는 것도 시기와 장소, 환경 등의 조건에 맞아야 한다. 이른바 줄탁동시처럼. 평상시 의무적으로 도와줄 사람은 그렇다 치고, 박성규 선생님과 조익권 동료, 김창성 동창, 한상인 동료, 이명준 사장 등이다. 이들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대화를 나눌 사람이었고, 내가 말하면 바로 마음대로 활용하라고 배려해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파보면 내가 못하면 대신해 주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기능사 시험용 제어판을 마무리하도록 주어지는 시간은 딱히 없다. 그러나 전체 4시간 30분 중에서 2시간 30분에 마쳐야 정상적이라고 들었다. 완성하려면 제관에서 1시간, 입선에서 1시간을 끝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나는 제어판을 3시간으로 출발하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3시간! 속도에 치중하면 2시간 30분에 마치지만 으레 실수를 동반하고 말았다. 확인하고 수정한다면 2시간 내로 들어가야 합격권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미적미적하면서도 수정하고 고치면 시간으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게으른 사람은 얼마나 바쁘고 급했을까.

마음이 타들어 갈 것인가. 나이가 많아 행동이 느리며 감각이 둔하거나, 기억력이 떨어지고 창조력이 가물가물한다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손에 지장이 있거나 두뇌 회전이 굼뜨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정답은 오로지 훈련과 반복 노력 뿐에 없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드러내놓지 않고 도와준 사람들은 나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실기 시험을 칠 때쯤에서는 ‘2시간으로들어왔다.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헛되지 않도록 성과를 내었으니 그것만 해도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필수적으로 드라이버를 돌려야 하는 손의 기능을 되찾고 싶어서 노력하였다. 그 말은 학습 전부터 이런저런 제약을 처리해야만 했었다. 지금도 자재 자유롭지는 않지만 최소한 남 하는 흉내는 낼 수 있을 만큼 됐다.

 

이번 전기기능사 시험은 이렇게 많은 결과를 냈다고 본다. 기능사 자격증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이지만, 우선 내면적으로 손의 기능이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다고 자평한다. 그 증거는 손글씨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작은 글씨와 지렁이체를 보면 ~’ 하고 바로 짐작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발전은 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가까이서 보아온 가족이다.

 

한여름 37~ 38도까지 올라간 태양 볕에서도 도시락을 매고 걸어간 것도 많은 성공이었고, 삼복 중에 눈 수술을 해냈다는 것도 성공이었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솟아나더라도 머리를 감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처방 중에서 최선의 1 안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감안하여 무리하지만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처럼 행복한 시간이 없었을까?

 

정말 항상 즐겁고 행복한 날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이미 콧등은 나았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이 쓰린 마음도 있었다. 지인과 지인으로 엮인 과거 일이지만.

어느 날, 허가 낸 2층에 복층 다락방을 가진 아담한 3층 건물을 지으려는 지인과 만났다. 나에게 전기 공사를 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이미 전기에 관해서 조금은 안다고, 전기 기술사 한 명 정도는 안다고, 전기공사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전기공사업 사장을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때문에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기 공사할 사람을 불러 소개시켰다. 내가 입회한 자리에서.

그러나 공사를 하기 위하여 견적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약속한 시간을 어기고 말았다. 내가 소개한 사람인데 바로 나의 체면에 엮인 것 아니겠는가. 나는 내 체면을 세우려고 조바심이 났다. 소개할 때부터 이 공사는 소규모이지만 공인 건물이므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것이며, 공사 규모도 작고 예산이 적어서 후하게 줄 수 없으니 적정 최저의 견적을 내라고, 당신을 믿고 경쟁 입찰이 아닌 임의 결정할 것이니 차질없이 처리하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이것이 바로 신의의 믿음 바탕에서 비롯한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겼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전기공사하는 지인을 불러 재차 부탁하였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신신당부하면서 다음 약속 기일을 지정하였다. 그러나 다시 공염불을 하고 말았다. 2차 약속 기한도 넘어, 벌써 준공을 따질 시점인데 이제 와서 견적서 제출을 포기하겠다니 얼마나 허망할 일인가.

공사 발주자는 목사인데, 공사할 설계도가 나오기 전부터 목사에게 부탁을 해온 공사업자 장로도 있었다. 목사는 장로와의 관계를 고려해 고의로 제쳐놓고, 별도로 나에게 부탁을 해 온 사건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나는 목사님에게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자 백배사죄 하였다.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어찌 낯을 들고 만날 것인지 난감해졌다.

! 정말 전기가 그런 것인가? 전기공사업이 그런 것인가? 전기 기술자가 그런 것인가?

 

나도 전기맛을 보자, 나도 전기공사업을 할까? 나도 전기 기술자가 되어보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처음 생각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전기 기술자가 되고 보자며 뇌리에 세뇌되었음이 확실하다. 의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각인되었을 것이다.

전기 기술사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같이 근무하다가 이제 기술사 시험을 치르겠다고 나선 직장 후배가 그랬다. 전 직원이 모두 같이 의무적으로 출근하는 시간에는 그냥 거저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내 직권으로 퇴근시키면서 기술사 시험 전문학원에 보내주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2년 걸쳐서 집중 특강 시간은 보내야만 했었다. 바로 족집게 강의 시간에 빠지면 합격이 어찌 보장되겠는가. 본인이 노력했겠지만 그럴 환경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합격은 누가 줄 것인가. 기술사가 민화투로 딴 자격증이겠는가?

그렇게 본인 노력으로 얻어낸 기술사였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합격했다는 통보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축하한다는 말로 끝나고 말았다. 이른바 배은망덕 퇴직자. 그 뒤로 나와 그는 거리를 두고 기피했다. 결국 전기 기술사는 타시도로 떠났다.

 

나를 멍 때린 전기공사업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어서 이별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이다.

지인님! 나도 이제 전기 기술자가 되었다.

뭔 말이야?

! 거짓말이야. 그저 전기기능사 시험에 합격했다니까!

정말? 전기기능사를 언제 배웠어? 그 나이에, 공인 된 종합병원이

! 그것은 기본 아닌가? 전기에 눈을 뜬지 3개월 만에 실기까지 통과했다니까!

아니야, 정말 힘들어. 그럴 수가 있었다니 정말 놀랄만큼 수고했다.

사실이야. 자격번호 21402142026U. 인정해주라.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나를 믿고 기다려. 2달 이내에 틀림없이 직장을 찾아줄테니

오케이!

 

얼마 전에 멍 때린 지인이 그 보답으로 반드시 직장을 찾아준다니 그것으로 보상은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한 마디 말로 치유되었다. 옛말부터 한 마디 고운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내일 전화가 올까? 아니면 모레쯤 전화가 올까? 하마 올까 기다리다가 두 달이 넘었다. 되려 이제 전화를 할까?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도의인가?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가 혹시 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알지? 벌써 2달이 지났어.

, 벌써 그랬지! 여기저기 알아봐도 소식이 없네.

그럼 내가 할 일은?

기다려봐. 조금 더 알아보게.

더 기다려야 돼? 그냥 기다리면 된다면서. 나는 그 사이에 하지 말라는 기술자자격 수첩까지 얻었어.

그것은 필요 없다고 했잖아!

맞아, 처음 말할 때 알아들었어. 그래도 노느니 염불이라도 해두자고 땄다. 진짜 필요 없는 교육, 방금 자격증 딴지 잉크도 마르기 전에 또 교육이라니 조금 그렇더라.

내 말이. 차라리 교육비 16만 원을 나 주면 술이라도 같이 먹지. 경험자가 했던 말이야.

그렇다치고, 자격 수첩 D5202118585. 잉크가 7만 원어치 마르기 전에 빨리 취직 알아줘.

알았어. 7만 원어치는 조금 기다려봐!

 

그러고 또 2달이 지나갔다. 그래도 소식이 없다. 하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명언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독자생존이것이 진리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한 말,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기 스스로 도와가면서 살아 가야 된다는 말이다.

 

동아기술전문직업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는 호언장담하면서 꼬드겼다. 누구든지 자격증을 따면 반드시 바로 직장이 생긴다고 말이다. 나이 많은 나는 그것은 분명 허구다, 그래도 그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힘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보나 마나 직업전문학교인데 아직도 직업에 대한 알선이 없다. 나 스스로 취업전선에 발품을 풀어 뛰어다니라는 식으로 조언뿐이다.

내가 자영업을 하던 때에도 그랬다. 사장보다 나이 많은 직장인이 채용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절대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은 취직하기 어려웠다. 마음에 드는 직원을 구하기도 힘들지만, 어쩌다 만난 직원을 다루기는 더욱 힘들다는 정설을 경험해본 사람이다.

이런 참에 나이 많은 나를 누가 어찌 채용해줄 것인지, 그것이 바로 꿈에 그려보는 희망 사항이며 그저 듣기 좋게 말해보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럼 나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알고 있는 지인의 소식을 기다려야 할까, 알고 있는 지인의 얼굴을 보고 기다려야 할까. 분명 아니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스스로 얻어낼 기회뿐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바로 곧 죽어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요 내가 뿌린 만큼 거둬야 하는 업보다. 그것도 무지개는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최소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봐야 볼 것이요 눈을 뜨고 찾아봐야 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우물을 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우물을 파다가 다른 기회가 오면 굴러오는 호박을 놓치지 말라는 조언이다. 한 우물을 파다가도 혹시 불시에 닥칠 위기를 파헤칠 만반의 준비를 해두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미 치른 실기 시험과 경력용 교육, 그리고 제반 수수료 등을 아깝다고 여기지 마라. 시위를 떠난 살이니 후회하면 안 된다. 발품을 파더라도 굴러올 호박을 헌 신발처럼 버리지 말고 적시에 잡을 준비는 갖추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이다.

나는 이제 다른 문을 열고 나선다. 저녁이 되면 돌아올 시간과 돌아올 길을 잃지 않도록 적어가면서 나간다. 이것은 바로 아직은 치매 전조증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래서 지금은 세월을 지나는 중이다. 여기저기 얻어맞아도 살아있다는 것이 바로 만성이 된 덕분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