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소설, 꽁트, 동화

인어는 무얼 먹고사나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5. 18:10

인어는 무얼 먹고사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게 안에는 뿌연 안개가 끼인 상태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정면의 작은 텔레비전 속 화면만은 유난히 돋보였다. 거기에서는 예쁜 인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자기보다 훨씬 부해 보이는 노인들 길들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어는 꼬리가 없다.
친정어머니가 자른 것인지, 시집 올 때 남편이 잘라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꼬리가 없어서 더 예쁜 인어가 되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연속극에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예쁘다고 인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그런 변형된 인어가, 며느리 길들이기에 맞서 이긴 결과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한창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인어가 있다. 바보상자의 인어를 닮고 싶어하는 바보세상의 한 여자다. 이 여자는 작은 선풍기를 틀어 놓아 머리카락이 가볍게 뒤로 흩날렸다. 어떻게 보면 인어가 바다 속에서 막 물을 털면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본인은 자신이 인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보는 사람들은 그녀가 인어를 흉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바보상자의 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울려대는 또 하나의 바보 방이 있다. 이 방도 바보상자처럼 사면이 막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내가 지금 들어서고 있는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밝은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이 문턱에 서서 문틀을 꽉 잡고 비켜 주지 않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 인어를 좋아하는 주인 여자의 부름에 현실로 되돌아온다.
바보상자 밖의 인어는 나를 보고 어서 오라고 했다. 사실은 내가 미리 약속을 해 놓고 온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 바보방 안에 있는 두 남녀도 미리 예약을 하고 온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들도 나처럼 이 문턱을 넘을 때 아마도 어서 오라는 재촉을 받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째서 나에게만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했을까 하던 궁금증이 풀려 나갔다. 내가 사는 시대에 같이 살아있는 인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인어라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순진한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 저 여자는 왜 아무에게나 어서 오라고 하는 것일까. 인어는 바닷물 속에서 사는 동물이지, 이처럼 안개가 뿌연 바보 방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반대로 물과 안개는 갸냘픈 인어를 온통 둘러싸고, 인어는 그 속에서 그것들을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비슷했다. 그러나 물은 항상 가득 채워져 있지만, 안개는 바보 방의 한 쪽 구석에서 계속 만들어져 인어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밑으로는 비릿한 바다 내음도 나는 듯 했다.
탁자 밑에는 커다란 통멸치가 배를 들어 내놓고는 입에 피를 토하거나, 게거품을 물고 있는 것들이 서넛 보였다. 역시 인어는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평소에 나처럼 강인하다고 자신하던 사람도, 저런 희뿌연 안개 속에서는 한 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인어는 계속 그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꼬리 달린 인어는 물 속에서 살지만, 꼬리 없는 인어는 안개 속에서 사는가 보다. 따지고 보면 안개 속 인어는 생명력이 강한 인어다.
안개 속의 생활에 자신없는 내가, 안개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인어를 걱정하는 것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었다. 담배도 사며 소주도 사고, 아이들 용 과자도 사오도록 했었다. 그렇게 하면서 간접적으로 바보 방을 확인해 보곤 했다. 라이언 병사 구하기처럼 안개 속에서 인어를 구출하자는 것도 아니고, 바보 방의 안개공장을 폐쇄시키려 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냥 어떤 상태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이러한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인어는 친절했다. 인어는 나에게 뿐이 아니라 이 문턱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다. 친절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바보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어에게 바보 방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덮어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독한 안개로부터 인어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되도록 어느 것 하나 조치를 취해준 것도 없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내가 그것을 행해야 할 의무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아이들을 통한 정보 입수가 불가능해졌다. 미성년자에게는 담배나 술을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의 심부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그냥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 시킬 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날을 생각한 후 이제는 생수로 방법을 바꿨다. 몸에 해로운 안개를 제거하는 데는 비가 제일 좋겠으나, 실내에서 비를 맞는 것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으므로, 역시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딱히 필요하지도 않는 생수를 매일 사 나르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앞서 얘기처럼 저 바보상자 앞의 인어는 나만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맑은 생수를 권하기도 전에, 그 인어는 이미 맑은 공기를 충분히 들여다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비록 기계바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맑은 공기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도 물 만난 인어처럼, 안개 속 인어도 싱싱할 수 있었던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우리가 인어를 잡으러 바다 속에 들어갈 때 산소 호스를 물고 들어가듯이, 안개 속 인어는 방밖의 산소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다 속 인어공주가 인어왕자와 같이 다녔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안개 속 인어공주도 인어왕자와 같이 다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는 행동으로 보면 아직까지 청순하고 여린 면이 많이 있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세상살이의 고달픔도 알고, 행복과 불행의 면면을 거쳐 온 이 가게주인이 편했다.
함부러 대하고, 노리개 삼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대하기에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회의 모든 예절은 필요했다. 담배도 팔고, 소주나 맥주도 팔지만 그래도 술집은 아니다. 아이들 과자도 팔고 어른들 군것질거리도 판다. 나에게 별로 필요도 없는 생수를 매일 매일 팔면서 돈을 챙기고 있지만 그래도 양심은 팔지 않는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인어가 자리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며칠 동안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길지 않지만 그래도 장거리 여행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생수야 며칠 분을 한꺼번에 사갈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생수를 사는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동안 혹여나 안개 속에 질식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방밖의 신선한 산소를 마실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정전이라도 되면 내가 부채질이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실행에 옮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간 수차례 정전도 되고, 지난번 홍수 때는 물이 바닥까지 차고 들어와 그 산소 구멍을 채웠을 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하는 생각들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인어공주가 있다는 것은 인어 왕과 인어 왕비가 있다는 얘기고, 공주가 나이가 들었다면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매일같이 생수를 사 날랐을까. 역시 생수는 우리 몸의 노폐물을 씻어내고, 신진대사를 돕는데 최고의 명약임을 아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얼마 전에 구입한 집에 있는 이온정수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무리 둘러대도 변명이 구차하다.
한꺼번에 생수 다섯 개를 사도 잘 가라는 말은 한 번 뿐이다. 한 개씩 나누어서 샀다면, 어서 오라는 말과 잘 가라는 말이 다섯 번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인어는 왜 한 번만 하는 것일까.
인어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상상 속의 인어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반대로 인어는 자기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해적에 비유될 만큼 생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인어를 어떻게 관리하여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하다. 연못에 놓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어항에 넣어두고 나 혼자 보는 것이 좋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바다 속에서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까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나머지 생수들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억지쓰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는 사이 나도 시야가 흐려오기 시작하였다. 바다 속 인어를 육지에 올려다놓고 감상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내가 꿈꾸고 있던 것은 용궁이었는지 용왕이었는지도 모르면서.

'내 것들 > 소설, 꽁트,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 살자  (0) 2006.09.16
서울가는 희안이  (0) 2006.07.06
구난자  (0) 2006.05.15
마늘 찧는다더니  (0) 2006.05.15
화려한 외출  (0) 200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