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가을 잠자리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38

가을 잠자리 / 한 호철


비가 개이자 울안에는 난데없는 잠자리 떼가 날아들었다. 이 잠자리들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만 그치면 찾아오는 것 같다. 여름날 장마가 잠깐 뜸해진 사이에도 찾아오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온 뒤에도 찾아온다. 어디 그 뿐인가. 한여름 뙤약볕 더위를 식히려는 듯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니 고추잠자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온다.
이 고추잠자리들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앉을 듯 말 듯 한다. 여기 앉아 쉬어가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어라도 보는 것일까. 그러다가 다시 원을 그리며 돈다. 미처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네들은 마치 고추 먹고 맴맴 달래먹고 맴맴 하듯 돌고 또 돈다.
바라보고 있는 내가 나도 모르게 돈다. 세상의 모든 인생도 같이 돌아간다. 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지구도 같이 돈다. 그러면 내 곁에는 벌써 가을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물가에 가면 연약한 물잠자리와 화려하고 귀엽지만 작은 각시잠자리가 있다. 보리밭에 가면 누런 점박이 보리잠자리, 논에 나가면 새하얀 쌀잠자리, 들판에 나가면 얼룩배기 황소잠자리가 있다. 장독대에는 노란 된장잠자리, 고추밭에는 새빨간 고추잠자리, 그도 저도 아닌 대밭에는 보기에도 튼튼한 말잠자리도 있다. 요즘에는 귀한 꼬마잠자리까지 발견되었단다.
내 잠자리는 어떤 잠자리인가.
나의 잠자리는 몸을 눕히면 바로 피로가 풀리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 나의 잠자리는 앉아만 있어도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다. 비좁거나 초옥이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모여 앉아 같이 쉴 수 있는 마음 편한 곳이면 된다.
번쩍 번쩍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 눈을 감으면 어차피 보이지 않을 테니까.
고상한 음악까지는 없어도 된다. 잠이 들면 어차피 들리지 않을 테니까.
세상에는 많고 많은 잠자리가 있지만 나는 이런 잠자리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나의 잠자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잠자리는 어떤가. 나의 잠자리는 마음이 편한 잠자리인가. 그리고 몸이 편한 잠자리인가.
나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쉴 수 있는 잠자리를 원하지만, 왠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잠자리 때문이 아니다. 그 잠자리에 있는 사람의 내면이 편해야 진정 편안한 잠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잠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삶은 세상만사에 찌들고, 근심에 둘러싸인 속세의 연속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번뇌와 고뇌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 세상의 육체적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개천 둑을 걷다가 나를 따라 다니는 물잠자리에 인생을 비교해본다. 원래가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아무려면 물잠자리와 나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윤기나고 탐스러운 쌀잠자리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이 역시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웰빙을 생각한다 하지만 보리잠자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생이다. 자연식이나 발효식품을 연상하고 비타민을 강조하여 남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하여도, 인생을 어찌 그깟 된장잠자리나 고추잠자리들과 비교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잠자리들의 날개를 모아서 이불을 만드는 것으로도 내 잠자리는 편안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잠자리들이 마음대로 오가는 곳 어디에 가는 것으로도 내 잠자리가 편안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잠자리는 역시 내가 만드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도를 닦고 해탈을 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종교에 귀의를 하여야 하는가.
어쩌면 겨우 비바람을 막고 있더라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오순도순 얘기하며, 추위와 더위를 견딜만한 중에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그런 가족이 있으면 족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잠자리도 평안해지리라 믿는다.
마당에는 아직도 많은 잠자리들이 난무하고 있다. 장마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정녕 가을이 오고 있다는 말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잠자리들이 각기 자태를 뽐내며 돌고 또 돈다. 내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 같은데 그래도 자기들끼리는 경쟁적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잠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는 그 가을 잠자리 밖에 내 잠자리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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