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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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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 한 호철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아주 작은 꽃입니다. 꽃봉오리도 작았지만, 꽃이 다 핀 후에도 앙증맞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민들레라고 부릅니다. 큰 나뭇가지 사이로 많은 꽃들이 얼굴을 내밀며 화려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홀로 땅위에 핀 외로운 꽃입니다.


이 꽃은 누구하고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한 점 노란 물감이 떨어 진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방울인지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쳐다보아도 볼수록 신기하기만 합니다. 오밀조밀하지만 그래도 꽃이라고 제 할일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려는 행동까지 말입니다.


다른 풀들은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았지만 벌써 일어나 싹을 틔웠고, 봉오리를 맺더니 이내 꽃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대견합니다. 다 해보아야 키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한 치도 채 못 되는 아주 작은 키입니다. 땅에 바싹 붙어있어 아무리 살펴보아도 목이나 허리를 찾아 볼 수가 없는 꽃입니다. 그러니 나보다도 훨씬 작은 놈이지요.


이런 민들레가 봉오리를 열더니 생각지도 않게 아주 많은 꽃잎을 내밀었습니다. 어디에 숨겨 놓았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허리도 없는 것이 몸을 세우고, 고개도 없는 것이 얼굴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도대체 목을 뻣뻣이 치켜들고 쳐다보는 모습은 건방기가 넘쳐납니다.


나는 응답이라도 하는 듯이 그 꽃잎의 수를 세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한참을 세었지만, 몇까지 세었는지 헷갈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꽃잎들이 서로 자기를 먼저 세어 달라고 아우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세기로 하였습니다. 하나하나 꽃잎의 절반씩을 잘라내면서 세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나 이것도 끝까지 다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꽃잎들이 서로 먼저라고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작은 놈들이, 그 것도 한 봉오리에서 나온 놈들끼리 자기를 내세우기 위하여 죽어라 경쟁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차라리 내가 지고 말지. 나는 드디어 세는 것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 꽃잎을 세는 것은 단순히 꽃잎의 수를 알아보기 위하여서였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경쟁을 한다면 내가 처음 생각했던 의도가 왜곡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민들레가 나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것인지 다음 날은 키가 불쑥 자라 있었습니다. 꽃잎이 찢겨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꿋꿋이 자랐습니다. 이제 잘 자란 민들레는 키가 한 자도 더 됩니다.
아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꽃을 먼저 피우고 몸이 나중에 자란단 말입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제 다리도 생기고, 허리도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목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민들레의 존재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도 뜨이는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나도 그 사이 꽃잎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해져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민들레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낯선 꽃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얀 비눗방울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이것은 무슨 얌체 짓입니까.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운다는 얘기는 들어보았지만, 꽃을 남의 꽃봉오리 속에서 피운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예전의 민들레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남의 집에 날아 든 비눗방울을 훅하고 불었습니다. 그러자 불청객은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담장이나 지붕위로 날아가면서 나에게 소리쳤습니다. 잡을 테면 잡아보라고. 그리고는 다시 바람을 타고 내 주위를 도는 것이 마치 나를 놀려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찾고 있던 민들레는 비눗방울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꽃이 있었다는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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