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콩나물 인생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5. 17:40
콩나물

시장에 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어느 수퍼에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에 콩나물이 있다. 시장이나 골목길 가게 앞 길가에 플라스틱 단지를 놓고 검정 천으로 덮어 놓은 것은 아마 콩나물시루가 분명하다. 혹은 질그릇 단지를 놓고 파는 경우도 있다. 이 콩나물도 요즘에는 대량으로 생산하여 공급하다보니 대부분 콩나물 공장에서 전문적으로 길러서 파는 정도까지 되었다.
예전에 보면 각 가정마다 방 윗목에 커다란 물통을 놓고 그 위에 버팀목을 받친 후 콩나물시루를 얹어 놓았었다. 그리고는 틈만 나면 물을 주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마음에는 콩나물이 가지는 의미보다는 그냥 하나의 소일거리 정도의 심심풀이로 물을 주곤 하던 것이었다.

이 콩나물을 기르려면 우선 콩을 선별하여야 한다. 이 일은 추운 겨울에 특별한 반찬이 없을까봐 염려하는 사람들이나, 묵은 김치 대신 신선한 야채가 생각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먹을 식재료의 기본인 콩을 직접 고르던 것이다. 이 콩에는 밭에서 추수할 때부터 따라 들어 온 콩깍지나 콩 줄기가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벌레 먹은 콩이나 수확시 너무 세게 두드려서 깨어지거나 상한 콩이 문제가 된다. 이런 콩들은 잘 자라지 못하고 부패되면서 다른 콩까지 못쓰게 만들고 만다.
방에 앉아 사각 네모난 밥상에 콩을 한웅큼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주르륵하고 눌러주어 골고루 편다. 그리고는 상의 뒷부분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면 콩이 내 앞쪽으로 줄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때 토실토실 살찐 콩들은 때구르르 굴러 내린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찌그러진 콩이나 깨진 콩, 그리고 돌과 같은 이물질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콩나물을 기를 콩을 고르는 것이다. 어떤 때는 흘러오는 콩 중에 싹이 트지 못할 콩도 섞여 있으므로 눈으로 유심히 보고 골라내야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여기서 자칫하면 콩나물이 썩는 요인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여야 한다.
상 위에 놓인 콩은 내 쪽에서 앞 쪽으로 굴러가게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흘러가는 콩이라면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발복의 마음이다. 이리저리 굴러다닐 복이라면 나에게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골라 낸 콩을 시루에 담고 깨끗한 물을 길어다가 독에 붓는다. 이 독은 밑 빠진 독이다. 지푸라기로 또아리를 틀어 깔아주고 그 위에 콩을 부어 놓는다. 그래야 밑 빠진 독이라 하더라도 콩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콩을 너무 많이 넣으면 콩나물이 넘쳐나서 못쓰게 된다. 아니 못쓰게 된다기 보다는 콩나물이 크는 속도에 맞춰 자라난 콩나물을 모두 먹을 시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콩나물시루를 올려놓으면 어른들은 틈만 나면 보자기를 들추고 시루에 물을 퍼 부으셨다. 시루에 들어 있는 콩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려면 약간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눈 녹은 추녀 끝에서 물이 떨어지듯이 오랫동안 조금씩 떨어지므로 아예 넓은 통을 밑에 받쳐 놓는 것이다. 한참 후 독 속의 물이 다 떨어진 정도가 되면 큰 물통에 고인 물을 다시 퍼서 시루에 부어 주면된다. 이것이 콩나물 물주기 인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가 밥을 먹기 전에 한 번 물을 주시고, 밥을 먹고 난 후에도 한 번 주시고, 마실을 가시기 전에도 주시고, 돌아오시면 또 주시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주시고, 새벽에 일어나셔도 물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눈에 뜨이는 데로 중간 중간에도 물을 주시니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물을 주셨다. 옆에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도 한 번씩 일부러 물을 주도록 허락을 받는데, 그런 경우는 아무리 조심하여도 꼭 물을 흘리곤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미리 걸레를 준비하였으니 별 염려는 없었다.
방에서 발생한 먼지가 물통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시루를 거치는 동안 탁해진 물을 갈아주면 된다. 콩나물은 이 물을 먹고 자라지만 우리는 건조해진 방안에 천연 가습기를 설치하였으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추운 겨울에도 새싹이 돋고 식물이 자라는 것을 매일 접하게 되니 정서적으로도 좋은 학습장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한두 번 기르는 콩나물이 아니지만, 콩나물이 자란 만큼 미처 먹지를 못해서 어느새 독 위로 고개를 내민다. 이렇게 키가 커진 콩나물은 몸을 옆으로 틀어 휘어진다. 더운 여름이 아니지만 서로가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 옆으로도 넘쳐 나는 것이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짚으로 만들어 놓은 얇고 작은 발을 덧대준다.
이렇게 해 주어야만 물을 줄 때 옆으로 흘러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콩나물도 휘어지지 않고 곧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울타리가 없는 콩나물시루는 비록 자기 몸 안에 있는 콩나물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루에 물을 주시던 어머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콩나물을 잘 길러서 우리식구 저녁 반찬거리로 만들 생각이셨을까. 아니면 수고에 비하여 빛도 없이 물만 주어도 잘 자라는 콩나물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하루를 살다가 죽어 갈 콩나물이지만 그 시간만이라도 제대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바람막이를 설치하고 보호해 주시던 마음이셨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어차피 내가 먹어야 할 음식재료이니 물이라도 깨끗이 자주 갈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 내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서 생각나는 것은 콩나물이 그냥 콩에서 자라는 나물인 것 말고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생각으로는 오로지 물만 먹고도 자라는 콩나물에 빗대어, 들에 나가 일하는 것 말고도 학생으로서 공부만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나는 콩나물처럼 키가 쑥쑥 컷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아이들은 마치 콩나물처럼 공부 외에는 다른 걱정을 안 하고 지내는 것 같다. 눈만 뜨면 공부하라는 성화에 오히려 공부를 쉬어 가면서 하고 싶다고 말하는 정도가 되었나보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키가 많이 커져서 우리가 자라던 세대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내가 바라던 마음이 그대로 전달이 된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바람은 나와 같은 세대를 지냈던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었기에 바라는 바가 같았던 결과에서 비롯되지나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외에 숨겨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바로 보호 본능이 아닐까한다. 콩이 콩나물시루에 들어 앉아 있을 때에는 높은 장벽 때문에 햇빛도 없이 바람도 없이, 그저 주는 물만 먹고 잠만 자는 형상이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서 싹이 트고 뿌리가 내리면서 몸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루에 꽉 차게 되었고 이내 넘쳐나게 되었다.
몸집이 커지면서 이제는 아무 겁도 없이 시루 안이 좁다고 아우성이며 서로를 밀쳐내고 있다. 수도 없이 콩나물을 길러 냈던 오래된 시루들은 견디다 못해 터져나가게 되고, 호기심 많은 콩나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드디어는 시루의 담장 너머를 엿보게까지 된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드디어 자유라고 외치던 콩나물은 이제 밝은 빛에도 시달려야 하고, 끊임없이 주어지던 물세례에도 부족하여 메말라가기까지 한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라고 생각하던 것이 바로 낭떠러지의 절벽인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람막이가 없어진 콩나물은 자꾸만 구부러지고, 잔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여 제일 먼저 뽑히는 신세가 된다. 이 콩나물들은 더 이상 길러 보아도 오래 저장하거나 계속하여 기를 수 도 없는 것이니 나오는대로 차례대로 뽑아다가 반찬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때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그늘에 있을 때 느끼는 간섭과 지도를 규제와 통제로만 생각하다가, 이제 시루를 넘겨다 볼 정도로 키가 자랐다고 하여 자유와 해방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예전과 다름없이 주고 있는 물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느끼기에 부족한 듯 하여 잔뿌리를 만들어 흡수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된다. 아무리 자연광이 좋다 하여도 갑자기 많이 비쳐진 빛에 노출되다보면 견디다 못해 새파랗게 변색까지 되고 만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제나 저제나 기회만 엿보는 천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철부지들의 결과인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돌보는 마음으로 콩나물을 길렀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보살피고 돌보아야 할지 모르는 걱정과는 반대로, 지금 이 순간에 자기들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에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직도 독 안에 있는 콩나물에 지나지 않고, 비록 몸은 커졌을지 몰라도 곧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아직은 울타리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에는 서운한 마음마저 든다.
나는 오늘도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 이 작은 독 안에 한 시만 물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상상을 해본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지금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다면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까하고 생각도 해본다.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도, 콩나물에게나 우리 아이들에게나 아직은 내가 있어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이 선다. 적은 물이라도 적당한 용기에 모았다가 적정한 때에 알맞는 양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닌 것이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나대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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