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배산을 돌아보며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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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을 돌아보며

나는 가끔 배산에 가 본다. 그러면 그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송충이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풍장소로서의 배산이다. 당시에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겠지만 곧 잘 송충이를 잡으러 다녔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 때는 솔잎혹파리가 솔밭을 온통 못쓰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솔잎혹파리를 알지 못했으며, 지긋지긋한 송충이들과의 한판 싸움만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산의 한쪽 언덕이 시뻘겋게 불타는 것같이 죽어가던 기억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솔잎혹파리로 인해 죽은 솔들 인데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당시는 학교와 집 그리고 기껏해야 배산을 오가는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지금은 아무리 찾아봐도 그때만큼의 송충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마도 우리들이 너무 많은 양을 잡아서 그 씨가 말라버린 탓 일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당시 같은 반 학생 중에서 누가 가장 많이 잡았었나 회상에 잠겨본다.
그런 중에도 혹시 명 길고 운 좋은 놈들이 한두 마리 살아남았더라도, 지금의 공해에 견디지 못하는 정도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소나무 밑에서도 마음 놓고 앉아 쉬는 그런 실정이다. 그렇게 쉬다보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예의 소풍길이다. 소풍에서 보물찾기 같은 것은 애시당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른 건 다 몰라도 장기자랑 시간의 개다리 춤은 당시의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누가 잘 추고 누가 못 추는지도 필요 없다. 그냥 추면되는 것이고 아무나추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추다 보면 개다리 춤이라기보다 막춤이라고 하면 딱 어울리는 춤으로 변하고 만다. 배산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좀더 시원하고 좀더 후미진 곳을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생각도 난다. 그러나 꼭꼭 숨어서 펼쳐놓은 반찬이라고 해도 김치 한 가지 아니면 김치를 포함하되 또 다른 어머니표 밑반찬 한 가지 추가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어머니표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김매고 추수하고, 버무려서 반찬을 만드는 모든 것을 다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과 가공, 그리고 유통과 판매 이 모두를 담당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상표다.
오늘도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배산을 향했다. 집에서 배산까지는 차로 간다. 배산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주위를 돈다는 것이 그때와 다르다. 큰 배산의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산을 좌측으로 끼고 돌면서, 작은 배산의 남쪽 연못까지를 포함하여 걸으면 약 30분가량 소요된다. 작은 배산의 정상에 있는 정자를 거쳐 능선을 타고 큰 배산의 정상으로 향한다. 이렇게 해서 처음 출발지인 큰 배산의 입구에 오면 그냥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정도가 되어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 코스를 두 바퀴 돌면 정확히 한 시간이 걸린다. 산을 좋아하고 산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의 산행을 산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바쁜척하는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등산코스이니, 나와 비슷한 일부 시민들에게는 적합한 코스가 될 것도 당연하다.
이런 배산은 단순한 운동코스가 아니며, 그냥 산이 있어 등산하는 코스가 아니다. 예전의 송충이 잡이 대신 요즘 학생들에게는 현장학습 실습장이 되기도 하고, 유치원이나 교회의 정기행사장이 되기도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배산에는 벽없는 유도장이 있어 굵은 소나무를 부여잡고 업어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소나무를 이긴 유도수련생은 아무도 없다. 또 어떤 이는 기원에서 조용히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둔다. 이 기원은 명문화된 회원권은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입장자 제한이 있다. 또 배산에 가면 열린 음악회를 만나기도 한다. 배산은 그중 제일 높아 사방을 굽어봐도 열린 곳이니 산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 열린 음악회라 불러 합당하다. 작은 배산의 정자는 무대가 되지만 마이크나 다른 음향시설도 없다. 그냥 생음악으로 실시간 방송하며 녹화나 재방송도 없다. 그리고 특별한 것은 관객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음악회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이동식 태권도장을 지나칠 때면 절도 있는 모습으로 폼생폼사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이 도장은 말이 태권도장이지만 사실은 다른 무예들도 무시로 만날 수 있다. 태견이나 합기도 기타 처음보는 동작들도 우리를 든든하게 해준다. 동향 기슭에는 밤새워 빌고 비는 기도도량도 있다. 공습 대피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토끼가 파 놓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크며, 커다란 바위 밑에 굴을 팠으니 인공인 듯 하면서도 자연인 듯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배산에는 이렇게 우리의 삶이 있으니 이 산을 익산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배산을 사랑한다. 이 같은 시민의 추억이 있는 산, 익산시민의 건강이 있는 산이다. 익산시민의 문화가 있는 산, 종교가 있는 산, 더하여 서씨와 정씨의 두 가문에는 조상의 맥을 이어오기까지 하는 산이니 배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이산을 찾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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