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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제를 그리며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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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등제를 그리며 / 한호철

허리다리 위로 고향을 오가면서 바라보는 요교호는 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이 요교호는 황등제라고 불린 기록이 확실히 나타난다. 이 얘기는 전에는 이 곳이 저수지였다는 것 또한 확실하게 해 준다. 지금은 탑천이 흐르고, 그 중간 허리춤에 있는 허리다리에 서서 내다볼라치면, 마치 다리에다가 멋있는 물소 뿔을 대어 놓은 것처럼 양쪽 두개의 천으로 갈린다. 아마도 이 두 갈래의 물길 안쪽이 모두 황등제의 저수지였을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 황등제는 북쪽의 황등산 남측단과, 남쪽의 도치산 북측단을 가로질러 막고, 그 보의 동쪽으로는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등제이다. 이 제방은 둑길이 1.3km, 둘레 10km 였다는 기록과 맞아 들어간다. 현재도 황등산의 남측 끝 봉우리 청금산과 도치산 사이의 들판 직선거리가 1.5km 에 달하니, 침식작용을 감안하면 옛날에는 약간 더 좁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기록에서 보의 길이가 90 보 약 110m 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혹시 수문 폭을 잘못 말하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든다. 아니면 900 보의 잘못된 기록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것도 어쩌면 현재의 탑천 폭과 비교하여 볼 때 황등제의 수문을 강폭만큼 만들었다면 100 여m 라는 것과 수치가 일치하게 된다.
이 황등제의 북쪽으로는 삼기면, 동쪽으로는 삼성동, 서쪽으로는 신용동에까지 이르러 물이 고여 있을 만한 지형이니 대단히 큰 저수지였다고 여겨진다. 이 제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 황등제가 전라도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그럴법하다. 이렇게 큰 저수지였다면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비가 올 때면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가운데 깊은 곳에는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니 그곳에 바로 용왕이 산다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메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황등제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상세하게 남아있지 못하여 추정만 할 뿐이다. 그 이유는 백제시대에 세워지고 고려시대에 폐지되었다고 하니 당시 기록이 소홀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곡창지대의 저수지가 폐지된 사유는, 인근 상류에 설치된 경천저수지에 물을 저장하면서부터 물이 부족하였지만 거기다가 별도로 물을 받아 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후 황등제는 바닥에 많은 퇴적물이 쌓이고 지금은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당시 벽골제, 눌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참고로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일대에 백제 비류왕 27년 서기 330년에 창설되고 둑길이 3.3km, 또는 1,800보 약 3.24 km 라고 하며, 조선 태종 때 15년 간 보수한 기록도 갖고 있다. 또한 눌제는 정읍시 고부면에 있으며 백제 때 창건되고, 1873년 조선 고종 10년에 폐지된 것으로 전한다. 이 눌제의 둑 길이는 1.5km, 둘레는 16km 였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농경시대의 국내 3대 저수지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이다. 그런데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13년 서기 552년에 설치되었다는 설과, 고려 고종 38년 서기 1250 년경에 설치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 시대별로 최고 최대의 저수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이 의림지의 서쪽인 충청도를 호서라고 불렀다는 설도 그럴 듯하다.
반면 밀양의 수산제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27 일대로 삼한시대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으니 오래된 제방에 속한다. 그 크기는 둑길이 728보로 약 917m 이며, 둘레는 8km 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전하는 저수지는 홍성군의 합덕제, 상주시의 공검제, 영천시의 청제, 수원의 서호,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연백군의 남대지가 유명하다. 이것을 보더라도 남서쪽 지방에서 수도작이 더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3대 저수지는 벽골제, 합덕제, 남대지였다는 기록이 우세하니 둑을 설치 후 잘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시의 토목기술이 미약했던 탓으로 둑이 잘 무너지고, 다시 보수하며, 때로는 합덕제처럼 위치를 이동하여 둑을 쌓았다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지금 허리다리에서 바라보면 황등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없다. 그러나 마음속의 들판에는 넓은 물결이 출렁인다. 한때는 황등 서수 임피 대야 등 주요 평야 지대를 모두 축여 주던 물이 아니었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마운 물이다.
세계 년 평균 강수량은 750mm 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강수량은 1,298mm 로 많은 편이다. 하지만 국토가 좁고 대부분이 산지이며 집중호우가 내려 가뭄과 홍수가 되풀이되던 시절에, 보를 쌓고 그 물을 가두어 보관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문헌에 남아있는 저수지의 역사는 이집트 나일강에서 기원 전 2900년에 설치된 석괴구조의 댐이라고 하니 우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중인 시설만 해도 12,685 개나 되며, 국내 총 보유 시설 수는 68,018 개로 현재의 논농사에는 거의 부족함이 없다.
이제 이 황등제가 복원되고 다시 허리다리까지 물이 차서 넘실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은 크고 작은 농수로를 통하여 강제로 용수를 보내며, 자연 상태의 수압으로 흘러가는 물로는 농업용수 공급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황등제는 이렇게 내 고장이 옛부터 이렇게 과학적으로 다듬어져 내려 온 마을임을 아는 중요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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