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바늘방석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1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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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방석 / 한호철


우리가 살아가면서 앉아 있어야 할지 아니면 일어서야 할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말 중에 바늘방석이 있다. 바늘을 의자에 꽂아 놓고 그 위에 앉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이 바늘방석이 나에게 닥아 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상상하기도 싫은 그런 방석이 될 것이다. 본시 방석이라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앉아 있는 사람을 괴롭고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방석이 아니라 고문도구라고 불러야 될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기분 좋게 드라이브를 하였다. 이 날도 시외로 나가서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맑은 공기를 마신다면서 창문을 열고 자세를 바꿔 앉던 아내가 갑자기 “아” 하며 소리를 지른다.
맑은 공기를 마신 후 내는 기쁜 목소리도 아니고, 가슴이 뻥하고 뚤리는 시원함의 표현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예 있는 힘을 다하여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누구처럼 담배를 태우다가 털어낸 불씨가 차 안으로 날아들어 온 것도 아니었고, 난폭운전으로 승객을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방석을 들쳐 내더니 용케도 바늘을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본다. 뭔가 원망의 눈초리가 역력하다. 아무렴 내가 바늘을 꽂아 놓았을까마는 그래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느낌이 든다.
세상에는 부인을 어떻게 하려고 사약을 내린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던데 별의 별 생각이 지나간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니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글자 그대로 황당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른 받아보니 그것은 토막 난 바늘이었다. 옛날 집에서 양말을 깁고 헌 옷가지를 깁던 그런 바늘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이 가늘고 자그마한 쇠붙이 한 조각이 사람의 믿음을 갈라놓기도 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경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얄밉기도 하여 두고두고 생각 좀 해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자칫하다가는 정말 내가 꾸며놓은 각본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밖으로 내 던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메이드인 차이나였다.
그럼 그렇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보니 혼자서 쓴 웃음이 나온다. 우리가 땀 흘려 만든 와이셔츠 한 벌이 단 1달러에 팔려나가던 시절이 생각난 것이다. 그 당시에 어디 와이셔츠뿐이었겠는가. 넥타이와 넥타이 핀, 양말, 모자, 신발, 그리고 가발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도 모든 국민들이 손에 잡히는 것이면 열심히 일했고, 반드시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경험으로 오늘의 바늘방석은 공감이 가면서도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방석을 수출하면서 부러진 바늘을 그냥 덤으로 값도 없이 준다고 하여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1등 국민과 2등 국민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웃었다. 만약 이 바늘이 오늘 손에 잡히지 않고 엉덩이에 깊숙이 상처를 냈다고 하면 어떨까 상상만하여도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이런 점까지를 고려하여도 모두 웃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는 때문이다. 마당에서부터 안방까지 외국산이 밀려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끄집어 내 보아야 할 우리의 과거도 있다.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런 과거도 있다. 이렇게 가끔씩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우리를 되돌아보는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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