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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는 강천산

꿈꾸는 세상살이 2006. 5. 20. 23:40
 

비 맞는 강천산 /한호철


9월 6일 일요일. 강천산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9시까지 황등 면사무소 앞 광장에 모이라는 엽서가 도착한지도 벌써 한 달 이 되어갑니다. 황등초등학교 제38회 동창회에서 추진하는 가을 모임입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에 의하면 많은 양의 비가 예상되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혹시 내일은 비가 개일지 모른다고 기다려 보자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벌써 약속한 그 날이 되었습니다.

아침 6시.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세상이 아직 희미한 상태라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려는 것인지 개인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침 일찍 예배를 보고나서 아침밥을 먹고 할인점에 가서 시장도 보았습니다.

혹시 낮 동안 비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강천산에 가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약속한 9시까지 집결장소에 가기도 빠듯하였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수인사를 나누고 안정을 찾으려는 순간 요즘 식후에 먹고 있는 약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점심 한 끼 분이야 거른다고 하더라도, 아침 약부터 거르면 혹시나 병이 도지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몇 달을 고생해가며 치료해 온 병이 단 하루의 방심으로 윈 위치된다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일행에게 얘기하고 약을 가지러 집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일행이 탄 버스는 중간 경유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말입니다.

출발부터가 쉽지 않은 산행이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 옆을 지나갈 때에는 인라인 스케이트경기 참가자들을 만나서 한참을 지체하였습니다. 모악산을 지나자 가랑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옥정호에 도착하니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출발하기 전에도 말들이 많았었는데, 여기에서도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비가 오더라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강천산 문패라고 쳐다보고 가야 될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일행은 점심으로 산채 비빔밥을 사먹기로 하였고, 오가며 먹을 간식을 덤으로 준비해 온 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도 오고하여 점심시간을 놓쳐버린 일행은 때 지난 시간에 간식거리로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하얀 찰밥에 김과 김치, 그리고 안주용 홍어회가 전부인 간식을 버스 안에서 모두 먹어버린 것입니다. 차안에서 먹는 간식은 산채비빔밥보다도 더 맛이 좋았습니다. 마침 시간도 많이 지났었지만, 이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아무리 손님이라도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치가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식사를 할 만한 적당한 식당을 찾는데 실패한 원인이 더 큽니다.

아무튼 말들도 많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강천산에 가서 일기를 보고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강천산 입구에 도착하여도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내리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빗줄기는 더 굵어진 것 같습니다.

강천사 주차장에까지 오니 다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산에 올라야 한다는 의견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서 우측에 보이는 산이 강천산이고, 마주보이는 산이 산성산, 왼편에 보이는 산이 광덕산입니다. 물론 이 산들은 각기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몇 개씩 거느리고 있습니다.

원래는 위의 산들을 총칭하여 광덕산으로 통하던 산이었는데, 강천사가 점차 알려 지면서 주봉이던 강천봉이 독립된 산으로 불려 지게 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산들은 알려지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강천산은 또 다른 이름으로 용천산이라고 하는데, 마치 용이 승천하는 형상만큼이나 복잡한 계곡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서 전라남도 담양군과 경계를 가르고 있는 강천산은, 1981년 1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볼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입구의 2km 가로수는 우리나라 8대 아름다운 길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는 5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거대한 사찰 강천사가 있어 많은 유적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이 583m의 높지 않은 산인데도 8km 정도의 긴 계곡을 따라 사시사철 물이 흘러내리며, 15개나 되는 계곡에서 모인 물은 이끼도 끼지 않는 맑고 차가운 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강천산을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산을 향하고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의 말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친구들은 누군가가 말려주기를 바라며 주춤주춤 망설입니다. 맑은 날씨라 하더라도 마지못해 따라 갈 정도일 것인데, 오늘처럼 비 오는 날까지 산행을 하여야 하는 것은 부담이 따르는 모양입니다.

나도 평소에 산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낮은 산은 곧 잘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산에 가다가도 만약 비가 오면 바로 돌아서서 내려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싫은 내색도 못한 체 마지못해 따라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비가 내리고 있으니 누가 뭐래도 분위기만 맞춰주다가 잠시 후 바로 되돌아서 와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주최 측에서는 일회용 비옷을 사서 무조건 하나씩 분배 하였습니다. 얼떨결에 비옷까지 받고 보니 산행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얇은 비닐로 된 옷은 비를 피할 수 있어 좋았지만 수분증발이 안되니 금세 땀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글자 그대로 움직이는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하는 정도였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땀으로 젖었습니다. 비를 맞은 것과 다른 것은 그래도 찬 공기를 쐬지 않아 그나마 체온이 유지되는 듯하였습니다. 산에서 비를 맞으면 기온은 낮지 않은 초가을이라 하더라도, 체온이 뚝 떨어져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산행을 시작하니 우중의 강천산은 우리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에서부터 우산을 준비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집에서 입는 비옷을 준비해 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행이라는 것은 비가 온다든지 눈이 와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천산은 순창군의 군립공원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산에 몇 차례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날씨 화창한 어느 날 오후였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비 내리는 강천산에 와보니, 그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첫째는 사람 수가 적어서 혼잡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둘째는 입장객이 적으니 사람대접 받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그리고 들떠 있던 기분이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는 듯한 감정도 좋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콸콸 흐르는 물소리는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아마도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난 탓도 있을 것 입니다. 걸어가는 길 양쪽에서 폭포가 다투어 나타납니다.

강천산은 고이고이 숨겨두었던 물을 모아서 비 오는 날에만 내려 보내나 봅니다. 어쩌면 이런 날은 한사람의 방문객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물을 내리는지도 모릅니다.

입구부터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병풍바위의 폭포는 높이가 자그마치 30m도 넘습니다. 이 폭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인공폭포입니다. 그러나 속았다는 기분보다는 순전히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고맙기마저 합니다.

송음암의 폭포역시 자연으로 흐르던 물의 방향을 바꿔 만든 인공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크고 작은 폭포가 수도 없이 나타나서, 저마다 개성 있는 멋을 뽐내는 것 같습니다. 그 폭포 쇼 속으로 걸어가면서 하나하나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보이는 것마다 나름대로 심사를 거쳐 평을 합니다.

강천사 앞을 지나 홍화정 옆길로 올라가면 구름다리 쪽으로 향합니다. 높이 50m의 구름다리 아래로 보이는 강천산은 골짜기마다 구름공장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여기저기에는 각자 모양이 다른 구름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경치를 마음 놓고 감상할 수도 없습니다. 구름다리는 외줄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75m, 폭 1m의 구름다리는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빨리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길을 양보해준 대가로 모두들 정겹게 인사하며 지나갑니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사회는 금새 밝아 질 것입니다.

이 구름다리를 건너면 바로 이어지는 것은 바위언덕 길입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바위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양쪽이 모두 낭떠러지 절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언덕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바위 사이사이에 난 소나무들이 꿋꿋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몸집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지만 거센 언덕바람을 모두 맞으면서 이렇게 몇 십 년을 버텨 온 것입니다.

강천산을 찾는 데는 계절의 구분이 없습니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시원한 물, 그리고 가을에는 빨간 애기단풍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특히 눈 덮인 산하는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입니다.

그러는 순간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 비호산 그룹은 강천산 등산로 중에서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하였고, 덕분에 가장 빨리 하산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갔습니다. 

반면 애호산 그룹은 아직도 가장 높은 봉우리 쪽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애호산 그룹은 이 산이 강천산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오든 안 오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산이 있으면 좋았고, 산이 거기 있으면 오를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비호산 그룹이라 하더라도 오늘 강천산에 온 하루만큼은 모두 애호산 그룹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스스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비 오는 오늘 강천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하자고 고집을 부리던 추진 위원들에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 오는 강천산은 아름다웠습니다. 비 맞는 강천산은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강천산에 가자고 하면 그날이 비 오는 날이라고 해도 또 따라 나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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