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서 좋은 것/보고나서 생각하기

최초의 역은 이제 무인 간이역으로 남았다

꿈꾸는 세상살이 2006. 11. 6. 17:42

 

 임피역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존재하는 역사중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다.

이 역은 1912년 12월에 지어졌고 2005년에는 춘포역과 함께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임피역은 군산선에 위치한 역인데 이는 익산에서 군산으로 이어지는 철도노선을 말한다. 그 중에 한 중간역으로 임피역이 있다. 전에는 일제시대에 주변의 넓은 김제/만경 들판에서 수확한 쌀을 모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하여 군산항으로 가던 철도가 바로 군산선이다.

 

한동안 향학열과 개발붐을 타고 수요가 늘어 복선으로 하여야한다는 말도 많았고, 경전철을 설치하여야한다는 말도 많았다. 그 뒤 철도승객 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제는 하루동안 열차가 16차례 지나가는 간이역으로서 역무원이 관리하지 않는 무인역으로까지 변하고 말았다. 하루 16차례는 적지 않은 수이지만 문제는 승객의 수요다.

 

 이 역만 그런것은 아니다. 인근에도 무인역은 쉽게 볼수 있다. 나훈아가 불렀던 고향역의 주인공 황등역도 무인역이다. 이 역도 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효용가치면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물론 이런 역이 한 둘이 아니다.

 

임피역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에 아예 문짝도 없이 그냥 무사 통과다.

 

 역 구내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심어져있다. 구내에 소나무가 있는 역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도 작지 않은 크기의 나무다.

 

 나무가 몇그루 되지 않지만 그래도 다들 나이가 먹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만큼씩이나...

 

 

 방금까지도 주인의 사랑을 받았을 것 같은 화단도 살아있다.

 

 예전에는 이파리를 따서 팽이도 치고 그랬었던 화초다.

 

 역이 원체 작으니 구내에서 찍은 사진에 비친 마을 집이 관사처럼 보인다.

 

 익산에서 오산, 임피, 대야, 개정을 거치면 다음이 군산이다.

 

 

 구내에는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내가 보니 하나는 암나무, 하나는 수나무로 쌍을 이루고 있다.

은행나무의 굵기를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지는 국기게양대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고, 역을 알리는 글씨마저 가려버렸다.

천연기념물 수준은 아니지만 아마도 100년은 넘어 보인다.

 

 역에서 서족으로 가는 대야, 군산방향.

 

 동쪽으로 가는 익산방향

 

 나무가지를 피하여 바로 밑에와서야 임피라는 표식을 찾았다.

 

 

 2006년 11월 1일부터 역무원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역이라는 알림판이다.

 

 열열차표를 받는 자동 수집기.

사랑받지 못하는 수집기는 바람이 불면 그만 뒤집어 질 것만 같다.

 

 그런데 옆에있는 쓰레기통도 한 몫하고 있다.

 

 

임피역에는 열차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직 열차가 지나갈 시각도 아니지만, 제시간에 열차가 지나간다고 하여도 타고 내릴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오늘 처럼 11월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분다면 승객은 모이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건물이 파손되지나 않을지 걱정하여 창이 있던 자리는 모두 베니아판으로 덮어 놓았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 건물은 이렇게 그냥 그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임피는 우리나라 근대소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곳 중의 하나다. 당시에는 그런데로 요지였던 것의 반증이다. 그때는 소설 속에서 임피라는 이름 대신 임파읍내 또는 임파로 등장하기도 하였던 지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임피역이 다 파손되고 붕괴되어 없어지기 전에, 역사박물관에서 최초의 역으로 남아 우리네의 슬픈 과거사를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등록 문화재가 이렇게 관리되어도 상관없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른다. 임피역(1912년)이 왜 서울역(1925년)보다 먼저 지어져 그자리에 서있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변에 일인 대지주 농장이 있었고, 우리는 우리 땅을 가지고 거기서 소작을 하였고, 머리 조아리며 머슴을 살았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당시 군산항은 일제 수탈을 몸으로 지켜보던 그런 곳이었던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인근의 곡창은 그 화물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였을 것도 짐작하여 안다. 역사는 좋고 기쁜 것만 우리의 역사가 아니다. 생존은 사치보다 우선하며, 때로는 너보다 나를 우선하게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려면 거기에는 죽느냐 사느냐가 있을뿐, 그 때는 옷이 조금 더러워져도 상관이 없다. 혹은 조금 작은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으며, 따뜻하고 내 몸을 보호하여야 하여 준다는 조건이 무엇보다 더 절실한 것이다. 아니면 지금 내 편한 것을 따지다가 동북공정에 당하고, 정신대문제처럼 할 말도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속앓이를 얼마나 더 하여야할지 염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