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태우며
지난 가을에 떨어졌던 길가의 낙엽은 참으로 많은 잔재를 남겨놓았다. 잎이 무성하여 큼지막한 그늘을 만들어 줄때는 좋았었는데,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며 잎의 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바로 낙엽이 되고 말았다.
가로수로 서있는 플라타너스는 그 덩치와 이름만큼이나 큰 잎사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플라타너스의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강열한 태양마저도 감히 그를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면 길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기도 하고, 그 그늘만 따라서 걷기도 했었다.
그러한 잎들이 가을이 되자 힘을 영 못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내 퇴색되고, 줄기마저 생기를 잃더니 그만 떨어져 버렸다. 잎사귀 한 장만 가지고도 태양표 불가마를 막아주던 그 위엄이 어디가고,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는 신세로 변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잎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주워 다가 나무 밑에 쌓아놓고, 바람에 날리지 말라고 무엇으로 눌러두곤 했었다. 그러나 나의 행동이 영 시원찮아 보이던 어떤 분은 큰 대비로 쓱쓱 쓸어다가 한 무더기씩 모아 놓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가로수 플라타너스의 낙엽을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줍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그래도 나는 손으로 주워다가 나무 밑에 쌓아 두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이제 본격적인 낙엽 철이 되고, 가로수의 모든 나무들이 잎을 떨구어 내는 시간이 되면, 사실 그때는 대비로 쓸어도 쓸어도 막무가내 수준이다.
나는 그분에게 요청하기를 낙엽을 쓸어 모아 흙 속에 묻으면 좋은 거름이 될 거 아니냐고 했었다. 나무가 잎을 틔우고, 무성했다가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우리네 일생의 한 세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세대인 자식들에게 무언가 남겨주고 싶은 심정이 일듯이, 나무역시 다음 해를 위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간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분은 낙엽을 모았다가 나무 밑에 수북이 쌓아두곤 했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라도 소원해지면 그분은 다시 쓸어모은 나뭇잎을 즉시 태우곤 했었다. 나는 왜 낙엽을 태우느냐고 다시 묻지도 않았지만, 그것들을 모아놓고 갈무리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노동에 속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아마도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계셨으리라.
나무들에 있어 태우는 낙엽보다 퇴비가 되는 낙엽은 축복받은 낙엽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모자라서, 죽어서라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인간만큼이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나무들의 애절한 간청도 듣지 않고 주저 없이 태우고 또 태웠다. 그러면 낙엽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화형만은 면해 보자고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전에 죽을 수 없다고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차례 바람만 불어도 그 틈을 타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가 하면, 고요한 아침 바람기마저 없는 순간에는 자신이 뿜어내는 열기로 동료들을 꼬드겨 내몰아치곤했었다. 그런 수고에도 보람없이 도망도 가지 못하고 불에 타죽은 대부분의 나뭇잎 영혼들은 연기와 함께 하늘높이 올라갔다.
이승에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거기다가 원치 않게 불에까지 타죽던 분을 삭이지 못하여 발버둥 치던 낙엽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슬퍼하며 미친듯이 허공을 떠돌아 다녀 보아도 그들을 맞아주는 곳이 없다. 힘이 다할때까지 돌아다녀 보아도 역시 발붙일 곳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만 힘없이 주저 앉고 만다.
그때는 이미 체념하듯 조용하다. 불가마를 차단하던 여름의 무성함도, 가벼운 새옷으로 갈아입은 가을의 화려함도, 어디서나 으스럭대던 늦가을의 낙엽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말이 없다. 더 이상 자기가 내세울 게 없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고는 조용히 잦아든다.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발버둥 치던 그 기세도 없어졌고, 행여 누가 들을세라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물 위에나 돌 위에나 비탈진 언덕 잡초더미 사이에도 내려 앉는다. 심지어 자신이 의지해 왔던 나뭇가지 위에도 서슴없이 걸터앉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어떻게 무슨 일을 해보겠다는 의욕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분은 자신의 위치가 낙엽의 위치와 같다고 생각을 하셨나보다. 그분은 아침이면 낙엽을 쓸어 모아놓고 불을 지폈다. 그리고 오후에는 또 다시 낙엽을 쓸어 모았다. 그리고 또 불을 지폈다. 낙엽이 다 떨어지는 것이 먼저인지 내 힘이 달리는지 먼저인지 무언의 내기라도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낙엽이 모두 떨어지던 날 결국은 그분이 이기셨다. 그러나 내기의 결과는 모른다.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그 내기의 종류라든지 방법 등을 말해주기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은 내기가 없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손을 툭툭 털면서 빗자루를 내려 놓으셨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낙엽이 진 것은 확실해졌다.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본다. 그분은 낙엽을 쓸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을 것이라고. 자고나면 낙엽이 쌓이고 해가지면 낙엽이 뒹구는 것을 보면서, 내가 왜 저것들을 치워야 하는지, 누군가 저것들은 치워주면 안되는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불만이나 그냥 내기를 해보는 것 모두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 분은 낙엽을 쓸고, 모아서 태우고 또 태웠을 것이다. 만약 쓸어 모은 낙엽을 흙 속에 묻어두고 퇴비를 만들려고 했었더라면, 그 분은 아마 내기에서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역시 낙엽은 태우는 것이라고 고집을 피우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제 그 많던 나뭇잎도 다 떨어졌다. 그리고 한없이 떨어지던 낙엽도 다 쓸었다. 여기저기 한 두 개씩 흩날리던 낙엽들 마저 모두 한 곳에 모아졌다. 그리고는 이내 마지막 낙엽마저도 타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떨어질 낙엽도 없다. 그제야 그분도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입가에 말없는 미소를 지었다. 보아라. 내가 이겼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내가 이겼다 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한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자 더 이상 할일이 없어지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어졌다는 듯 그분도 가셨다. 혹시 마지막 낙엽을 태우시면서 벌써 예견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나무 밑 땅속에 숨겨 놓았던 낙엽들을 꺼내어 하나씩 하나씩 떨어뜨릴걸 그랬나 보다. 그러면 그분은 다시 낙엽을 쓸고, 태우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것은 바로 낙엽이라는 것은 나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거름이 되면서, 인간의 생명도 연장시키는 귀중한 잎새가 되지 않았을까 되돌아본다.
언제든 어디서든 마지막 잎새는 필요하다. 뿐만아니라 그 잎사귀는 자연보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잎사귀라야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마지막 잎새는 우리 인생에서 고비마다 항상 필요한 것임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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