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남자가 김장을 하니

꿈꾸는 세상살이 2006. 11. 19. 20:17
무김치를 담았다. 무김치는 배추김치를 먹지 않는 아내의 주식이다. 요즘 날씨로 보아 우선 무만 담그고 배추는 다음 달 초에 담을 예정이다. 배추는 원래 찬서리를 몇 번 맞고, 날씨도 추어야 제 맛이 난다고들 하였다. 우리도 그런 민간 속설을 따를 참이다.


무김치만 담그는데도 일이 많기는 매 한가지다. 가장 먼저 준비하여야 할 것은 역시 고추가루다. 국산을 고르는 것은 기본이고, 다음에 태양초인가를 따진다. 올 여름 장마로 순수 태양초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잘 아는 인척에게 예약을 해도 순 태양초로 말리기가 쉽지 않아서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늘이다. 봄부터 초여름에 수확하여 김장때까지 잘 보관하여야 하는데, 대체로 그 전에 상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밖에 여름에 수확해 둔 양파도 보관하기는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다.

이렇게 각종 부재료를 잘 다듬고 준비를 해 둠으로써 비로소 김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도 며칠 전부터 김장에 쓰일 양념재료를 준비하였다.


우리는 시내에 있는 5일장을 애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같이 장이었다. 어떤 날은 단체 손님이 오신다고 하고, 어떤 날은 아들이 일주일 휴가를 온다고 하고, 어떤 날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치과에 가야한다고, 특별한 약속이 없는가보다 하였더니 이제는 몸살이 났단다. 계속하여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을 보니 여기저기 단단히 아픈가보다.

 

나도 요즘 따라 이런저런 핑계로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는데, 그래도 매일같이 다르게 벌여놓은 좌판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선전의 감독은 마누라, 주연 아내, 주최 애들 엄마, 그리고 나는 행사 주관자이다. 마늘은 껍질을 까서 빻아 놓고, 양파도 몇 개 가져다가 곱게 갈아 즙을 내고, 냄새나는 젖국도 달여서 걸러놓고, 파도 촘촘히 썰어 두었다. 이밖에도 갖은 양념을 준비하여 한 곳에 모아 놓고 마지막 총정리를 한다. 찹쌀 죽을 끓이고 식혀서 모두 모아 섞어 놓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본선경기 치를 일만 남았다.  


항상 그랬듯이 주재료는 시골에서 준비한다. 아침 일찍 가서 다듬고 절여 놓았다가 오후가 되면 버무리고 마무리를 하였었다.

시골마당 넓은 곳에서 다듬고, 소금으로 순을 죽인 후 걸쳐 놓는다. 물기가 빠지면 평상에 놓고 둘러 앉아 버무리가 시작된다. 예전 같으면 마을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웃어가며 담그는 김장이었지만 올해는 조용하다. 배추도 없이 무만 담그니 소리 소문 없이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 본선에서는 감독이 바뀐다. 아내가 아픈 참에 주연도 바뀌었다. 앞치마를 두르자마자 양념을 함지박에 붓고 무도 부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여기저기 양념이 튀어나간다. 양팔에 힘을 주어 버무리는데 왜 허리가 아픈지 모르겠다. 한국 가사노동이 허리를 아프게 하는 그런 움직임이라던데, 1년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니 허리 아픔도 1년 치가 다 모인 것 같다.

 

멀커니 서서 쳐다보던 아내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또한 입도 바쁘다. 김장김치 맛보는 것보다 이 양념은 언제 누가 다듬은 것이고, 이것은 언제 누가 다듬은 것이란다. 그리고 오늘은 누가 김장을 한단다. 듣고 있으려니 그 끝은 간 데가 없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무김치를 나 혼자 다 먹으란다. 그러나 우리 집의 무는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다.

 

한참을 다 듣고 보니 모두가 맞는 말이다. 내가 조금만 더 보태주면 이렇게들 즐거워하는데, 그까짓 김장이 별거냐 싶다. 그러나 마늘을 다듬던 손가락이 지금도 아려온다.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는 낙엽속에 인생도 탄다  (0) 2006.11.29
낙엽과 인생  (0) 2006.11.22
도서관이 책 읽는 곳이라고?  (0) 2006.10.22
붉은 달  (0) 2006.10.18
새치기를 만들어주는 사람? 아니면 행사?  (0) 200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