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줄 수 있나요?
아들이 군에 가고 없는 방을 정보방 겸 독서실로 사용하고 있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학교 후배인데 책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기분이 좋게 들지는 않았다. 내가 책을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는 장서가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산 책에 대하여 일면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화상 전화가 아니니 송화기 건너로 표정이야 전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태연한 척하며 책을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그 친구도 책을 사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열심히 공부를 하더라도 배우고 나서 거의 덮어버릴 것이라면 구태여 사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였다. 듣고 보니 일면 공감이 간다.
다시 물어보니 바로 옆 아파트에 산단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우리 아파트의 옆에 살아가지고 나에게 전화를 하였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애써 숨기던 내 마음과는 달리 그의 말은 정 반대다. 하고많은 사람이 있어도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골라서 전화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멍한 사이에 그 친구가 도착하여 벨을 누른다. 야밤에 찾아 올 사람도 없는데 놀란 사람은 안방에 있던 아내다. 연말에 무슨 택배라도 온 것인지, 아니면 군에 간 아들 녀석에게 연말 위문품 택배라도 보낼 참이냐는 둥 질문이 많다. 그렇다고 사람을 세워놓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책 좀 달란다고 말도 못하고 그냥 후배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얼핏 들어보니 집은 익산인데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란다. 내일 저녁에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니 오늘 급하게 알아보고 있다고 하였다. 다행이도 조금 있으면 다시 익산으로 와서 근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래서 시간 나는 데로 미리미리 공부를 해 놓아야 한단다. 정작 공부는 그 친구가 할 것인데 빙긋빙긋 웃기만 하고, 무척 힘들 것이라는 중압감은 나에게 밀려온다.
내가 그 친구를 도와주는 것은 빨리 책을 가지고 가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어서 빨리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가고, 일에 대한 계획과 공부에 대한 계획을 세우도록 여우를 주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가져가는 책은 1년 후에 돌려달라고 하였으니, 어차피 생면부지에 더 있으면 뭐하랴 하는 생각도 든다. 가져 온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으니 가득 차고도 남는 책이 한 아름이다. 책을 가져가는 그가 미안해 할까봐 이렇게 작은 가방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트집도 잡아본다. 들고 가기야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울타리 밖에 있는 바로 옆 아파트이니 어떻게 가면 못갈까 싶다.
그가 떠난 방을 둘러보던 아내는 일부를 왜 남겨놓았느냐고 묻는다. 앞으로 1년이 더 있어야 배울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지만 그래도 미리 주면 안 되냐는 답변이다. 어차피 언제 주어도 줄 책이면 기분 좋게 빨리 줄 것이지 왜 뜸을 들이냐고 따진다. 듣고 보니 내 생각이 짧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아내는 책을 나누어주는 것보다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데 더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요즘 각종 문예지나 문학서적들이 부쩍 늘어났고, 최근 2년간은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던 집답게 어수선하다. 방바닥에는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하고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는 책들이 쌓여있다.
나도 그 말마따나 다시 서가를 정리하여야겠다. 필요 없는 것은 버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나누어도 주어야겠다. 아내가 방을 정리하듯이 나는 내 마음을 가지런히 정돈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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