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빵과 사람들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날 호호거리며 먹는 호떡은 잠시 먹는 동안이나마 추위를 잊게 해준다. 호떡을 반원으로 접어서 한 입 베어 물면 속에서는 노란 설탕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이는 꿀맛에 비교할 만하다. 또 호빵을 먹을라치면 단팥 앙꼬가 비시시 속살을 내놓지만 이것을 섣불리 먹었다가는 너무나 뜨거워서 입안이 모두 댈 정도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종류가 같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고작해야 밀가루 반죽에다가 가운데 팥을 넣고, 기름에 혹은 그냥 쪄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 간식은 팥이라는 앙꼬가 많은 영양가를 지니고 있어서, 오랫동안 꾸준하게 애용되고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팥을 앙꼬로 한 또 다른 간식은 예전의 국화빵과 요즘의 붕어빵이 있다. 이 둘도 사실은 한가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재료나 조리하는 방식도 똑 같고 다만 형태가 어떤 모양이냐에 따른 분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세하여 최근에는 잉어빵도 등장하였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통틀어 격조 낮은 용어로 풀빵이라고 부른다.
가정에서 풀을 쑬 때에 밀가루에 물을 넣고 그냥 끓이는 것이 이 빵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풀빵은 비교적 가격도 저렴하고, 영양은 그런대로 밀가루와 앙꼬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양호한 편이다. 더하여 이 풀빵은 구하기 쉬우면서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간식다운 간식에 속한다.
아파트 입구의 풀빵기계 옆에는 언제나 동네 꼬마들이 서너 명씩 쭈그리고 앉아서 풀빵을 기다리거나 먹거나 하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이것이 진정 빵 맛보다도 사람 사는 맛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빵들은 그에 비추어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름은 붕어빵이나 잉어빵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붕어나 잉어가 지나 간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밀가루 풀빵 속에는 그런 것들이 안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어떻게 보면 소비자를 우롱하는 상술인 것에 화가 치민다.
그래도 우리들은 이 풀빵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풀빵은 이 정도로써 바라는 기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될 성싶다. 풀빵의 반죽이 되다든지 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풀빵의 모양을 달리하여 새로운 용가리빵이라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팥을 싫어하는 풀빵장수가 팥 대신에 녹두를 갈아 넣고 그냥 풀빵이라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문제 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특화된 전략의 일환으로 겨우 국화잎 하나를 넣고는 진짜 국화빵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뜨거운 앙꼬에 입천장을 데지 말라고 이쑤시개로 바람구멍을 하나 내놓고는 앙꼬를 식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는 이것이 바로 소비자의 건강을 위한 진짜표 웰빙 찐빵이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출발은 장삿속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오히려 소비자를 생각하는 고마운 마음의 배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국화잎을 먹으니 국화빵이고, 먹다가 화상을 입지 않으니 웰빙은 웰빙인 것이다.
형상이 다른 것으로는 손으로 빚기 어려운 송편대신, 둥글둥글 대충 말아도 되는 것이 있으니 바람떡이 그것이다. 이런 예들은 마치 송편에서 참깨와 돔부를 넣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의 상식수준이다. 그러나 요즘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된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기억에서도 멀어져 가는 고름우유 사건이 있었다. 원유를 생산하는 젖소의 유방에서 고름이 나왔는데, 그 소를 별 다른 조치 없이 보통의 소들과 같이 관리하고, 또 그들의 우유를 같이 유통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우유에 대한 이미지가 실추된 적이 있었다. 이는 우유의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대국민 식품에 대한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위생에 관한 것이었기에 문제가 컸었다. 그 후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절차가 이루어 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고름우유에 대한 보도 내용이 일부 업체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사실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하나, 라면에 사용된 공업용 우지사건이다. 이것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나 대부분 사람들은 기억에서조차 잊혀지고 있을 내용이다. 공장에서 화학적 반응으로 물품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기름을 수입해서 사용하는데 이것이 공업용 우지다. 이것을 응고된 상태로 수입하여 적합한 가공처리를 한 후, 라면을 제조할 때 밀가루에 섞어 정상적인 식용기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의 공업용 우지가 우리의 식용기준에 부족함이 없고, 게다가 위생적으로 가공처리를 하였기 때문에 인체에는 무해하고 나쁜 영향을 안 미친다는 해명이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작년 여름에는 만두소가 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만두 속에 넣는 앙꼬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 앙꼬를 쓰레기 소라고 불렀고, 이 소를 넣어 만든 만두는 쓰레기소 만두라고 불렀다. 줄이면 쓰레기 만두다.
보통 만두소는 야채를 넣는 야채만두와 잡채를 넣는 잡채만두, 약간의 다진 고기를 넣는 고기만두 등이 있다. 이번의 문제는 주로 야채에서 생겼다. 유통기한이 지난 야채를 사용한 것인데, 사실 상태가 너무나 불량하여 상하고 부패된 상태의 소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두 속에 들어가는 기름이 불결하다고 믿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내용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다면 결국은 소비자에게서 외면당하고 만다. 쓰레기를 사서 먹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나중에 안 일지만 불량 음식물을 가지고 사업을 하여 번 돈이 14억원이라고 할 때, 단속에 걸려 내야 하는 벌금은 64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런 상태에서 업자의 양심이 아닌 단속의 벌금이나 제재조치로는 불량식품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식품업을 허가해 준 후 관리감독이 허술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한 해 동안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적발된 업소가 4891개에서 형사 고발된 경우는 겨우 5.6%에 그쳤다고 한다. 이러니 법을 쉽게 어기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것도 아닌 먹는 것인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의 상식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수입산 소금을 국산이라고 쓰여 진 포대에 담으면 국산소금이 되며, 하얀 백조기에 노란 물을 들이면 참조기가 된다.
고추를 빻을 때 붉은 색 물을 들인 줄기 일부를 섞으면 양도 많아지고 먹음직스럽고 고운 고춧가루가 된다. 손님이 먹다 버린 마늘도 다시 씻어 놓으면 새로 썰어놓은 것 같은 마늘로 변한다. 심지어 버려진 김치는 다시 건져서 김치 국물에 담그면 새로 꺼낸 김치가 되는 형편이다.
불에 익히고 조리고 기름에 튀기며 볶는 제품에 들어가는 재료는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없다. 안전을 위하는 기한이 지나면 그것을 지우고 필요한 만큼 기한을 늘리면 되는 것이다. 음식에 관련된 바퀴벌레나 쥐, 파리 등에 의한 위생관념도 없다. 강력한 불에 익히면 세균이 모두 죽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따지지 말고 그냥 믿고 먹으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일들이 연일 매스컴에 적발 보도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가족에게는 그런 음식을 먹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나의 직업에 손님이 되며, 나는 다른 사람의 손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복잡한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 도움을 받고 어느 한쪽이 계속하여 손해를 본다면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은 옳은 경쟁이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나의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이 되는 것은 모두 알고 있듯이 내가 나서서 옳은 경쟁, 선의의 경쟁을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위해서는 모바일 폰을 사용해서라도 부정시험을 치러야 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논술도 잘해야 하고, 특기도 달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남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가용을 사더라도 일부러 남보다 큰 차를 사서 과시해야하며, 남이 집을 사면 나도 사야 되는데, 임대주택은 안 되고 반드시 분양주택을 사야하는 논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세이다.
이러한 의도는 처음부터 남보다 일찍 출발하여 결승점에 먼저 닿으면 된다는 사고를 유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고상한 척하며 지킬 것 다 지키고 남을 생각하여 행동하면, 어떻게 그 사람을 앞서 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깔려있다. 국민 개개인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속에는 잉어가 없는 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기가 파는 빵은 잉어빵이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먹을 수 없는 내용물로 만들었어도 참기름 몇 방울로 맛을 감추면서 맛있는 만두라고 선전하고 있다. 뼈 국물을 우려내면서 분유를 넣어두고는 고소하고 틉틉한 맛이 일품이라고 최고로 친다.
우리는 지금 국민 불특정 다수에 대하여 이렇게 경쟁하도록 유도하면서 국화빵 인생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겉모양과 목적하는 바가 오로지 한 방향 부와 명예로 치우쳐 있는 국화빵인생에 대해서 말이다. 국화빵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는 형태가 국화모양이라는데 있지만, 지금은 각자의 능력이나 소질을 살려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하여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행동하는 모양을 일컫는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있다. 자기가 만든 음식은 손님들에게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이 먹지 왜 그러냐고 하면 자신은 매일 먹기 때문에 이제는 질려서 쳐다보기도 싫단다. 아마도 그 말은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는데 쉽게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쳐다보기도 싫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기들이 먹을 때는 손가락 하나에 컵 하나씩을 끼워 양손에 여덟 개나 열 개의 컵을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자기들이 먹는 반찬은 같은 냉장고에서 꺼내더라도 따로 보관해 놓은 음식을 먹는 것이다. 손님들을 잘 대우한다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준 손으로 자기가 먹을 음식을 꺼내지는 않는다. 이것은 혹시 나와 상관된 일은 확실하고 안전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일은 잘 모르겠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든 음식점의 예라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많은 식당 중 극히 적은 일부의 경우일 것임도 믿는다.
이 국화빵 인생도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말 한대로 우리의 주변에서 우리를 대변해주고 쉽게 접하며,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좋은 친구의 역할인 것이다. 세상을 너그럽게 살면서 자기중심의 삶에서 나를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남을 이용하는 국화빵이 아니라, 국화성분이 들어있지 않아도 어느 누가 탓하지 않는 나와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본래의 국화빵이 필요한 것이다.
어려운 시절 우리 곁에서 항상 위로해주며 우리의 생명을 이어준 국화빵의 이름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국화빵보다 나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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