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국보 289호
명 칭 : 익산왕궁리5층석탑 (益山王宮里五層石塔)
분 류 : 석탑
수 량 : 1기
지정일 : 1997.01.01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
시 대 : 고려시대
관리자 : 익산시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시 왕궁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되어있으며,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을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는데, 그 증거로 이 탑 밑부분에서 흔적이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익산시 왕궁면의 남쪽지방 길가에 언덕을 이루고 있는 대지(臺地)가 있는데, 예로부터 왕궁지< 王宮址 >라고 일컬어 왔다. 이곳에 서 있는 5층석탑이 "익산 읍지(益山 邑誌)" 중의 금마지( 金馬誌)에 「왕궁탑재궁허전고십장루석완연속전마한시소조(王宮塔在宮墟前高十丈累石宛然俗傳馬韓時所造)」라고 기록되어 있는 탑이다.
몇해 전까지 기단부가 파묻혀 있어 토단(土壇)처럼 되어 있었으나,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원형이 복원되었다.
발굴에 의하면, 탑기(塔基)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不等邊 高柱形) 주춧돌이 놓이고, 이 우주석(隅柱石)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으며, 우주석이 1층 옥신(屋身)의 우석(隅石)을 받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서 갑석(申石)·면석(面石)들의 부서진 돌이 많이 발견되어, 각 면에 탱주(撑柱) 2개씩이 있는 단층 정4각형 기단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부서졌기 때문에 일부를 보강하는 한편, 토단(土壇)을 쌓아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옥개석(屋蓋石)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4우석(隅石)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中間石)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4면이 각 면 한돌씩이고, 3층 이상은 2개씩의 돌로 되어 각각 우주형(隅柱形)이 표시되어 있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나 등분(等分)되지는 않았다. 개석(蓋石)은 1층부터 3층까지 8개의 돌로 되고, 4·5층은 4개이다. 추녀는 얇고 추녀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있다.
옥상(屋上)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곡률(反轉曲率)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딴 돌을 끼워 놓았다.
이 탑에서는 보수 때에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탑신부에서는 정4각형 돌에 좌우로 2개의 네모 구멍을 뚫고 유개금동함(有蓋金銅函)을 각각 장치(藏置)했었다고 한다.
동쪽 금동함(金銅函) 안에는 금제유개방합(金製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연봉오리형 마개를 갖춘 녹색의 장두원저병(長頭圓底甁)이 있었다고 한다. 서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절첩식 금구(折帖式 金具)로 연결되고 금대(金帶) 2줄로 묶은 순금판경(純金板經)이 있었다고 한다.
기단에서는 품자형사리공(品字形舍利孔)이 있는 정4각형 심초석(心礎石)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서는 광배(光背)·대좌(臺座)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1구(軀)와 청동령(靑銅鈴) 1개가 발견되었다.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당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왕궁리 유적
익산시 왕궁면은 마한 시대의 도읍지, 또한 백제 무왕이 천도를 계획했다고 전해지는 중요한 지역이다. 왕궁리란 지명 외에 왕궁평(王宮坪), 왕궁성(王宮城)이라는 이름도 전해 온다.
부여 문화재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발굴한 결과 현재 5층 석탑이 남아 있는 지역 너머 구릉 지대에서는 긴 장방형의 성터가 확인되었는데, 백제 시대 말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개의 건물지와 백제 기와 가마도 발견되었다.
발굴중인 지역 중 5층 석탑 주변에서는 관궁사(官宮寺)라는 사찰명이 적힌 명문와가 발견되어 절터임이 입증되기도 했다. 사적 제408호이다.
기단
탑의 기단은 마치 목탑처럼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기 위하여 장대석을 올려 놓았다. 그 위에 1층 탑신을 올렸는데, 기단의 기둥 중심에는 커다란 심초석(心礎石)이 놓여 있었고, 심초석 상면에는 세 개의 사리공(舍利孔)이 있었다.
탑신
왕궁리 5층석탑의 탑신은 신라의 석탑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탑들은 1개의 돌로 구성된 탑신이 많지만 왕궁리 탑은 탑신의 돌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1층의 탑신은 귓기둥을 조각한 4개의 모서리돌과 탱주가 조각된 8장의 돌로 구성되어 다소 복잡하다. 2층 탑신은 4면이 1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3층 이상은 2매로 되어 있고 각각 귓기둥이 조각된 모습이다. 탑의 추녀는 얇고 수평을 이루고 있으나 끝에서 약간의 반전을 주고 있다.
1층 옥개석 사리공
1층 옥개석(屋蓋石) 윗면 중앙에 장치된 4각형의 돌에 2개의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이 사각형의 돌은 백제 시대 초석으로 사용되었던 돌로 2개의 홈을 파고 사리공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는 2개의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상륜부
이 탑의 상륜부는 구성 요소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다. 현재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이 남아 있는데, 상륜을 이루는 하부는 대략 갖추고 있으나 상부는 없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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