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밝다
달이 밝다. 엊그제 보름달 이던 것이 오늘도 찾아와 거실 안을 살피고 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낙도 없이 들어오고는 지금은 편안이 누워있다. 혹여 겨울의 굴욕이 꽃샘이라도 할까봐 꽁꽁 잠가놓았건만 용케도 들어왔다. 지난 밤 흔들어 애원하던 비바람은 간데없고 달빛만 가득하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니 세상이 고요하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가. 그 거리에 달이 혼자 서 있다.
고운 저 달은 어디서 왔을까 누구랑 왔을까 생각해본다. 포동한 저 달은 어떻게 왔을까 무엇을 가져왔을까 생각해본다. 차가운 저 달은 언제 돌아갈까 생각해본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려도 달은 대답도 없이 혼자 거리를 지키고 있다. 달은 커다란 날개를 펴 보이는 곳 끝까지 모두를 덮고 있었다.
거실에 들어온 달의 분깃하나가 상자를 열어준다. 그 속에는 상자 밖에 있는 세상과 같은 또 하나의 세상이 들어있다. 어떤 곳에는 눈이 내리고, 어떤 곳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기처럼 달이 밝게 비추는 곳도 있지만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곳도 있다. 그 중에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 눈에 뜨인다.
주위는 고요하다. 마치 성탄절의 고요한 밤과 같다. 외진 곳 덤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지붕도 없는 집이다. 그렇다고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집이 아니고 바로 바람의 집이다.
달은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가끔씩 날개 짓을 해댄다. 그때마다 하얀 소금들이 뿌려진다. 큼지막한 고등어의 등이며 가슴이며 사정없이 쳐댄 그 위로 내려 쌓인다. 째진 살점사이로 짠물이 스며든다.
드러난 맨살이 쓰리다. 그 위에 한 줄기 바람이 핥고 지나간다. 쓰리고 아리던 몸뚱이는 이제 감각을 잃어버렸다. 철썩! 하더니 다시 바닷물이 덮친다. 짠물은 찢어진 상채기를 더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바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창밖에는 아직도 움직임이 없다. 달빛을 상대하고 있는 것은 길 건너 정원의 배꽃뿐이다. 그러나 꽃잎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던 얼음 알갱이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 한 몸 지탱하기도 힘이 든다. 탱탱하던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그 모습이 가오리연의 꼬리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과 흡사하다. 떨어진 꽃잎은 싸락눈과 함께 범벅이 되어 둘을 가를 수도 없다. 그 위에 하얀 달빛이 쏟아지고 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많지도 않은 잎들을 모아 주워 담더니 구멍 뚫린 낡은 담벼락에 내동댕이를 친다.
찢기고 젖은 몸이 견디다 못해 신음소리를 낸다. 괴로움과 서러움이 점철된 몸뚱아리가 내는 소리이건만 처절함에 목이 메여 멀리 가지도 못한다. 그 위에 또 한 퀘의 꽃잎이 쌓이고 신음소리가 보태진다. 그러나 어느 누가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다.
분깃은 상자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다림에 지친 달이 분신들을 거두어들이나 보다. 거실에 걸친 빛이 이제 창밖으로 기어가고 있다. 내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허우적거려 막아도 피해 나간다. 테이프로 발라놓은 문틈 사이로 어느새 빠져나가 버렸다.
나도 따라서 일어서는데 중심을 가눌 수가 없다. 강박에 의한 현기증이다. 나는 저 달을 따라 가야만 한다. 이대로 쓰러지면 아들을 만날 수가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바람만 사는 곳은 주소도 없고 아는 이도 없다. 나는 저 달을 따라가야만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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