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쐬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따져보면 소주를 마셔서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퇴근시간에 기분이 좋아서 마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주량이 세서 보통 2병씩은 마셨지만, 나는 1병이면 족하다. 그래서 오늘도 소주 한 병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장단에 맞춰 흔들리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길 잃은 강아지모양 방황하기도 하는 것이 마치 호랑나비가 춤을 추듯하였다.
나도 적당히 취하여 기분이 알딸딸하는가 하면, 제정신이 들기도 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고, 모두가 합리적이었다. 아직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왜 이리 마눌이 보고 싶은지 걸음을 재촉해본다. 시계는 어째서 그렇게 빨리도 뛰어가는지 얄미워진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이것저것 따지면서 차 안에 있는 물건들을 괜히 들었다 놓았다 하던 때와는 다르게 그냥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현관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는 금방 떠나 벌써 3층을 지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언제 25층까지 올랐다가 내려올지 답답하기만 하였다. 마치 초보운전자가 시내를 첫 주행하는 듯 더디기만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굼벵이야 느림보야 하는 생각이 들 즈음, 탈 사람도 없는데 각 정류장마다 들르는 시내버스와 같다는 생각이 드니 왕짜증이다.
쿵쿵쿵쿵 나는 어느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계단이 내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어제 저녁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던 것처럼, 나는 그저 가만이 있는데 모든 것이 다 알아서 움직여 주었다.
평소 독한 마음먹고도 걸어서 오르기 힘들었지만 소주 한 병을 마신 나는 소리만 요란할 뿐 터덕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발 한발 올리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드는지 신발이 이처럼 무겁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심장은 어찌 그리 사납게 요동치는지, 마눌의 손목을 처음 잡던 날보다 더 가쁘게 몰아쳤다. 이러다가 20층은 고사하고 10층도 못 올라가서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방금까지 기분좋게 마시던 술은 모두 땀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는 힘이 빠지면서 비비 꼬이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걸어서 올라온 것이 아까웠지만 할 수없이 기도를 하면서 구원요청을 하였다.
몸은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정확하게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오름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내 앞에 입을 벌린다. 희미해져 가던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니 기계 이마에는 계급장이라도 되는 양 3이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누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얼른 올라탔다. 그러고보니 내가 열심히 걸어 온 것보다 말도 못하는 기계가 훨씬 빠르고 조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다리에 힘도 들지 않고, 숨도 가쁘지 않으며 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계가 저 혼자서 멈춰 섰다. 어째서 이렇게 좋은 하인을 두고 땀을 뻘뻘 흘렸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주춤거렸을 뿐이다. 그 순간에 누구를 욕할 시간도 없었고, 술은 가장 적게 마신 내가 왜 술값을 내야 했는지 생각도 할 겨를도 없었다.
딩동 하면서 문이 열리자, 나는 요때다 하고 갑갑하던 상자 속을 벗어났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 눈에 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문패를 알리는 숫자며, 웅성대는 사람들 하며 모두 낯이 익었다. 마눌 찾아 가야 한다고,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나는 벌써 그곳에 와 있었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나라로 데려다 주는 요술의 번호를 누르지도 않았는데 용케도 알아보는 기계였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심방 온 교인들이었다. 마침 돌아가려고 문을 나선 참이었고, 집 안에서 미어져 나오는 시원한 기운은 정신이 확 돌아오게 하였다. 대충 사태를 파악해보니 오늘이 구역예배를 보는 날이었고, 우리 집에서 본 것이었다.
에구~ 1초만 더 운동을 할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물동이는 이미 엎어진 뒤였다. 찬바람이 후끈해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니 비로소 사람들의 얼굴도 드러났다.
앞 동에 사는 김모씨, 지난 주 처음 만난 이모씨 등등, 그리고 맨 뒤에 서 계신 목사님까지 알아 볼 정도가 되었다.
‘아니, 목사님이 여기 웬일이십니까?’
‘예? 여기요? 저야 뭐, 예배드리러 왔지요.’
‘아! 예배요? 근데 벌써 가셔요?’
‘예. 예배가 끝났으니 가야지요. 다른데 가봐야 할 곳도 있고요.’
‘그러세요. 그래도 저는 이제 왔는데 소주라고 한 잔 하고 가셔야지요. 그냥 가시면 서운하잖아요.’
‘예? 소주요?’
‘예, 저 오늘 조금밖에 안 마셨거든요. 딱 한 병... 여기까지 오셨으면 이렇게 서 계실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셔야지요. 여보! 어서 모시고 와.’
‘예, 어서 드시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연이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공손하면서도 그러나 딱딱한 음성을 가진 여성목소리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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