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소설, 꽁트, 동화

내가 거기 있었을 때

꿈꾸는 세상살이 2009. 2. 20. 21:27

내가 거기 있었을 때

                                           한호철


 

“내가 거기 있었을 때 당신은 뭐 했어?”

“뭐하긴. 몰라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어. 알고 싶단 말이야”

“그것은 내가 얘기했잖아”

“뭐라고 했는데...”

“뭐긴 뭐야. 벌써 15년도 넘은 얘긴데 나도 다 기억 못해”

“그래도 얘기 해봐. 뭐 하고 있었는지”

계속되는 아내의 질문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기억을 되살리다는 것은 그 날 15년 전을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작년에 얘기했던 말을 기억하여 똑같이 대답해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 날은 내가 술 마시러 시내에 갔었잖아”

“언제?”

“언제긴. 그 날 일마치고 동료들과 같이 바로 갔는데”

“그럼 대낮부터 술집에 갔었단 말이야?”

“대낮이면 어때 술집에 가면 들어서는 순간 깜깜한 밤이 되는데”

“그래? 시내에 있는 술집이라면서 직장과 술집이 되게 멀기도 하네”

“멀기는 뭐가 멀어. 자그만 시내가 멀어봤자 10리, 20리인데 버스로 가도 20분이면 족하지

“술 먹으러 가시는 분들이 잘도 버스 타고 갔겠다”

“누가 버스타고 갔대. 그냥 그 정도 거리라고 했지”

“근데 왜 그렇게 해진 후 어두워서 도착하는 거야? 중간에 어디를 들러서 누구랑 놀다 갔는데? 집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기다리는 각시 생각은 안 하고, 어디를 누구랑 대낮에 활보하고 다녔냐 말이야. 백화점? 시장 먹거리?...”

“나도 얘기 좀 하자. 누가 쇼핑하러 다녔대?”

“그럼 뭐야, 어디 조용하고 으슥한 유원지라도 놀러 갔단 말이야? 빨리 말해봐”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벌써 몇 번째냐. 그게 아니라 곧바로 술집으로 갔다고 얘기한 것이. 14년간 얘기했으면 이제 알아들을 때도 됐잖아, 그냥 그렇게 믿어주면 안돼? 제발 이제 남편 말 좀 믿어라, 그냥그냥 대충 넘어가자”

“대충 좋아하네. 애들 크면 다 얘기해 줄거야. 빨리 사실대로 애기하란 말이야. 내가 알아 듣고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 봐.”

“여보. 나도 말 못할 사연도 있지 않겠어? 그냥 믿어 주라.”

이 얘기도 벌써 15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아내는 뭐가 더 알아내고 싶은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설령 내가 잘못했다고 치자. 그래도 애들한테 그 얘길 해서 어쩌자는 것이야. 내 체면도 조금은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안되지. 안 되고말고.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도 못 봤어?”

“그래 못 봤다. 내가 언제 텔레비전 볼 시간이나 있냐?”

“내가 술 좀 안 마시고 맨 정신으로 들어오는 날도 텔레비전은 맨 날 당신 차지잖아. 연속극이다, 노래자랑이다, 건강코너다, 주식교육이다 뭐 나에게 리모콘을 줘 보기나 했냐?”

“당신은 어쩌다 한 두 번 보는 것이지만 나는 매일 보잖아. 그러니까 줄거리가 이어지면 재미있단 말이야. 요즘 나오는 연속극은 얼마나 재미 좋다고.”

“뭔 내용이 그리 좋든?”

“몰라서 물어? 요즘 여자들 기펴고 사는 것 보면 내 속이 다 후련하더라. 매 맞고 사는 이도 없고, 술 안 마시는 여자 없고, 시어머니 모시는 여자도 없더라”

“그래서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

“누가 자랑이래? ”

“그럼 뭐야. 왜 그런 걸 나한테 얘기하냔 말이야. 내가 당신을 때리기를 하나,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나, 당신 술 마시는 걸 반대를 하나, 당신하고 뭔가 맞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 시집하고도 떨어져 살고 있고,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 비교 할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네. 얘기가 왜 이렇게 됐지?”

“왜는 왜야 다 당신 탓이지.”

“뭐가 내 탓이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내용 탓이지”

“그래 그것이 문제란 말이야.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당신이 다 맞다고 생각하니까 내 말이 다 틀린 것처럼 생각 되는 거란 말이다. 특히 분만실에 남편이 같이 가서 출산고통을 나누는 것은 다 각본에 의한 연출이란 걸 몰라?”

“아무리 연출이고 감독이고 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이 그 날 어디에 갔었는지는 밝혀야 되고, 그 날 잘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야 돼”

“보상이라니 남편과 아내 사이에 보상이 어딨어. 보상이라면 이혼하면서 위자료가 보상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금 그런 얘기야?”

“이혼? 지금 이혼하자는 거야? 뭐 그러면 누가 겁날 줄 알고?”

“뭐, 뭐, 누가 이혼하자고 했어? 괜히 트집 잡지 말라고.”

“당신이 분명히 그랬잖아 이혼 어쩌고저쩌고, 위자료는 충분히 준다고 하면서. 그러면 여자는 겁낼 것 없지. 과부 3년이면 쌀이 석 섬이고 홀애비 3년이면 이가 서 말이라고 하는 말 알지?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알지?”

이쯤 되면 체면을 살리기 위한 방법도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조금 더 계속되면 뭔가 좋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뒤로 물러설 수밖에는 묘안이 없다.

“지금껏 참고 살아 주니까 이제 배가 좀 부른 모양이지? 이혼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시고. 애들 때문에 참고 살아 왔지만 이제 애들이 중학교만 졸업하면 마무리 짓자고. 그만 끝내잔 말이야”

“......”

“내가 지금껏 참으면서 차마 먼저 꺼내기 힘든 말을 그쪽에서 먼저 꺼내주니 참 속이 다  시원하네. 오랜만에 옳은 말 한번 했어...”

“......”

도무지 대화를 이어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그 때 얘기에 거짓말을 보태서라도 더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보 사실은 말이야. 그 날 내가 술집으로 바로 갔는데 밖에는 대낮이지만 술집 문턱만 넘어서면 거기는 바로 깜깜한 밤이거든. 그것은 그 술집의 불빛 조명이 그렇다는 얘기야”

“그럼 룸살롱이야?”

“......”

“그런거야? 왜 술집이 어둡냐 말이야. 요 슈퍼 술집은 밖에서도 안이 다 들여다보이던데...”

“여보. 그게 술집이냐? 그냥 편의점이지...”

“그래도 거기서 소주 먹고 맥주 먹고, 양주도 먹던데? 여자도 있고”

“여자는 무슨 여자. 그 여자는 바로 편의점 주인이야”

“그럼 주인이 퍼질러 앉아서 같이 술 마시고 죽쳐? 장사도 안하고?”

“그게 바로 장사야. 과자 부스러기 팔아 봤자 얼마나 남는다고. 술 한병 팔면 그 보다 훨씬 나은데. 거기다 자기는 공짜로 술 마시고 매상 올리고. 얼마나 기막힌 장사냐”

“그럼 나보고 그런 장사하란 얘기야?”

“아니, 누가 그러래?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그럼 뭐야. 그런 편의점도 아니고 룸살롱도 아니고 뭐가 어쨓다는 거야. 빨리 말해봐”

“사실은 말이야 보통 술집인데 그곳이 그냥 지하였을 뿐이라고. 거기서 마시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좀 지나쳤을 뿐이라고.”

“그럼 그걸 내가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안 믿겠지”

“그럼 계속해봐”

“그래서 늦게까지 취할 때까지 마신거야”

“그래서 어쨓다고. 어쨓다고?

”여보. 꼭 끝까지 얘기해야 돼?“

“뭐 말 못할 것이라도 있어? 그럼 관두고”

“여보 꼭 얘기해야 돼? 당신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은건데”

“그러니까 그만 두라고. 살인사건도 10년이면 시효가 지난다는데, 당신은 15년이나 지나도 아직도야? 하긴 숨겨 논 자식은 죽을 때까지도 해결하기 힘들겠지”

“왜 그런 말을 해. 누가 숨겨 놓은 자식이 있다고.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생사람 잡겠다”

“그래 더 이상 묻지 않을테니 맘대로 해. 그 대신 찍으면 되잖아”

“할 수 없다. 얘기해 줄게. 그날 말이야 네 명이서 술집에 갔는데 다들 많이 마셨거든. 그리고 세 명은 집으로 갔어. 많이 마셨어도 잠만은 집에서 자야 된다고 통금시간이 훨씬 지나고 곧 통금 해제시간이 됐지만 택시타고 골목길로 가면 된다면서 그러고 갔어”

“당신은”

“나도 같이 집으로 왔지. 그런데 당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저기 찾아보다가 바로 회사로 간 거야”

“집에서는 새파란 각시가 없어졌는데 회사로 가?”

“그랬어. 너무나 술에 취해 있었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나지 않고 아침에 출근 할 생각이 걱정되더라고. 지금 자면 각시도 없는데 누가 깨워줄 사람도 없고, 혼자 일어나기는 더 어려우니 말이야. 그래서 할 수 없이 회사에 가서 아침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생각한거야”

“소설 쓰고 있네”

“아니야 진짜란 말이야.”

“그래서. 마누라는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피 흘리고 쓰러졌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무실에 있었다는데 나보고 그 걸 믿으라고?”

“믿어야지. 정말이니 믿어야 할 수 밖에 없잖아”

“계속해 봐”

“그래. 그래서 집으로 간 3명은 그 날 회사 결근했거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출근했어도 술에 취해 일이 제대로 안 되었을거야. 그러니 미리 알고 출근을 안 한거지. 아예 처음부터 출근할 의사가 없었다고 봐야지”

“그런 당신은 회사에 충신이네. 각시는 길바닥에서 죽든 말든 회사에 가고”

“누가 알았나? 그냥 옆집에서 자는 줄 알고 회사에 간 거지”

“그러면 누가 회사에서 알아나 준데? 각시보다 회사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사장이 알아나 주더냐고?”

“바로 그 대목인데 사실은 회사에서는 알아줬어.”

“뭐? 어떻게 알아. 당신이 각시는 죽든 말든 회사에 나왔다고 알아 달라고 소문 낸 거야?”

“아니. 아무리그래도 내가 내 입으로 그럴 수는 없지”

“그럼 누구를 사서 그렇게 소문내라고 시켰어?”

“그런게 아니고, 그 날 새벽에 회사로 바로 가서 일직 출근한거야. 원래 비상키를 숨겨 놓는 곳이 있거든. 우리 직원들만 아는 곳에 예비로 숨겨 놓은 그 키로 열고 들어갔는데, 도대체 술 취한 새벽에 무슨 할 일이 있어야지. 그래서 찬물로 세수도 하고 괜히 닦고 난 수건에 물 묻혀서 책상을 닦고, 책도 바로 세워서 책꽂이에 꽂아 두고 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때 사장이 불시 암행감사를 실시한 거야. 순찰을 돌다가 그 시간에 불켜진 사무실이 보이니까, 도둑이라도 든 줄 알고 몽둥이 들고 살금살금 다가와서 창문 너머로 살며시 확인을 했데. 그때 나를 본 거야”

“정말? 사장이 보기는 봤대? 무슨 사장이 새벽 4시에 순찰을 도냐? 소설쓰지 마라”

“소설이라도 거짓이 아닌 사실을 적으면 되잖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냥 그런 거지”

“그래서?”

“그때 내가 갑자기 과장 진급 한 거 있잖아. 그것이 바로 사장이 감동 먹었다는 증거지. 더 이상 뭘 알고 싶어”

“하긴, 그때가 진급시기는 아니지. 우리 애가 8월에 태어났으니.”

“맞지? 바로 그렇게 된 거야. 이젠 믿을 수 있지?”

“믿긴 뭘 믿어? 그래도 숨겨 놓은 거 마저 얘기해 봐.”

“그게 사실이라니까?”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소설 짓느라고 시간 걸린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애한테 미안해서지. 내가 실력으로는 진급하지 못하고 자기를 팔아서 진급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나한테 미안할 것 없어. 애한테 미안했으면 미안했지”

“그러니까, 애 팔 휘어진 거 하고 알랑한 내 진급하고 바꾼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말 못했던 거지. 이것도 정말이다”

“.....”

“그런데 당신 눈가에 뭐야”

“응. 갑자기 눈에 티가 들어 갔나봐”

“거짓말, 선풍기도 안 틀어 놓은 방안에서 왜 갑자기 눈에 티가 들어 가냐?”

“하여튼. 뭐가 들어갔다니까 그러네...”

“그래. 뭐가 들어갔겠지. 나도 그 말 믿고 싶어. 그런데 정말로 이런 말을 당신에게 사실대로 해 줄 자신이 없었어, 그것뿐이야...”

“그 날 밤 나는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통행금지시간이 다 되어도 당신은 안 오고 배는 아파오는데,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나 삐삐가 있나, 집에 유선 전화도 없을 때인데. 지금처럼 119제도도 없는데 어떡해. 그냥 혼자서 기다시피해서 걸어갔지. 그러다 쓰러진 거야. 그리고 끝이야, 난 아무것도 몰라.”

“그랬겠지, 미안해. 그러니 애가 혼자 계단에서 뒹굴다가 숨이 막혔겠지. 팔도 부러지고. 그래도 사실 이만하기 다행이다. 아마도 당신이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던 것을 돌려받은 것 같다.”

“에이. 덕은 무슨 덕을 쌓아 당신이 착하게 살으니까 그랬지.”

“아니야. 나는 결혼 후 큰애 낳기 전까지는 술도 많이 마시고, 사실 엉망이었는데 내가 무슨. 다 당신 덕이지.”

“그래도 무조건 당신 때문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아. 아내가 얘기하면 알았습니다.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예. 알았습니다. 여보! 근데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뭔데”

“사실 말이야 이것은 애한테 얘기하지 마라. 내 체면이 구겨지잖아”

“알았어. 그런데 내가 시키는 데로 한다면 들어주지”

“알았다니까요”

“첫째. 사장님한테 고맙다고 했어?”

“아니, 그깟 일로 무슨 고맙다고 하냐. 회사에서 당연히 해 줄 걸 해준건데”

“왜, 싫어? 그 때 그 3명은 잘렸다면서...”

“알았어. 그런데 그 사장은 그만 두고 없단 말이야”

“그래? 그럼 그 사장은 오너도 아니면서 새벽에 순찰 돈거네? 그럼 내가 할 말이 없잖아. 그 건 그렇다 치고 둘째로 딸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아니.”

“뭐야? 사람이 돼 가지고 고마우면 고마운 줄을 알고, 미안하면 미안한 줄을 알아야지 그게 뭐냐?”

“알았어. 미안해”

“그럼 여기에 뽀뽀해.”

“뭐, 당신도 아니고 여기에?”

“싫어? 그럼 얘기한다”

“알았다니까. 그런데 누가 각시도 아니고 딸래미 사진에 뽀뽀하냐?”

“싫으면 그만 두라니까.”

“알았다니까.”

“역시 당신은 쓸만해. 그러나 언제든지 허튼 짓 하면 그때는 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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