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가 죽었다.
요괴가 죽었다. 앞뒤 사정 볼 것 없이 이름만 들으면 너무나 섬칫할 정도다. 그런데 주인이 부르는 이름이 요괴니 이를 어쩔 것인가. 분명 내가 듣기에는 요괴로 들렸다. 혹시 요기라고 부르는 것을 요괴로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엎어치나 메치나 요괴로 들리기는 마찬가지 아닐 것인가. 게다가 생김새도 정말 요괴를 닮았었다.
그 개가 우리 곁에 온지는 딱 일주일 전이다. 지난주 일요일에 아이들이 왔을 때 놓고 갔으니 일주일 만에 변을 당한 셈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나 보는 사람마다 큰소리를 내고 짖어댔었다. 마치 자기네 텃세를 부리는 똥강아지 마냥 시끄럽게 굴었었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을 보고도 가만있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미 같은 사무실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조금만 움직여도 흠칫 놀라서 큰소리를 내며 짖어댔다. 그러다보니 조용하던 사무실에서 움직인 사람이 오히려 더 놀래곤 하였었다.
다 컸다고는 하지만 꼬리까지를 합쳐도 팔뚝보다도 작은데 있는 힘을 다해서 짖어대는 모습은 가히 요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털은 진한 밤색에다가 머리와 턱밑 수염부분만 길어 움직일 때면 정말 보기 거북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앙칼지게 짖어대는 소리는 뾰족한 쇳소리를 만들어 내는 재주도 있었다. 그 녀석은 낯선 환경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요괴로 보이고, 자신의 먹이를 훔쳐가려는 적으로 보이는지 대놓고 경계를 하였다. 하얀 이를 들어 내놓고 윗입술을 뒤집어 한창 열이 올라 있음을 알려주었다.
과연 요괴다운 표정을 잘도 연출해 내는 재주도 있었다. 거기다가 밤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변을 보기도 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밟고 다녀 온통 난리를 만들어 놓았었다. 그러고도 지금껏 사람의 정을 받아 온 버릇 때문에 응석이란 응석은 모두 피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짖어대다가도 조금만 조용해지면 사람들 앞에 가서 이리저리 꼬리를 치고 엉덩이를 들이댔다. 그것은 예전과 같이 어서 안아주고 쓰다듬어 달라는, 말하자면 학습의 효과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개가 싫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싫다는 것보다는 좋아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는 그런 개에게 파리채를 들이대고 개 버릇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작은 개 한 마리가 온 사무실을 휘 젖고 다니며, 분위기는 온통 개판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에 우려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부터 마당에서는 진돌이와 진순이가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직원들은 이 두 마리의 개를 건사하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요괴와 삼순이가 가세하여 회사를 그야말로 온통 개판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다들 대놓고 말을 못할 뿐이었지만, 사실은 회사를 개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일주일이 지나가는 토요일 저녁에 일이 벌어졌다. 이웃 회사에서 기르는 개가, 그것도 쌍으로 순찰하는 개가 와서 요괴를 물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놈들은 토종 진돗개로 내가 보기에도 틀이 잡혀있는 강적이었다. 그런 판에 아무리 요괴가 7년 묵은 요물이라고 해도, 천년 묵은 구미호도 아닌 것이 무슨 힘이 있었을까. 일곱 살 요크셔테리어는 생후 1년도 안 된 진돗개에게 아마 한 입거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 집이라고 짖어댔을 요크, 내가 먹다 남은 밥이라고 오지 말라고 짖어댔을 요크셔테리어는 아마도 건방지다고 물렸을 것이다. 사람만 보면 안아 달라고 짖어대던 요크, 변이 마려우면 문 좀 열어 달라고 짖어대던 요크셔테리어는 진돗개가 볼 때 어리광을 부린다고 물렸을 것이다. 자기 외에는 모든 것이 적이라서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입에 닿는 모든 것을 물려고 대들어도, 귀여워해주고 쓰다듬어 주던 사람들의 버릇이 그를 방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혹시 강아지가 마치 사람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잘못된 학습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세상이 온통 애견 시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견공을 모시고 다닌다. 산책을 할 때도 공공장소에 갈 때도 데리고 다닌다. 집에서는 같은 상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같은 이불을 쓰고 잠을 자기도 한다. 먹이는 때를 맞춰 가져다주고, 심심할까봐 껌도 갖다 주고, 장난감도 놓아준다. 아무데나 실례를 해도 별다른 제재도 없이 치워준다. 때를 가려 예방주사도 놓아주고, 예방약도 먹여준다. 냄새난다고 목욕을 시켜 주는가하면, 옷도 만들어 입혀주고, 미용도 해준다. 이제는 바야흐로 사람이 개를 떠받들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요괴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지난번 잃어버렸을 때에는 방도 붙였었다. 찾아 주는 사람에게는 일백만원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이렇게 끼고 살다보니 사람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산다. 감기에 재채기, 피부병과 비대증, 장염 등 갖가지 병에라도 걸리면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비싼 비용으로 치료해 주었다. 이렇게 애지중지 하던 개가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 편으로는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다면, 우리 자식들 세대에는 나대신 어쩌면 개를 봉양하고 살아가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키우는 개가 마치 환생한 부모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살아간다면, 그 또한 그냥 보아주기가 민망할 일이다. 설사 그 개는 분명 내 부모의 환생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목욕한 번 더 시켜드리고, 한 번 더 꼭 껴안아 드릴 것을 이제 와서 때 늦은 후회를 해서 무엇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정말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 환생한 개가 다시 사람모습으로 바뀌기는 하는 것일까? 마치 천년 묵은 여우처럼. 그렇다면 그 요괴는 천년 묵은 여우였다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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