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서 좋은 것/한국의 문학명승지

채만식 문학관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 15. 21:17

 

 

 

 

 

 

 

 

 

 

 

 

 

 

 

 

 

 

 

 

 

 

 

 

 

 

 

 

 

 

 

 

 

 

아래는 금호병원 현 삼성디지털프라자 소설비

 

  

 

아래는 제중당약국 현 전북약국의 소설비

 

 

 

 

아래는 콩나물 고개의 정주사집 소설비 

 

 

 

 

아래는 큰샘거리의 소설비

 

 

아래는 콩나물 고개의 한참봉 쌀가게 소설비

 

 

 

아래는 미두장 현 내항 사거리의 소설비

 

 

아래는 째보선창의 소설비

 

 

아래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소설비

 

 

 

 

 

 

 

아래는 월명공원의 문학비 

 

 

 

 

 

묘소 진입로

 

선생의 묘소. 비석이 좌우에 2개 있음

 

 

 

 

아래는 채만식 선생의 생가터. 현 임피다방으로 추정

 

 

 

  

 

 

70. 채만식 문학관


전라북도 군산시 내흥동 285번지 금강하구둑 시작점에 채만식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있다. 2001.03.20 문을 연 문학관은 부지면적이 9,887 m² 으로 1층에는 로비와 전시실, 자료보관실, 2층에는 50석의 영상 세미나실이 있다.

 

채만식(蔡萬植)은 호가 백릉(白綾)이며 본관은 평강(平康)으로 전북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274번지 동상마을 채규섭(奎燮)과 조우섭(趙又燮)의 가정에서 5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1862.11.11~1945.01.29)는 조용하나 굳은 의지의 성품이었고, 어머니(1865.07.05~1947.04.18)는 샘이 많고 손재주가 있으며, 행실이 얌전하고 지극 정성인 여인이었다.


백릉(1902.06.17~1950.06.11)이 어려서는 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 사서삼경 등 한문 공부를 하다가 1914년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 은선흥(殷善興)과 결혼했으며,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의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귀국한 후 학교에 가지 않아 1924년 2월 제적되고 말았다.

 

백릉은 내성적인 성격에 외곬적인 면이 있어 소심하였으며, 자신의 신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끝까지 배타적으로 대하는 성격이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도전적인 면이 있지만, 정작 본인은 조용하면서도 사물을 이지적으로 판단하는 귀족적이고 신사적이었다. 정리정돈을 잘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다. 습관은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는 숟가락을 닦은 후 먹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었다.

 

1924년 강화의 사립학교에 잠시 동안 교편을 잡았다가, 1925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입사한 후 1년 만에 사직을 한다. 이 시기 채만식은  이광수의 추천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세 길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한다. 1930년부터 1933년 까지는 ‘개벽’에서 근무를 하였지만 번번이 기자 생활을 청산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계수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 10여 년에 걸친 장기간의 고된 생활고에서도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34년 발표한 ‘레디메이드 인생’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직업조차 가질 수 없는 인텔리의 현실적 무능력을 풍자한 것으로 이때부터 세태를 풍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런 경향은 어릴 적 배웠던 이인로의 파한집이나 최자의 보한집 등에 나타난 고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소설 ‘화물자동차’, ‘부촌’ 등에서는 동반작가적 경향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카프(KAPF)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후 1943년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에서는 풍자적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 뒤에도 단편소설 ‘치숙’, ‘소망’, ‘예수나 믿었더면’, ‘지배자의 무덤’  등에 계속하여 그의 풍자성이 나타나고 있다. 


1936년 기자활동을 그만두고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조선일보에 1937년~1938년 사이 장편소설 ‘탁류’를, 1938년 조광지에 ‘천하태평춘’, 1939년 매일신보에 ‘금의 정열’을 연재하였다. 또 1943년에 단편집 ‘집’을 발간하고, 1946년에 ‘제향날’을 발간하였다.

일제 말기 강요에 의하여 ‘생활과 전체주의’, ‘홍대 하옵신 성은’ 등의 글과 장편소설 ‘여인전기’를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글로 써서 친일작가라는 오명을 남겼으나, 그에게도 쓰라린 상처가 되어 두고두고 반성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는 훗날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을 쓰면서 심하게 자책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와서 1946년 익산의 형 채준식을 연고삼아 익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앓고 있던 병세가 악화된 후였으며, 익산시 모현동, 주현동을 거쳐 살다가 마동 269번지에서 노후성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무덤은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계남마을 선산에 있다. 그는 비록 49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소설 84편, 희곡 25편, 산문 80여 편 등 총 190여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고향을 흐르는 금강만큼이나 도도한 문체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일본의 한 편집사에서 발행한 세계백과사전에서 한국의 대표 문인을 이광수와 채만식이라고 할 정도로 인정하는 작가이다.

 

이러한 채만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6년 군산문화원에서는 탁류의 작품 무대인 ‘미두장’,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째보선창’ 등 3곳에 채만식 소설비를 세웠다. 그 후 2003년 11월에는 '한참봉 쌀가게'(콩나물고갯길 중턱왼쪽 공터), '정주사집'(선양동 구름다리 중간), '큰샘거리'(중앙로 흥국생명 옆), '제중당약국'(구 군산역 앞 현 전북약국), '금호의원'(구 군산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등에 소설비를 추가로 세웠다. 군산 시내의 명산 월명산 정상에는 1984.08.02 채만식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저서로 ‘채만식 단편집’과 ‘탁류’, ‘천하태평춘’, 단편집으로 ‘집’ 등이 있다. 사후 20여 년이 지난 1973년에는 그의 처녀작 중편소설 ‘과도기(1923)’와 희곡 ‘가죽버선(1927)’이 발견되어 ‘문학사상’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장편소설로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탁류(1937), 천하태평춘(1938), 중편소설로는 과도기(1923), 정거장 근처(1937), 단편소설 세길로(1924), 불효자식(1925), 산적(1929), 그뒤로(1930), 레디메이드 인생(1934), 치숙(1938), 희곡 가죽버선(1927), 밥(1930), 낙일(1930), 간도행(1931), 인텔리와 빈대떡(193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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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인생 (부분)


때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공황기였다. 실직 중인 P는 이력서를 들고 말을 붙여볼 만한 곳이면 다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이었다. 차라리 무식하였다면 농민이나 노동자라도 되어 실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불행을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이 인텔리인 점을 원만하였다.

고향의 형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홉 살짜리 아들 창선이를 올려 보낼 테니 아버지 구실을 하고 기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M과 함께 H를 졸라 그의 법률책을 잡혀 선술집, 카페, 색주가 등지를 다니며 실업자의 울분을 터뜨렸다.

술취한 계집들이 이십 전이라도 좋다고 조르는 데 분노를 느꼈다. 창선이가 온다는 날 P는 어느 인쇄소의 문선과장을 찾아 아들을 무료 견습공으로 써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취 도구를 장만했다.

아들에게 만은 자신과 같은 인텔리 실직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부자(父子)가 다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레디메이드(기성품)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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