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서 좋은 것/한국의 문학명승지

서동공원과 미륵사지

꿈꾸는 세상살이 2009. 1. 19. 22:36

 

서동공원과 미륵사터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526번지에 가면 서동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을 기리는 공원인데 용화산 자락의 끝에 자리하고 있다. 지명도 마치 선화를 맞는 서동(580~641.03)의 문패답게 동고도리(東古都里)다.

산 이름 또한 현재의 용화산과 미륵산을 합하여 부르던 예전의 명칭이 용화산이고, 근래에 와서 각각 분리하여 부르는 산 이름이기도 하다. 서동공원은 현재의 금마면 용화산 끝 동고도리에, 미륵사터는  금마면 기양리 104-1번지로 현재의 미륵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아주 먼 거리의 지명도 아니고, 시군도 제15호인 단 하나의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산이다.

 

서동공원내에는 마한 전시관이 있어 마한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며, 서동과 선화의 석상이 있다. 예전에 조각공원으로 시작한 만큼 아직도 98점의 조각 작품들이 있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12간지 석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봄, 가을이면 아이들의 소풍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공원은 자전거 타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름은 ‘서동공원’이지만 별다른 것이 없는 상황에서 용화산의 옆 모퉁이에 사극 ‘서동요’의 촬영장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것은 서동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전하는 것은 ‘서동요(薯童謠)’ 한 가지 뿐인 탓일 게다.


장(璋)·무강(武康)·헌병(獻丙)·서동(薯童)으로 불리는 서동의 고장이 전북 익산이 확실한가 하는 문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분분하다. 그러나 무왕과 관련된 미륵사가 있고, 익산 천도 또는 별궁설이 거론되는 왕궁평성의 유적으로 보아 익산 이외의 장소로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없다. 거기다가 더 확실한 것은 무왕과 선화비의 능이 있어 서동의 어린 시절뿐 아니라, 무왕이 되고 난 훗날까지도 왕궁을 짓고 살았었다는 설이 결정적이다. 현재의 지명(地名) 역시 ‘왕궁(王宮)’인 것은 그냥 붙여진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서동요는 서동 즉 백제의 무왕(武王 : 백제 30대(代) 임금으로 재위 600~641)이 신라 진평왕(眞平王 : 신라의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딸 선화(善化 또는 善花)공주와 서로 사랑하며 지낸다는 내용이다. 이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넘는 사랑이야기 임은 물론이지만, 서로간의 지극한 정성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떻게 노래 하나로 한 나라의 공주가 다른 나라의 시골뜨기에게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부분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당시 사회 통념으로 보아 남녀의 상열지사가 소문으로 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혼례를 하는 풍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일게 한다. 반대로 훗날 마를 캐던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 되는 것을 보면 엄격한 세습체제의 왕권하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서동은 왕족이었음을 알면서도, 선화를 왕실에서 쫒겨 나도록 하기 위하여 시중의 가사로는 그렇게 만들어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동요(薯童謠)’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로 4구체를 띠며, ‘황조가’와 ‘공무도하가’, ‘헌화가’, ‘도솔가’ 등과 함께 민요풍을 지니고 있다. 현존하는 향가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그리고 ‘도이장가’와 ‘정과정곡’을 합쳐도 27수(首)에 지나지 않는다. 향가(鄕歌)는 신라시대의 가요(歌謠)를 말하는데 그 형식은 한자의 음(音)이나 훈(訓)을 빈 향찰(鄕札)로 기록하였으며, 4구체와 8구체, 10구체로 나누어진다.


서동이 무왕(재위 600~641)이 되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되고 있다. 이 미륵사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에 위치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고 전한다.

보통의 절이 하나의 대웅전을 가지며 여타의 건물 배치가 그에 따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미륵사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세 개의 대웅전을 가지고, 다른 건물들은 통합하여 사용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것은 미륵사 창건이 미륵 3존불(彌勒 3尊佛)을 만난 후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럴만하다. 미륵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대웅전을 두고 그 앞에 돌탑을 세웠으며, 중앙에 더 큰 규모의 대웅전을 두었는데 거기에는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지 석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며 높이 14.24m로 최대의 석탑인 점을 감안하면, 기존의 목탑 형식이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사찰이 가지는 전통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탑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탑이 무너지기 전인 9층의 높이는 대략 27~28m가 될 것을 추정하고 있다. 그 앞에 세워진 '당간'은 현재 보존되지 않으나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데 좌우에 하나씩 두 개가 건재하다. 이 당간지주의 높이가 3.95m인 점과 배치 간격이 90m인 점을 보아 거대 사찰임이 증명되기도 한다. 현재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국가 지정 보물 제 236호이다.

 

1사찰 3가람 배치는 일본의 호류지(法隆寺)와 더불어 매우 드문 형식이다. 한때는 일본의 호류지가 세계 유일의 1사찰 3가람형식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우리의 미륵사가 발굴되면서 그 특이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자연발생적 형태의 호류지 가람보다 미륵사의 가람 배치가 더욱 정교하고 계획적인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였지만 일본의 호류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반해 우리의 미륵사는 실존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400여 년 전에 세워진 미륵사와 석탑이 그 자취를 감추었고, 하나 남았던 서쪽의 국보 11호 석탑마저 해체되었다. 그간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붕괴의 위험이 있어 귀중한 문화재를 그냥 방치할 수 없을 정도가 된 때문이었다.

이는 1998년부터 시작된 정교한 해체 과정을 거치고, 여러 전문가들의 확실한 고증을 통하여 새롭게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복원한 문화재가 진정한 의미로서의 문화적 가치가 있느냐는 쉽게 단언 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하여도 무너져가는 석탑을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라는 역사성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104-1번지 미륵사터에 총 19,000여 점을 보관하고 있는 지하 1층, 지상 1층 연건평 594평의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있다. 내부 전시실은 253평으로써 중앙 전시홀 36평에는 미륵사 전체의 축소 모형과 미륵산, 서탑 등의 사진 패널이 있다. 또한 개요실, 유물실, 불교미술실 등을 별도로 두었는데 위탁보관유물 315점, 자료 79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우선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위탁보관하고 있는 것은 315점으로 국가귀속유물 286점, 참고자료유물 11점, 기타 자료유물 18점이며, 이들을 재질에 따라 분류해 보면 유리․옥․수정 등 43점, 토제 51점, 청동제 57점, 금동제 21점, 철제 30점, 석제 15점, 목제 18점, 자기 29점, 기와 61점이다.

전시 자료는 탑, 기와잇기 등 7개의 자료모형이 있고, 미륵사지 종합설명과 각 유물에 대한설명 패널 등 패널류가 59점, 동탑지 토층전사 기단 내․외부 2기가 전시되고 있다. 추가로  문헌자료 복제 7점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와유록, 미륵대성불경,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등이 있다.


서동요의 주인공들은 죽어서도 익산을 떠나지 않고 있다. 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뫼는 남서쪽에 소왕뫼를 두어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이 둘을 합쳐 쌍릉(雙陵)이라 부르는데 약 150m 간격의 작은 묘는 선화비(善化妃)의 묘이다. 대왕뫼는 오랫동안 청주(淸州) 한(韓)씨의 문중 묘로 제사를 지내왔으나 발굴 작업을 거친 결과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묘인 것으로 확정지었다. 현재 쌍릉은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사적 제87호이다. 이로써 익산은 왕궁과 국가를 대표하는 사찰, 그리고 산성과 왕릉까지 모두를 겸비하여 1국의 왕도(王都)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2009.01.18 미륵사지에서 국보 제11호인 석탑을 해체한 결과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과 그 주역이 무왕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또 왕후가 사재를 들여 왕실의 안녕을 비는 사찰을 639년 무왕 즉위 후 40년에 세웠다고 하였다. 탑 내부에서는 지금까지의 어떤 보물보다도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술로 가공된 국보급 유물이 한꺼번에 500여점이나 발견되었다.

 

무왕의 비 선화가 신라 진평왕의 딸 셋째 공주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나, 무왕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이번에 발견된 기록은 왕비가 백제의 최고 관직인 좌평으로 사택덕적의 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해석에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풍습으로 보아 왕은 통치 수단으로 지방의 토후세력들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여러 왕비를 두는 필요불가결의 이유였었다. 무왕 역시 적자의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지방 고을의 통치 수단으로 선화 외에 다른 왕비를 두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 발굴된 기록이 무왕의 왕비는 최소 2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적 기록으로 선화가 무왕보다 먼저 사망한 것도 확실하니 그 후에 좌평인 사택덕적의 딸이 왕비가 되었는지, 혹은 선화비가 죽기 전부터 여러 정실 왕비를 두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이 사재를 드려 왕실의 안녕을 비는 미륵사를 건축하였다는 해석은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사유화된 지방 세력들이 지방자치를 해가는 실정이었고, 중앙정부는 그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면 사찰의 건립에 귀족의 재산이 투여되는 것은 당연할 일이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사극 ‘서동요’의 내용에는 선화 외에도 서동을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서동요의 내용에 관해서는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계속하여 지켜가야 할 것이다. 현재의 어느 역사가도 삼국유사의 내용을 단 한마디로 부정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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薯童謠


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맺어두고

마동방을 

밤이 되면 몰래 안고 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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