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45. 미륵사의 위엄을 상징하던 1사찰 2개의 당간지주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6:13

 

미륵사지당간지주는 금마면 기양리 79번지와 93번지에 나누어져 있는 2개의 석재 당간지주를 말한다. 이 당간지주는 국가소유로 당시 호국불교의 상징이었던 미륵사의 경내에 있던 것으로 1963년1월21일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幢竿)은 원래 사찰에서 문표(門標) 또는 종풍(宗風)을 나타내는 종파(宗派) 고유의 기(旗) 즉 당(幢)을 달아두는 기둥이다. 사찰경내의 전면에는 법당(法幢)을 다는 당간(幢竿)을 세웠고, 당간을 지탱시켜주는 두 개의 지주(支柱)를 세웠다. 이 두 개의 지주가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남쪽에 양쪽으로 90m의 간격을 두고 2기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세워져있다. 대체적인 당간지주는 하나의 사찰에 하나만 세우기 때문에 중문 밖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인데,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중원(中院)의 중심축 선을 기준으로 좌우에 배치하고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동탑과 서탑의 앞에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지주(支柱) 밑에는 대석(臺石)이 있고, 지주(支柱) 사이에 원형의 간대(竿臺)를 놓아 지주를 고정하였다. 익산미륵사지의 당간은 당간지주의 모양이나 크기 및 구조물 등을 고려하면 석당간이었음이 확실하다.

기단(基壇)은 장방향으로 수 개의 판석(板石)을 결합하여 면석을 이루었고, 4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내측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으나, 외측면에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 한 가닥의 선대를 조출(彫出)하였다. 또 전후면에는 외연을 따라 선대를 조출하였다. 간주를 고정시키기 위한 간(杆)은 3개인데, 제일 위쪽의 간구(杆球)는 네모형으로 지주의 상단면 한 쪽을 위쪽으로 흘려 간을 박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나머지 2개는 원형이다.

동쪽에 있는 당간지주는 미륵사지의 회랑 발굴과정에서 흙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간지주의 기단은 두 장의 판석을 남북으로 맞대어 놓았는데, 남쪽의 석재는 3조각으로 파손되었다. 이는 당간과 지주의 하중으로 인한 파손으로 추정된다. 당간을 보호하는 당간지주의 무늬가 없는 안쪽 면은 아랫폭이 76cm이며, 윗폭은 70cm로 약간 좁아져 있다. 이는 일직선에서의 시각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각형(角形)보다 구형(球形)에서 얻는 부드러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쪽에 있는 당간지주는 1972년11월29일 해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기단은 동쪽의 기단과 마찬가지로 2장의 판석을 맞대어 놓았는데, 두 판석을 연결해주는 꺾쇠나 별도의 연결용 부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단의 당간지주용 홈에서 분해하는 데 너무나 힘이 들어 결국은 기단을 아홉 토막으로 분리한 다음 해체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기단의 전체 면적은 남북으로 151cm, 동서로 220cm에 달한다.

이 당간지주의 위치는 별도의 의미를 둔 것보다 3당 3탑의 가람배치 계획 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꾸밈이 없이 청초하고 미려하며, 기단부는 파손이 심한 편이나 지주는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보물 제59호인 경북 영주시의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와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浮石寺) 당간지주’ 등이 있다.

당간지주는 나무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구성을 고려하여 돌이나 철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전해지는 당간지주는 대부분 돌로 된 것이기에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석재당간지주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 양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당간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였지만 철이나 구리, 돌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철당간은 청주 남문로의 용두사지철당간(국보 제41호)과 공주 계룡산의 갑사철당간 및 지주(보물 제256호), 안성의 칠장사당간(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이 남아있는 정도다.

또 석당간은 양산의 통도사석당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03호), 금성시 성북동의 나주동문외석당간(보물 제49호), 담양군 담양읍의 담양읍석당간(보물 제50호), 당간지주 없이 변형되어 석당간만 있는 고흥군 도화면의 고흥신호리석주(문화재자료 제185호) 등이 있다.

목당간은 당간지주가 버텨줄 무게를 고려하여 나무로 제작한 것이며,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목당간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 설치되어있는 목당간은 내구성문제로 인하여 오래된 당간 대신 새로운 목당간으로 교체한 것들이 대부분으로 문화재적인 가치는 재고하여야 한다.

이러한 당간의 맨 꼭대기에는 용이나 봉황 혹은 사람의 머리모양을 한 장식을 하였고, 비단으로 만든 깃발 모양의 번(幡)을 달아놓았다. 그 중에서도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한 것을 용두당(龍頭幢), 여의주모양으로 장식한 것을 여의당(如意幢)이라 하였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방법은 당간지주와 당간을 꿰뚫어 한 번에 가로지르는 고정대를 둔 것도 있고, 당간지주의 안쪽에 홈을 파서 당간은 당간지주의 간격안에서만 정교하게 조립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당간지주의 겉 표면에 당간을 세워 고정한 흔적이 남지 않아 미려한 느낌을 준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당간지주의 안쪽에만 홈을 파고 조립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구례화엄사 당간지주는 당간이 없이 지주만 있는데 지주의 양옆을 꿰뚫어 맞구멍을 낸 형식이다. 또 양산통도사의 경우는 석재로 된 당간과 지주 일체가 전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찰에서는 당간이 두 개였으며 어떤 사찰은 당간이 하나였을까. 대부분의 사찰은 하나의 당간을 세웠다. 그러나 특히 규모가 커서 여러 사찰의 중심이 되는 곳이거나 왕이 직접 관여하는 곳 등에서는 두 개의 당간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는 경주 황룡사와 불국사 그리고 익산의 미륵사가 그렇다. 이중에서도 미륵사는 두 당간지주가 원형을 보존한 체로 90m를 사이에 두고 있어 사찰의 위엄을 대변하고 있다. 경주 불국사의 경우는 당간이 하나 더 들어갈 정도의 여유를 두고 나란히 서있어 크기보다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황룡사의 당간지주는 약 100m의 간격을 두고 있기는 한데, 서쪽의 당간지주는 두 개의 돌 중에서 하나만 남아있고, 동남쪽의 당간지주는 두 개 모두 잘려져서 밑부분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반면에 불국사나 황룡사는 1불전 1가람의 사찰이었으며 미륵사는 3불전 1가람의 사찰이었으니 직접 비교하기는 좀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런 사찰들이 과거에 왕립사찰이었거나 국립사찰이었다는 것에서 보듯이 두 기의 당간지주를 가졌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삼국시대에는 원래 당간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보아 교리를 위주로 설파하는 교육기관이거나 계율을 중시하여 교계의 질서를 잡던 사찰이었던 것이, 후대로 갈수록 변하여 일정한 규모의 사찰에서 세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찰은 처음부터 그러한 구분을 두지 않아 일정이상의 규모가 되면 당간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런 당간이나 당간지주를 보면 그 사찰의 규모나 가람의 배치를 개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여기에도 정성을 들여 가공한 반면 고려시대에는 정성은 들이되 세밀한 부분까지 깎고 다듬어서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의 조형물은 대체로 투박하고 거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런 것에서 보듯이 돌 하나하나에도 당시의 문화가 담겨있고 시대의 변화가 담겨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문화재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조각품이 있다고 하여 감상하는 사람이 그저 좋구나! 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그것은 좋은 감상이 아니다. 문화재는 민족의 발자취로서 선조의 얼이 녹아있고, 조상의 풍습이 담겨있는 것들이다. 역사와 문화는 그 시대의 사조와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보이는 것을 이 시대의 식견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이런 문화재를 바로 알아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힘써야할 우리들이다.

높이 솟아있는 당간의 번은 마치 숨 막히는 전투를 앞둔 진영의 깃발처럼 여겨진다. 정녕 사찰에 들어서려면 전투에 나서는 비장한 심정으로 다가서야만 한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은 세속을 벗어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2010. 09.01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