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러는 게 아닌데 후회하는
1년 중 해가 뜨는 날도 있고 바람이 불며 비가 오는 날도 있다. 비가 싫다고 하여 내내 맑은 날만 오기를 기다린다면 거기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없다. 비가 가져다 주는 순기능 즉 물을 공급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여러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체액을 만들어주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사람도 어려운 일도 닥치고 쉬운 일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때마다 흥분하고 분을 이기지 못한다면 아마도 병이 나서 곧 죽고 말 것이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도 오래 지탱하여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패스트푸드가 좋다고 하여 매일 콜라와 햄버거만 먹으면 생활습관병에 걸려 곧 죽고 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한다면 시래기와 같이 입에 거친 음식을 먹어주어야 생명이 유지될 것이다. 이처럼 육체적인 환경 외에 정신적인 환경에서도 굴곡이 있고 부침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막아버리고 내 말만 앞세운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자연의 순리이며 인생의 순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에게 듣기 싫은 말도 자주하는 사람이다. 나이도 나보다 10년 이상이나 연장자인 직장선배로서의 박용우씨가 주인공이다. 그 분은 연세가 있으셔서 퇴직한지가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밖에서 만나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어떤 때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냥 잘 지내느냐고 묻기도 하며,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주 만나다 보니 부담감이 없어져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진전되었다.
이 분의 성품은 마음이 여리며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잘 이해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직장의 경험으로 사회생활의 경험으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때로는 듣기 거북할 정도의 아픈 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말인즉 모두가 맞는 금과옥조로, 듣는 당사자가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예시해주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고 이 분이 나의 인생을 살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며 듣는 사람들도 모든 말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굳이 따지기로 들자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니 듣기 싫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남이 하는 얘기지만 그 말이 내가 행해야 좋을 말들이었고, 때로는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정확한 해답을 찾기도 하며 잃었던 용기가 생겨나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수 차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분의 언행을 보면 우선 말씨는 항상 부드럽다. 그래서 뭔가 강력한 내용을 전달하여 설득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약간 밀리는 듯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어떤 때는 간발의 차이로 기회를 놓치는 때도 있고, 이렇게 하지 말고 각도를 조금 더 틀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분을 좋아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단 번에 밀어붙이고, 빠른 결단력으로 추진하는 것만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생활터전에서 안주하려는 인간 본능의 타성이 몸에 밴 탓도 있겠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을 선호하는 결과일 수도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급격한 진보나 혁신이 세상을 못살게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닐 것이다. 급격한 진보나 완고한 보수 역시 어떤 필요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선택되어야 할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그 분과 같이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 비록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는 못 올라갔어도, 그간 벌어놓은 돈이 많은 것이 아니어도, 어쩌다 만나면 일부러 피하여 멀리 돌아가지 않고 반갑게 맞이하는 그런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인생에 있어 이 정도 되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반드시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여러 사람들을 호령하고, 큰소리치면서 자기를 과시하여 주장을 관철시키려 윽박지르는 삶만이 성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행여 자신이 생각할 때에 성공한 삶이었다고 자평할 수는 있을지 언정, 타인들이 다시 말하면 세상의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의 성공한 삶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은 다 아는 바와 같다.
박용우씨는 퇴직 후이지만 회식자리에 가끔은 모셔와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는 것의 확인이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도 그 분의 질타는 계속되기 일쑤다. 현재의 직장인들이 하고 있는 그런 행동은 회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개인의 성장과 인생철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 그런 예이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조금씩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목표가 다르니 그런 방식의 가르침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지금도 자기가 회사의 직장 선배인양 한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보아도 그 분이 아직도 직장 상급자로서 주는 충고라고는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듣든 사람이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 것인지에 대한 조언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입에 거친 음식을 거부하듯이 귀에 거친 말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나도 이제 당신과 같은 정도가 되었으니 나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하며, 당신이 아는 것은 내가 아는 것에 비하여 부족하기 턱이 없으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라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그렇게 잘 났으면 최고 경영자를 해야지 당신은 왜 퇴직을 하였으며,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에 속한다.
그러나 초대받은 손님에게서 그런 말도 듣기 싫다면 처음부터 초대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니, 어렵게 초대한 사람이라면 귀에 쓴 말은 들어두어야 몸에 이로울 것이다. 만약 그런 말이 자신의 상황과 맞지 않는 다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여 거르고 걸러서 하는 말은 일단 들었다가 집에 가서 버려도 전혀 늦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박용우씨 이야기의 소재는 전 직장 후배의 상가다. 박용우씨와는 약 20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말로 귀결되었다.
고인이 된 이 친구는 생산 현장에서 근무를 하였었다. 이 친구가 회사 일에는 남달리 열정을 가지고 근무하였지만 가정의 개인생활은 그보다는 조금 못 미쳤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가정생활이 평탄치만은 않았었다. 그런데 박용우씨는 고인이 된 이 친구의 과거는 자신이 잘 못하여 벌어진 일이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근무 환경이 좀 더 좋았더라면, 경제적인 처우가 좀 더 좋았더라면, 가정사를 좀 더 챙겨서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더라면 하는 후회를 한 것이다.
그럼 박용우씨에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시 고인이 된 친구는 생산현장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가 순환보직에 의해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나이도 있고 직장근속 연수가 많으니 순환 보직을 원칙으로 삼았는데 우선대상자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사자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 접하는 것들이요 기존의 경력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강박관념이 그를 힘들게 하였었다. 그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순환보직에 의하여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적응하지 못하여 받았던 과중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가정사나 친지들과의 관계도 문제가 있었지만 업무에 비교하면 훨씬 못 미치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당시 순환보직을 실행했던 사람이 부담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새로 맡겨진 업무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지도해주었어야 할 선배사원들이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박용우씨는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격려를 통하여 변화에 잘 적응하며 업무를 빨리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듣고 보면 이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다. 인과응보를 따지면 원인이 없이 결과가 없는 것이니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시 상황과 형편에 따라 그리고 남들이 보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만큼의 행동이었다면 족하다고 위로하였다.
대략 15년이 지난 일에 대하여 그때의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다고 후회하며 그때의 일에 대한 책임으로 자책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당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돌리기 일쑤다. 또 이 말을 듣는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해 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는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박용우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된다. 나는 지난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이 좋은 것이다. 극악무도한 일을 해놓고 입으로만 후회한다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에까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을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잘 못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일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여 작은 일에라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에 속한다.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때, 아니 길지 않은 몇 년 뒤에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 인생을 내가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접하면서, 뒤집어 보면 나도 내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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