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그림을 팔아주는
몇 년 전에 해주오씨 선조 중 오응정가에 대한 영정을 모신 삼세오충렬사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3대에 걸쳐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훈처에서 나라를 빛낸 가문이라고 하여 포상을 할 것이다. 물론 이들도 당시의 업적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기는 받았다. 당시에 진급을 하기도 하였으면 죽어서는 국가가 지어 준 사당에 모셔져 있으니 말이다.
삼세오충렬사는 임진란부터 정유란까지에 일어났던 충신 오응정과 그 가문의 공을 기리는 사당이다. 처음에는 1681년 조선 숙종 7년에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 망실과 중건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른다.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61호인 삼세오충렬유적은 용안면 현내로 468번지에 있는데 옛 번지로는 중신리 131-1번지이다.
삼세오충렬사의 가장 주된 인물인 오응정은 정유재란 당시 왕을 의주까지 모신 장군이며, 남원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화약더미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리고 아들 욱과 직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남원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직의 아들 즉 오응정의 손자인 방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 소식을 듣고는 샛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던졌다. 처음에는 이렇게 4명의 충신을 기리는 사당으로 출발하였으나, 뒤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이 삼세오충열사에 추가로 안치되었는데, 동량은 임진왜란 때 강화도전투의 김천일장군이 공을 치하할 정도로 충신에 속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족 5명이 충신의 반열에 들자 국가에서 사당을 지었으며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주 오씨의 후손에 오종갑이 있다. 오종갑은 내가 삼세오충렬사에 다녀 온 것을 알고는 자신의 선조에 대해 관심을 가져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했었다. 이런 오종갑은 같은 직장에서 근무를 하였으며 연배가 조금 낮은 동료사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퇴직을 하여 작은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나 아직 크게 번창하지는 못한 상태다.
오종갑은 첫인상으로 보면 다소 마른 체격에 성질이 급하고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다소 여린 면도 없지 않다. 세상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강한 면과 약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평가를 하자면 그래도 유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내가 아는 미술가 중에 최모씨가 있는데, 이 사람은 서양화가로 개인전을 여러 차례 열었으며 국전 초대작가일 정도로 활약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나보다 약 10살이나 어린데, 그러다보니 미술계에서는 아직 중견작가에 들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느 날 최화백과 이야기를 하던 중 오종갑이 자신의 개인전에 참석하여 그림을 한 점 팔아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평상시 전시회를 하는 그림의 가격이 궁금했던 나는 그 가격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큰 대작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그린 것으로 당시 150만원으로 정해진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때 오종갑은 후배가 개인전을 열었다는데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그림이라도 팔아주어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단다. 그리고 봉투에 미리 준비해 온 150만원을 건넸다는 것이다.
그때가 언제 인지 정확한 날짜는 묻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의 전시회에 가서도 선뜻 그림을 사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죽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오종갑의 급여가 얼마였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부업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 순수한 급여생활자가 거금을 주고 그림을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한 달 치 급여를 몽땅 주고 샀을까 아니면 한 달 반의 급여를 지출하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상여금을 탔을 때 준비해두었던 비상금을 지불하였을까 별별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까지 내가 고민해보았자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니 그 걱정은 잠시에 그쳤다.
최화백은 그날 여러 점의 그림을 팔았지만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오종갑이 사 간 그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다. 같은 인사치레라고 하여도 돈 많은 사람이 사간 비싼 그림과 돈 없는 사람이 사간 덜 비싼 그림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자가 자신의 재산 일부를 떼어 낸 것보다 적지만 늙고 힘없는 과부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헌금한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말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나도 이런 상황에서는 가타부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막상 실제로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훗날 오종갑을 만났을 때 최화백의 그림을 사 준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식당을 개업하면 여럿이 가서 식사라도 하면 그만일 것이고, 옷가게를 하면 내 맘에 드는 옷을 하나 팔아주면 되는데 그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평소 생활에 사용되는 물건이거나 언젠가는 사용될 물건이라면 조금 비싸더라도 개업하는 곳에서 사주는 것도 인사치레 겸 자신의 구매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동차 대리점을 개업한다면 축하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차를 한 대 팔아줄 수는 없으니 다들 그렇게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경우는 사 가져가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며, 그렇다고 전시회에 가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난감한 경우에 속했다는 것이다. 오종갑의 마음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왕 도와주려면 필요한 때에 도와주어야 하니 과감한 지출을 하였다고 했다. 또 계속하여 그렇게 해줄 수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림 한 점을 팔아주었다고 하여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하는 오종갑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좋다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사실이 있었는 가 이다. 더하여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면에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가이다.
대체로 본 오종갑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전에 나도 그런 경우를 겪은 적이 있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약 2년 전에 나는 익산의 문화재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2년에 걸친 답사와 1년에 걸친 원고작성 및 가필, 그리고 1년에 걸친 신문연재 등을 거친 후 발행된 아주 많은 공이 들어갔던 책이다.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국회의원 두 명이나 축사를 하였으며 시장도 빠질 수 없다하여 축사를 하였으니 그런대로 명분은 갖춘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의 정가를 3만원으로 정하기를 계획하였으나 발행인은 5만원을 고집하였다. 그 이유들 들자면 어차피 심혈을 들인 귀한 책이기도 하지만 매달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다음에 이런 책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기왕에 나온 유일한 책이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비싸게 팔자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책을 쓴 저자로서는 정가 5만원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기울었다.
나는 이 책을 지인들에게 보내줬다. 책에 적힌 정가를 받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일부는 내가 쓴 책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돈이 많은 부자이거나 형편상 이런 책을 사야 되는 사람에게서는 책값을 받을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책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일을 하였다고 말했다. 개인이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해냈다는 것이 큰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머니를 털어 책값을 내놓았다. 매겨진 정가가 비싼 것에 대해 잠깐 망설이기는 하였어도, 이내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책이라고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책값보다도 더 많은 돈을 내놓기가 일쑤였지만, 반대로 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당신한테 돈 받자고 한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거절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때 오종갑은 책값의 두 배를 보내왔다. 말로는 책값을 보낸다고 하였는데 받고 보니 두 배의 금액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나는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그림이야 자기가 매긴 정가가 있어 비싸거나 싸거나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책은 100만원 혹은 200만원 하는 것도 아니니 팔아주는 사람 입장에서야 부담이 덜하지만, 엄연히 나붙은 정가가 있으니 그 보다 많은 돈이 나에게는 다른 고민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후에 만난 오종갑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보내면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책을 더 보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갑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자기는 책 한 권이면 족하지 책값을 비싸게 주었다고 하여 두 권 혹은 세 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책이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내서 더 읽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오종갑이 보내온 책값을 대신하여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하다. 마치 개업 집에서 물건을 팔아주는 것처럼 혹은 개업 집에 축하화분을 보내는 심정으로 책도 사면서 선물도 보내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좋은 책이라고 칭찬을 하거나 많은 수고를 들인 흔적이 보인다는 말로 격려를 한 다음 조만간 책값을 주겠다고 하면서 깜깜무소식인 사람도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왜 책값을 주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나 또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모두 사서 보기에는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빌려보거나 얻어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오종갑 같은 사람들이 후자의 몫까지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회가 이만큼이나 돌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을 정해진 가격보다 비싸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비싸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사람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나는 책에 매겨진 정가보다 더 적은 금액을 받고 나누어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책값을 받을 목적이 아니라 기쁨을 같이 하고 나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보내는 책들도 많이 있다. 정가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은 책값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한 노력에 대한 이해 값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 서점에 나가 진열된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은 저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담겨있는 지식을 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오종갑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 돈이 큰 액수는 아니더라도 나의 수고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꼭 자기 자신만 잘났다고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고 하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베풀 줄 아는 삶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인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다. 오종갑은 최소한 그런 수고를 이해하고 노고를 칭찬해줄 줄 아는 사람에 속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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