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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명예도 다시 생각해보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26

돈이나 명예도 다시 생각해보는


교회에서도 가끔 투표를 할 때가 있다. 재단 명의의 부동산을 매입한다거나 다른 교회를 지원하는 경우처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그렇다. 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경우에도 그렇고 건물을 증축하는 때도 투표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 중에 목회자를 제외한 장로나 권사, 집사를 세우는 일에도 투표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집사는 안수집사를 지칭하는데, 본래는 안수집사를 집사라 부르고 일반 집사는 서리집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일에서 실시하는 투표는 상당히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면 장로가 되기 위한 조건에는 안수집사로 피택된 지 10년이 지난 자 중에서, 흠이 없고 순결한 자로서 교회 일에 봉사하기 원하는 사람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여 모든 집사가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로는 교회에 소속된 신자 수의 약 10%만이 임명될 수 있는 구조로써, 목회자를 조력하여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10%의 수가 선출될 수 있는 정원이기는 하지만, 교회 등록 순으로 순서를 정해 임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절차에 따라 투표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규정은 더욱 까다롭다. 투표 정족수는 투표 당일 모인 교인 전체로 하여 별도의 제한을 두지 않지만, 투표에 참가한 교인 2/3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만약 장로 후보자가 한 명인 경우의 투표는 찬반의 성격을 띠므로 이 수치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여러 명이 후보로 나선 경우에 2/3를 획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는 한 사람의 유권자가 선출하고자 하는 목표 장로 수대로 기표를 해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이 후보로 나선 경우의 찬방 양상과 같이, 총 투표자의 2/3를 얻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후보로 나서게 되면 반드시 그에 따른 호불호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내가 선호하는 후보에만 기표를 하고 나머지 후보에 대해서는 기표할 수 있는 권리마저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하여 여러 후보가 나선 경우의 장로선출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제도는 교인들이 소속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나라에서 정한 헌법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으며 집사나 권사 역시 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연배에 있는 사람 중에 교회의 장로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소신대로 일하며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요일은 일주일의 주일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주님의 날인 주일이기에 교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말하자면 주일에는 지켜야 할 안식일답게 사람이 만든 여러 일들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이 결혼이거나 상을 당하여 출상을 하는 경우처럼 죽고 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곧이 고대로 따지고 보면 세상적인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모든 사람들이 헌법에 정한 대로 사는 것이 의무이며 도리일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세상의 삶을 기본으로 사는 삶과, 하늘나라의 새 하늘 새 땅의 주인 되기를 원하며 사는 나그네 인생길의 차이일 뿐이다. 이 땅의 많은 순교자들이 세상 삶을 내려놓고 새 하늘 새 땅의 소망을 바랐던 것도 다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순교자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정작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하여는 냉정한 양면을 지니고 있다. 주일날이 되면 현재의 교인들이 세상일보다 주님의 일에 더 열심인 것을 두고, 세상을 저렇게 살아서 어쩌자는 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못난 사람,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말도 맞는 것 같기는 하다.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들은 대체로 주일날이 되면 세상일을 뒤로 미루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세상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있어 자신의 모든 욕구와 소망을 다 이룰 수는 없으니, 누구든지 어느 한 쪽을 포기하든지 미약한 결과에 승복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박승기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교회 일에 열중이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우선권을 세상 일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헌법을 지키는데 두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박승기는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다. 그것은 졸업한 후 세월이 벌써 30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박승기는 학교의 선생님이다. 그래서 학교일도 해야 하고, 개인적인 일도 해야 하며, 교회 일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그 정도야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 하더라도 동창회 모임도 해야 하고, 친인척 간의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며, 동네 반상회도 나가야 하고, 사업상 골프회동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살이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개인적으로 쉬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박승기는 세상의 일을 포기하고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열성을 보였다. 만들어 낸 예를 들면 학교에서 개인적으로 진급시험을 보아야 하는 날과 공교롭게도 교회의 큰 행사가 겹쳤다면 발걸음을 교회 쪽으로 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박승기도 자신의 진급과 관련하여 신앙에 더 비중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에 옮긴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선택한 방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기준에 판단하여 왜 그랬느냐고 하거나, 그러기를 아주 잘했다는 말도 한다. 박승기와 같은 교인의 입장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아주 어려운 결정을 하였다고 칭찬 반 부러움 반으로 화답해주기도 한다. 아무리 나그네 길이라지만 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만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면 그와 대치되는 다른 무엇은 포기해야 하는 택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승기가 교육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교육계에 근무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금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하게 주관적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의 승급조건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도록 점수제로 표기하는 제도가 있다. 이 점수가 많으면 진급에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교사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박승기는 이런 가산점이 아주 많은 교사였다고 한다. 그러니 우선순위에서 당연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나, 그에 부가하여 치러야 하는 부수적 행위들을 하지 않은 예에 속한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내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다시 언급하나마나 하나님 나라의 일에 비추어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지금 박승기가 하는 행동으로 보면 아마도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모든 일에 열심을 내어 충성하며, 남을 배려하는 것은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도록 유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뒤로 나는 박승기와 여러 차례 더 엮이면서 생활해오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승기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서 어떠냐고 하는 위로와 함께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기도를 하려면 기도한다고 말하지 말고 기도하는 게 더 좋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매사에 힘을 내고 분발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것도 좋은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이일에 대하여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그만큼 남을 위하여 특히 승기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도 배려하지 않고 있는데, 상대방이 나에게 배려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마치 받기만 하고 남에게 주지 않는 구두쇠와 같은 사람이며,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는 사람처럼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볼 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나는 냉정하게 나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승기가 자신의 인생살이보다 신앙에 더 중점을 둔 것에 대하여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승기가 아침 먹기 전 새벽부터 교회에 봉사하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도 봉사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도 봉사하고, 심지어 저녁을 먹은 후에도 봉사하고 그런 측면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뭐든 했다하면 열심인 사람이라서 좋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며, 남들이 생각하는 세상 부귀영화를 쫒지 않고 신앙적인 삶 그리고 이성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말이다.

세상에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현자가 낫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 그냥 먹고 마시며 몸만 편하면 된다는 것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최근에 들은 말로는 얼굴 붉은 바보로 살지언정 얼굴 흰 도적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말도 있다. 유럽의 얼굴 흰 약탈자들이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얼굴색이 붉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바보 취급하며 통치한 것에 빗댄 말이다. 남을 지배하면서 빼앗는 것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과, 남에게 베풀고 양보하면서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는 차이가 있다. 아무리 금전만능주의의 경제논리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그것만 해도 감사하며 돈을 조금 덜 벌어도 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본 박승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승기가 이번 장로피택 선거에서 탈락되었다. 15명을 선출하는 선거였기에 유권자 한 사람당 15명의 후보에게 기표를 하여야 하는데, 많은 후보자를 두고 15번이나 기표를 한다는 것은 투표 자체가 어려운 노동에 속했다. 그 결과 유효 투표자 수의 2/3를 넘는 후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개표 결과 1,300명이 넘는 유권자의 상당수가 제1순위로 박승기를 기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대하는 후보자에게만 기표를 하고 나머지 후보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유권자가 많아 종합적인 득표수에서는 기준에 미달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을 두고 박승기가 장로로 피택되지 못한 것이 서운하고 미안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의 소양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교인 중에서도 자신의 공적만 내세울 줄 알았지 실제로 하는 행동에서는 엉망인 경우도 다반사다. 그러나 박승기와 같은 사람은 누가 감시를 하지 않아도, 육체적 쾌락이나 금전적 수입에 휩쓸리지 않는 소신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자랑할 만하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다행이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있어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러다가 나도 박승기와 같은 부류의 한 사람으로 휩쓸려 존재감을 인정받으면 그것 또한 자랑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