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가편
추석이 지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제 가을이 무르익어간다. 많은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으레 단풍을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추수동장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 전통에 관하여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 것 같다.
추수동장이란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먹을 것을 저장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나락을 훑어 도정을 한 후 쌀로 보관한다거나, 배추를 다듬어 양념을 한 후 겨울에 먹을 김치로 만드는 것 등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 장작이나 솔가지 혹은 볏짚을 쌓아놓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솜이불을 준비하듯 초가지붕에 새 짚을 덮는 것, 저온에서 쉬 상하는 고구마를 따뜻한 곳에 보관하는 것, 내년에 사용할 씨앗을 잘 말려 보관하는 것들도 중요한 일에 속한다.
이와 유사한 성격으로 겨울에 생산되지 않는 푸성귀나, 추워서 어로활동이 어려운 생선을 보관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요구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 지역의 특산물과 지형적 여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의하여 그 보관방법이나 저장방법이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전라도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음식이나 예절 혹은 전통으로 남아 전라도식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의 문화는 주로 평야지대와 해안가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부 산악지방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 지역에 비한 전체적인 평가는 농업과 어업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농업과 어업이 주업이라는 말은 독특할 것 없는 아주 평이한 것으로 무시될 수 있으나,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악지형인 실정에 비추어보면 고유의 특성으로 분류되어 비범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보면 모든 음식에 쌀이나 떡이 들어가며, 한과나 식혜 등 쌀을 주 원료로 하는 것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잔치를 하더라도 항상 떡이 빠지지 않으며 생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라도 음식문화의 풍성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감자나 메밀 혹은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는 곳에 비해 차별화된 것이며, 해안에서 나는 산물 역시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행복이다.
따라서 이런 음식들은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여유로 인하여 특별히 어려운 저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라도음식은 유별나게 짜지는 않다는 말이 된다.
또 사용되는 부재료 역시 많은 산채류나 엽채류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해산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굳이 전라도 음식이라고 할 만한 음식들을 살펴보면 홍어찜, 비빔밥, 콩나물국밥, 대통밥, 꽃송편, 깨죽, 대합죽, 꽃게미역국, 갈낙탕, 파산적, 대합구이, 꼬막무침, 죽순탕, 고추장, 더덕구이, 표고버섯덮밥, 대하탕, 두루치기, 애저, 배추김치, 고들빼기김치, 갓김치, 부각, 풍천장어, 아귀찜, 백합죽, 꼬막, 어죽 등이 있다.
위의 예는 우리가 평상시 먹는 음식들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본다면 평상시 이런 음식들은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중에서 우리 북도만의 음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가장 대표적인 홍어찜과 홍어무침 등은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여수 돌산갓과 고들빼기, 담양의 대나무 관련 식품, 벌교 고흥의 꼬막류, 무안의 낙지 등은 모두 남도의 음식으로 통한다.
흔히 말할 때 전라도음식의 명소에는 전주와 익산, 순천과 목포를 꼽는다. 이중에서 전주는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으로 그나마 체면을 세우고 있지만, 기타 지역은 그 명성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뭔가 특별히 내세워 보여줄 만한 것이 없다는 말도 된다. 게다가 진안의 애저나 무주의 어죽이 퇴색되어가며, 군산의 아귀찜도 보편화된 현실에서 음식의 명소라는 이름을 이어갈 재목이 필요하다.
어딘지 미약하기는 하지만 부안의 백합죽이나 순창의 고추장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제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면 우리는 저장된 음식을 먹게 된다. 이것이 추수동장으로, 제철 식물이 나지 않는 겨울에도 풍성한 영양분을 듬뿍 담은 재료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예전의 명성을 잘 간직할 수는 없을까. 최대 곡창지대로서 풍부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영양분이 많고 맛도 좋은 음식을 제공하던 전라도음식의 명맥을 이을 수는 없을까. 그것은 우리가 음식문화를 어떻게 개발 유지해갈 것인가를 고민하느냐 고민하지 않느냐로 결론지을 수 있겠다.
가지고 있는 것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자세로는 앞으로의 희망을 기대할 수가 없다. 주마가편. 잘 달리고 있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은 말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말이 영예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전라도를 격려하는 채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모두가 고민해보아야 한다. /한호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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