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0. 설날(元日) - 음력과 설날, 설날에 관한 기록, 차례지내는 법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2. 2. 13:14

 

10. 설날(元日)

 

설날은 일 년의 처음이라는 뜻으로 세수(歲首) 또는 원단(元旦), 연수(年首)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새해 들어 첫날이며, 달에 들어 첫날이고, 날에 있어 첫날이었으니 이를 삼원지일(三元之日)이라 하여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우리말로는 설 또는 설날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 하는 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근신(謹愼)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설날은 삼가고, 낯설다는 뜻이 변하여 설날이 되었다는 말도 전한다.

한편 묵은해는 다사다난한가운데 전날을 마지막으로 지나갔으며, 다가오는 새해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며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부른다는 벽사초복(辟邪招福)을 하려면 당연히 심신(心身)을 근신하여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10.1 음력의 사용

음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날을 설날이라고 한다. 이때 적용된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기준하여 만든 달력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음력은 모두 태양태음력이다. 순수 음력이 달의 운동만을 기준한 것에 비해, 태양태음력은 달의 운동주기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여기에 태양의 움직임을 혼합하여 만들어낸 달력이다.

이 태양태음력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우리의 선조(先祖)인 희자(羲子)가 만들었다고 한다. 희자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보고 날짜를 계산하여 연월일(歲月日)의 달력을 만들었고, 여기에 별의 움직임(星辰)을 더하여 천체(天體)를 분석한 후 기후의 변화와 계절의 순서를 나타냈던 인물이다. 고려시대 혹은 조선 초기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외자 즉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자인 경우가 상례였다. 세종은 이도, 정조는 이산, 숙종은 이순이었으며, 선비 황희 등에서도 알 수 있다.

10.2 설날의 변천

예전의 음력은 1895년 11월 16일까지 사용되다가, 11월 17일을 양력으로 1896년 1월 1일이 되도록 강제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일본과 같은 달력을 사용하도록 강제로 규정하였던 것으로, 겉으로는 합리성이지만 일면 민족의 전통을 끊는 일과도 연관이 있었다. 이때는 조선 고종 32년으로, 1897년 광무 1년에 국호(國號)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꿔 스스로 황제의 나라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2년 전이다. 당시 외세 열강들은 쇄국(鎖國)으로 안주(安住)해 있던 조선을 억압하여 우리의 문화(文化) 대신 자신들과 같은 문화를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후 우리의 설날이 양력 1월 1일에 밀려 구정(舊正)이라는 이름으로 전락된 적도 있었다. 강점기에는 고유의 설날이 되면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하여, 아직도 고유의 제사를 지내고 있지는 않는지 감시하였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설날은 1985년에 ‘민속의 날’로 부활하였고, 1999년에는 드디어 ‘설’이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설날 대신 구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도 일본은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를 휴무일로 정하고 축제로 즐긴다. 이때의 방식은 우리의 설날과 별반 다르지 않다.

10.3 설날에 관한 기록

설날을 명절로 삼은 것과 그에 대한 세시풍속을 기록한 것은 우선 3세기 중국의 역사가(歷史家)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을 꼽을 수 있다. 동이전에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례(祭天儀禮)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이를 세시풍속의 원류로 보는 것이다. 제천의례는 매년 같은 시기에 행해졌고, 하늘에 제사지내며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이 행사는 국가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국중대회(國中大會)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같은 시기에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주기성(週期性)을 띠었다는 부분에서 세시의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년제(新年祭)의 경우는 부여에서 ‘은(殷) 정월(正月)’에 ‘영고(迎鼓)’를 했다는 것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이때 ‘은 정월’은 태음력의 기준으로 섣달에 해당되며, 이는 당시의 역법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이러한 내용이 중국의『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과 부여가 내왕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아마도 같은 역서(曆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아니면 부여에서 사용하는 책력은 은의 책력과 다르지만, 특별히 ‘영고(迎鼓)’를 보면 은(殷)나라가 사용하는 책력의 기준으로 정월(正月)에 해당하는 때에 실시하였다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의 동이(東夷)는 조선조의 조선뿐 아니라, 진수(陳壽)가『삼국지』를 저술할 당시의 주변 여러 나라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7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歷史書)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의 신라조(新羅條)에 ‘매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회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여서 일월신(日月神)을 배례(拜禮)한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10.4 설날 아침 차례

차례의 유래

예전에는 사당(祠堂)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정월 초하루, 동지, 돌아가신 날 등에 지냈다. 그러다 보면 매년 30여 회나 되는 제사가 있어 복잡하고 부담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매달 보름에 지내는 제사를 간소화하여 절차가 복잡한 술잔 대신 찻잔을 올리는 방식으로 대신하였다. 이때 차례(茶禮)가 생겨났으나, 점차 확대되어 간소한 제사의 통칭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명절날 아침에 드리는 제사의 명칭으로 변한 채 굳어졌다.

정조차례(正朝茶禮)  

설날 이른 아침 제물(祭物)을 사당(祀堂)에 진설(陳設)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正朝茶禮)라 한다. 요즘은 별도의 사당에서 지내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많이 간소화되어가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바쁜 일상생활과 다양한 직업, 그리고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서 사는 바람에 편리성에 따른 면도 많이 있다.

차례가 끝나면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새해의 첫날에 드리는 절이라 하여 세배(歲拜)라 부른다. 이때 아이들은 새 옷이나 신발 등을 설빔으로 준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입던 옷이라도 정성을 들여 손질하여 준비하면 설빔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세배를 할 때 답례로 내 놓은 음식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술은 세주(歲酒)라고 한다. 이때의 세찬과 세주는 새해를 맞이하는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기에, 제사를 지내기 전이라 하더라도 세찬이나 세주라고 불렀다.

제사는 보통 큰아들 즉 장자(長子)가 모시고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조(四代祖)의 신주(神主)에게 차례대로 지낸다. 그 윗대의 신주는 집에서 지내지 않고 각 가정별로 집 밖에서 한데 모아 시제(時祭)로 지낸다. 요즘에는 각 성씨 단위의 시제가 정해져 있어 공동으로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설에 의하면 사람의 기(氣)는 100년 혹은 길게는 150년까지 미친다고 하여, 4대조의 영혼을 섬기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제는 춘하추동으로 연 4회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차례 지내는 법

설날의 차례를 지내는 순서는 강신례(降神禮), 참신례(參神禮), 헌작례(獻酌禮), 사신례(辭神禮)로 구분할 수 있다.

강신례 : 제사를 받을 귀신이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가 향로 앞에 꿇어앉아 향을 세 번 피운 다음, 절을 두 번 하고 조금 뒤로 물러선다. 집사(執事) 한 명은 오른쪽에서 술병을 들고, 다른 한 명은 왼쪽에서 술잔을 들어 건넨다. 제주가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아들면 술을 따른다. 술잔에 담긴 술을 모사(茅沙) 그릇에 붓기를 3회에 나누어 비운다. 마지막으로 왼쪽의 집사가 빈 술잔을 건네받아 상 위에 올려놓으면, 제주는 절을 두 번 한다.

모사기(茅沙器)는 그릇에 모래를 넣고 선조의 묘에 난 풀 중 깨끗하고 좋은 띠풀을 일부 잘라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로써 선조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참신례 : 제주가 먼저 절을 하고 나면 나머지 가족들이 절을 두 번 한다.

헌작례 : 이제는 조상이 마실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제주가 앞으로 나와 빈 술잔을 들면, 오른쪽의 집사가 술잔을 채운다. 제주는 향불에 술잔을 세 번 돌린 후 상에 올린다. 이때의 세 번 역시 강신례 때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측의 집사가 밥그릇과 국그릇의 뚜껑을 열면 좌측의 집사가 마치 밥을 퍼 먹는 것과 같이 밥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동작을 한 후 수저를 밥 위에 꽂는다. 다음에 젓가락은 반찬을 집기 전에 상 위에서 세 번을 간추려 끝을 가지런하게 한 후 반찬을 잘 집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한 후 반찬 위에 올려놓는다. 제주는 다시 두 번 절을 하고 물러난다.

사신례 : 왼쪽의 집사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밥그릇의 뚜껑을 다시 덮는다. 이로써 식사를 마친 조상께 길채비를 예고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모든 후손들이 절을 두 번 하면 차례가 끝이 난다. 제주는 지방을 들고 대문 밖에 나가 불사른다. 지방을 들고 들어오면 혼백이 지방을 따라 안으로 다시 들어오기 때문에 소지하여 보내야 한다.

만약, 헌작하는 도중에 다른 식구들이 술을 올리고 싶을 때에는 제주와 위치를 바꾼 후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이때 비워야할 술은 퇴주그릇에 붓는다.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

제사를 지내는 음식상에는 여러 가지를 올리는데, 이들을 나열할 때도 일정한 법도가 있다. 예를 들면 밥 대신 떡국을 올리는 것과, 마늘, 파, 고추, 부추, 미나리 등의 오신채(五辛菜)를 놓지 않는 것 등이다. 다른 식재료로는 달래, 파, 마늘, 생강, 부추를 오신채라고도 한다. 이들은 진한 향을 내거나 살아 있는 인체에 생기를 넣는 양념에 속하므로 정력이 좋아져서 남의 집 담을 넘는 월담초 혹은 오줌줄기가 벽을 뚫는다는 파벽초(破壁草)라 불리기도 하며, 귀신에게는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전 불교국가이던 시절부터 전해오던 금욕에 대한 풍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런 음식들도 각각 놓는 위치가 있으니, 신주 즉 신위(神位)가 북쪽을 등지게 놓고 상을 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 차례를 지내는 곳의 형편상 북쪽에 자리 잡지 못할 경우에는 편리한 대로 정하고 신위에서 보아 좌측을 동쪽, 우측을 서쪽으로 정한다. 아무 말이 없어도 내가 보아 신위가 북쪽이며 나의 오른쪽을 동쪽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지방과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니 반드시 이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때 음식을 늘어놓는 것을 진설(陳設)이라고 한다. 신위를 바라보면서 진설하는 나를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줄에는 과실류를 놓는다. 조율시이행(棗栗枾梨杏)은 왼쪽으로부터 대추(棗), 밤(栗), 곶감(枾), 배(梨)의 순서로 놓는다는 말이다. 나의 가장 왼쪽에 대추를 놓는 것은 대추가 과실 중에서 가장 어른이라는 의미도 있다. 대추는 꽃이 늦게 피며 늦게까지 열매를 맺는다. 대추는 씨도 한 열매에 하나만 들어 있고, 밤은 한두 개, 감이나 사과 그리고 배에 많은 씨가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줄에 넝쿨과일인 호두 또는 망과류를 곁들일 수 있으며, 손으로 만든 조과류로는 다식(茶食), 산자, 약과(藥果) 등을 놓고, 끝으로 당과(糖菓子)와 양과(洋菓子)도 놓을 수 있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아내는 음식이므로 올리지 않는다.

다음 두 번째 줄에는 반찬류를 놓는다. 좌포우혜(左胞右醯)라 하여 북어포, 대구포, 오징어포, 문어포 등은 놓는 사람의 좌측 즉 서쪽에 놓는다. 또 식혜류는 오른쪽 즉 동쪽에 놓는다. 중앙에는 오신채가 들어 있지 않은 짐채 즉 백김치와 동치미, 콩나물이나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무나물 등 숙채와 간장을 놓는다.

다음 세 번째 줄에는 탕류를 놓고, 네 번째 줄에는 적과 전을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에 따라 물고기전은 동쪽에, 그리고 고기전은 서쪽에 놓는다. 이때 삼치, 갈치, 꽁치처럼 치자로 끝나는 생선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조기를 제일로 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생선과 달리 머리에 두 개의 퇴화된 어금니가 있어 올이 곧으며 품위를 지킨다고 믿었다. 조기를 석수어(石首漁)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통하게 살이 오른 조기는 귀한 생선으로 구하기가 힘들었으며, 그만큼 조상에 대한 정성이 담겨 있는 준비라고 믿었던 이유가 더 크다.

두동미서(頭東尾西)라 하여 고기류의 머리는 동쪽에 놓고 꼬리 부분은 서쪽에 놓는다. 이때 중앙에는 채소나 기름에 지지고 튀긴 전(煎)과 불에 굽고 찐 적(炙) 등을 놓는 것을 말한다.

다음 다섯 번째 줄에는 메와 갱을 놓는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와 반대로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국은 왼쪽에 놓고, 밥은 오른쪽에 놓는다. 이때 술잔은 밥과 국의 중간에 놓는데, 정중앙이 아니라 적과 전 쪽으로 반쯤 내세우면 된다.

반좌갱우(飯左羹右)는 놓는 사람이 보아 밥(飯)은 왼쪽에 놓고, 국(羹)은 오른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위를 기준으로 반서갱동과도 같은 말이다. 또 국수(麵)는 왼쪽에 놓고, 떡(餠)은 오른쪽에 놓는다. 생동숙서(生東熟西)는 불을 사용하지 않은 날것은 동쪽에 놓고, 익힌 것은 서쪽에 놓는다는 말이다.

시접거중(匙楪居中)은 수저를 놓은 그릇은 신위 앞 중앙에 놓는다는 말이며, 합동진설인 경우에는 한 접시에 여러 사람의 수저를 놓기도 한다. 적접거중(炙楪居中)은 불에 구은 적(炙)은 중앙에 놓는다는 뜻이다. 건좌습우(乾左濕右)는 마른 것은 왼쪽에 놓고 젖은 것은 오른쪽에 놓는다는 말이다. 또 접동잔서(楪東盞西)로 접시는 동쪽에 놓고 잔은 서쪽에 놓는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생선의 배는 신위 쪽을 향하게 놓는다든지, 닭 같은 음식은 엎어놓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것은 배남복북(背南腹北)으로 귀신과 등을 돌리지 않고 마주본다는 의미와, 독수리가 사체의 창자를 먼저 먹듯이 딱딱한 등보다 부드러운 배 쪽이 더 먹기 쉽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갖추어 지내는 사람도 적으니 이대로 다 지킬 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간편화 시대에는 좀 더 간소한 상차림으로 자원과 시간의 낭비도 줄이며, 오히려 준비하는 사람들의 정성을 기울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위에 나오는 좌우는 놓는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하였다. 또한 모든 음식의 종류는 지역과 계절에 따른 특산물이 달라 일정하게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전의 주자가례에서도 제를 지내는 가정의 형편을 고려하여 원칙만 있을 뿐 각각의 위치를 하나하나 정해놓지는 않았다.

음복(飮福)

차례가 끝나면 세찬(歲饌)을 먹고 세주(歲酒)를 마시는데 이때 술을 마시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한다. 전날 준비한 같은 술이라도 유독 조상의 차례상에 올려졌던 술은 조상이 후손에게 주는 사랑의 술로 여겨 음복이라 한다. 이것은 제사 음식을 조상과 같이 여기는 마음과 조상의 돌봄으로 올 한 해도 무병무탈하게 잘 지내기를 도와달라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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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