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2. 대보름 - 환경, 유래, 풍속, 대보름 민속놀이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2. 2. 14:30

12. 대보름

율력서(律曆書)에서의 정월(正月)은 천지인(天地人)이 합일(合一)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는 날이라고 하였다.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행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음력으로 정월 15일은 새해 들어 첫 번째 맞는 보름으로 상원(上元) 또는 대보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도교(道敎)에서 1월 15일은 상원(上元), 7월 15일은 중원(中元), 12월 15일은 하원(下元)으로 삼아왔으며, 그중에서 상원이 가장 큰 명절에 속했다.

12.1 대보름의 환경

대보름을 전후하여 우수가 들어 있다. 우수(雨水)는 언 땅이 녹아 물을 보낸다는 의미가 있고, 눈이 녹아 물이 된다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날씨가 풀리고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수에 봄비가 올 수도 있으니 대보름이라 하여도 둥근달을 볼 수 없는 날이 가끔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날은 달이 가득 찬 날이라 하여 재앙과 액운을 막는 기운이 있어 제일(祭日)로 삼았다. 설날을 맞아 서로의 복을 빌어주고 공동 잔치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며, 신년(新年)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을 떨치는 날이다. 이것은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마을공동의 신앙숭배 대상에 대한 대동의례와 대동회의 그리고 대동놀이가 집중된 걸립(乞粒)에서 벗어나, 한 해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때를 알리는 의미다. 대보름이 되면 새해 농사가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달불 즉 달집불을 놓기도 한다. 이때 보름달을 보고 절하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달불에 액을 태워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예전 사람들은 달에 월백(月魄)이라는 정령(精靈)이 있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기에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삼국유사』에서도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해와 달의 정령(精靈)인데,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니 신라 천지는 광명을 잃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들 일월신(日月神)을 모셔오기 위하여 관리(官吏)를 보내는 등 특별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또 달빛을 보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는데, 달빛이 진하고 뚜렷하면 풍년이 들며 흐리고 어두우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달 표면의 무늬를 보면 마치 월계수와 토끼가 있는 것처럼 보여 달에는 토끼가 산다고 믿기도 하였다. 추석 때 즐겨 행하는 ‘강강술래’의 가사 속에는 달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구절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그렇게 믿어온 것으로 보인다.

12.2 대보름의 유래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 즉 농한기라 하였다. 따라서 한 해 농사철 중 가장 한가한 때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괘(占卦), 놀이 등으로 새 기운을 얻어 농사 준비를 하였던 시기다. 이런 대보름날의 풍속은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으며,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서 유래하였다. 이때의 세시풍속은 1년 전체 풍속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대보름에 섣달그믐과 같이 수세(守歲)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대보름을 8대 축일(祝日)로 여기고, 일본에서도 소정월(小正月)이라 하여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대보름날이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한 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여기고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 기록에 나타난 대보름을 살펴보면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일명=炤知王) 즉위 10년 무진년(4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처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 하였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뒤쫓게 하였으나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헤맬 때, 한 노인이 못(池) 가운데서 나와 글을 올리는데 겉봉에 ‘이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한 사람만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평민을 의미하며 한 사람이란 왕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글을 읽어보니 ‘금갑을 쏘라’고 하였기에, 급히 궁에 돌아가 금갑을 화살로 쏘았다. 그런데 내전의 금갑 뒤에서는 분향수도(焚香修道) 중인 중과 궁주(宮主) 비빈(妃嬪)이 간통하던 중에 둘이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항간에서는 이 연못을 글이 나왔다는 뜻으로 서출지(書出池)라 부르고, 이 일을 두고 슬퍼하며 근심하고 금기(禁忌)한다는 뜻으로 달도(怛忉)라 하였다.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는 점도 이와 연관이 있다. 당시는 불교국가로서 중의 역할이 궁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영향력도 컸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매년 정월 첫 돼지날(上亥日)과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 조심하라는 정초 12지일(十二支日)과 연관이 있으며, 보름에는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냈다.『삼국사기』권 제1 ‘신라 본기’에는 박혁거세의 즉위일이 4월 병진일(丙辰日)이라고도 하고 또 정월보름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정월 보름의 즉위기념행사는 오늘날에 행하는 정월대보름의 동제(洞祭)와 연계시킬 수 있는 것이다.

12.3 대보름 풍속

설날부터 이어져온 정월 기분은 대보름을 정점으로 변환점을 맞는다. 따라서 대보름날의 전날인 음력 1월 14일은 서운하여 그냥 보낼 수 없는 연유로 작은 보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또 어촌에서는 음력 정월 16일을 귀신날이라 하여 배를 띄우지 않았으니, 대보름의 명절휴식이 16일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작은 보름에는 수숫대의 껍질과 속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서 물감으로 색을 입혔다. 그리고 벼나 보리, 밀, 옥수수, 콩, 목화 등의 이삭 모양으로 만들어서 짚단에 꽂아 긴 장대 끝에 묶었다. 이 장대는 집 옆에 세우거나 마구간 앞 거름더미에 꽂아 풍년을 기원하였다. 이 모양은 낟가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해의 곡식더미가 이 낟가리처럼 풍성하게 수확되기를 바라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매우 오래전부터 전해왔으며,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궁중에서는 내농작(內農作)이라 하여 별도의 행사로 채택하였다.

한편 보름날에는 2월 초하루의 행사용 볏가릿대를 세운다. 볏짚을 만들고 쌀주머니를 다는데, 위는 뾰쪽하게 하고 아래는 넓게 하여 긴 원추(圓錐) 모양을 한 것으로 장대에 묶어 마당에 세운다. 이것을 벼를 장대같이 쌓아놓았다 하여 화적간(禾積竿)이라고도 한다. 볏가릿대는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식수 및 농사용 물의 안정적 공급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우물가나 들판, 안마당, 외양간 등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월 15일인 대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으며,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를 하였다. 약밥 또는 약반(藥飯)은 찹쌀밥에 씨 발린 대추, 감떡, 찐 밤, 잣을 섞은 다음 다시 꿀과 기름, 간장 등으로 조리한 것이다. 밤에는 들판에 나가 그해 곡식들의 새싹이 잘 자라고 전답의 해충이 소멸되기 바라면서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날리기, 바람개비돌리기, 실싸움, 돈치기 등을 즐겼다. 또 어른들은 다리밟기, 편싸움, 횃불싸움, 줄다리기, 동채싸움, 놋다리밟기 등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날은 흰쌀밥을 하지 않고 오곡밥을 하였으며, 각종 나물을 무쳐 먹었다. 특히 다른 성받이의 세 집 밥을 먹어야 그해의 운이 좋다고 하여, 서로 다른 집의 오곡밥을 나누어 먹으며 우의를 다졌다. 따라서 이날은 하루 세 번 먹던 밥을 특별히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하여 밥 얻으러 다니는 총각들이 줄을 이었다.

이와 같이 흥겨운 대보름날 밤에는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결하는 경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 개인적으로는 한 해의 액(厄)을 없애는 액막이를 하였으며, 연날리기와 같이 개인이 즐길 수 있는 놀이로 개인 또는 단체가 즐기기도 하였다.

이런 행사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마을 공동의식 함양과 무병장수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은 대체로 같다. 주요행사로는 동제, 줄다리기, 지신밟기, 부럼깨기, 더위팔기, 귀밝이술 마시기 등이 있다. 더위팔기는 정월대보름이 아닌 춘분에 하는 경우도 있다. 귀밝이술은 이명주, 명이주, 치롱주, 총이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낮에는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등을 하였고, 밤에는 망월(望月)이라 하여 횃불을 태우며 달맞이를 하였다. 옛 사람들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에 절을 하며 그해의 풍년과 자기의 소원을 빌었다.

이 밖에도 ‘대튀기’는 대나무를 태우면 마디 속의 공기가 팽창되었다가 ‘펑’하고 터지는 소리에 놀란 잡귀가 물러간다고 하는 것이며, 사내기짓기는 대나무에 새끼를 매달고 끌고 다니면서 ‘사내기짓자’고 외치는 것이며, 제웅치기, 디딜방아세우기, 동토맥이 등도 있다.

제웅치기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홍수막이라는 액막이 고사를 한 뒤, ‘제웅’ 혹은 ‘처용(處容)’이라 부르는 짚으로 만든 인형을 길가에 버렸다. 제웅의 뱃속에는 삼재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노잣돈인 동전 따위를 넣은 것으로, 고사(告祀) 대신 이것으로 액막이를 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액(厄)을 제웅에 실어 버림으로써 방액(防厄) 또는 송액(送厄)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제웅을 발견하면 돈은 빼내고 제웅은 땅바닥에 내버린다. 고장에 따라서는 제웅을 거꾸로 잡고 땅바닥에 치며 장난삼아 노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 들어서까지 땅에 떨어진 동전은 잘 줍지 않는다는 풍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의 나이에 따라 운명을 맡은 9개의 별을 직성(直星)이라 하는 데, 제웅직성(處容直星)을 비롯하여 토직성(土直星), 수직성(水直星), 금직성(金直星), 화직성(火直星), 목직성(木直星), 일직성(日直星), 월직성(月直星), 계도직성(計都直星)으로 구분한다. 이들은 9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고, 제웅직성 일명 나후직성(羅睺直星)은 10세의 남자 또는 11세의 여자아이부터 들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이 개척하는 운명보다, 아직은 부모의 보살핌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2.4 대보름의 민속놀이

대보름은 유명한 명절로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풍속이 많고, 각 지역별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전날은 작은 보름이라 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는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이때 일손을 덜기 위하여 밤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간혹 잠든 사람의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 놓은 것은 섣달 그믐날밤과 같은 이치다.

온갖 곡식과 채소로 음식을 차려 맛있게 먹는 것은 물론이지만, 먹기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고 성주신, 조왕신, 삼신, 용단지 등의 주요 가신(家神)에게 먼저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많은 지역에서 전하는 풍습에 대하여 알아본다.

농점(農占)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보리 풍년을 기원하는 데 이를 보리기원풍(麥祈風)이라고 한다. 각 가정에서 수수깡을 잘라 보리 모양을 만든 뒤, 거름 속에 꽂아두었다가 대보름날 아침에 불사른다. 이때 나온 재를 모았다가 봄보리를 갈 때 뿌리면 보리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2월 9일 아침에 걷어냈는데 이렇게 하면 곡식이 많이 열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낟가릿대를 헐기 전에 가마니 같은 부대를 갖다 놓고 곡식을 담는 시늉을 하며 ‘벼가 삼만 석이요!’ 또는 ‘콩이 오백 석이요!’ 하는 말들로 기원하였다.

한편 대보름날 아침이 되면 사람이 먹는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가지고 소에게 먹였다. 외양간의 소가 이 음식을 잘 먹으면 그해 농사는 풍년이 든다고 하는 소점이 있다. 이때 찰밥을 먼저 먹으면 그해 논농사가 잘되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밭농사가 잘된다고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말 못하는 소가 이리 먹으나 저리 먹으나 풍년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바로 선조들의 지혜라 할 것이다.

1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더 있는데, 콩을 물에 불리는 방법도 있다. 1년을 상징하는 사발이나 종자기 같은 그릇 12개에 물을 붓고 콩을 하나씩 담아 상태를 살핀다. 대보름날 아침에 콩이 부푸는 상태를 보아 비가 많고 적음을 점쳤다. 예를 들어 다섯 번째 그릇의 콩이 크게 부풀어 있으면 5월에 비가 많이 내려 농사일이 순조롭게 될 것을 짐작하고, 6월에 해당하는 콩이 부풀지 않았으면 6월에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콩을 가지고 짐작하는 농점은 달부름, 월현(月滋)이라고도 한다.

닭울음점은 닭이 몇 번을 우는지를 세어 10번 이상을 울면 풍년이 들고, 그보다 적게 울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닭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두세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올해도 풍년이 들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나무그림자점은 한 자 정도 되는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정오 무렵에 그 나무의 그림자를 재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칡으로 길이가 4, 50발쯤 되는 굵은 줄을 만들고, 이 줄을 사용하여 줄다리기를 한다. 이때 어느 편이 이기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이를 갈전(葛戰)놀이 혹은 갈전희(葛戰戱)라고 부른다. 현재는 산이 많은 강원도의 영월에서 재현하고 있다. 진행하는 방식은 일반 지역의 줄다리기와 비슷하다.

강원도 춘천지방에서는 동네별로 편을 갈라 외바퀴수레를 끌고나와 싸우는 풍속이 있다. 이를 차전놀이 혹은 차전희(車戰戱)라고 부른다. 경기도 가평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속이 전하는 데, 모두 그해의 풍년을 점치는 놀이의 일종이다.

도돔떡먹기는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쌀을 모아 떡을 찌는데, 한 켜마다 각자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넣었다가 떡이 다 되면 이를 살펴 점을 쳤다. 자기 이름이 있는 부분에서 떡이 설익었으면 운이 나쁘다고 하였으며, 그런 떡은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지푸라기 몇 개를 놓고 그 위에 내다 버렸다. 이때 사용된 지푸라기는 밥을 먹는 상을 대신하는 약식 도구로, 일련의 행동이 연고 없이 지나가는 걸신(乞神)에 대한 배려였다. 오랫동안 굶어 배가 고픈 나머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고 걸신들렸느냐고 하는 말처럼, 걸신이란 배가 고파 얻어먹는 거지신을 말한다. 곡식안내기는 이날 곡식을 집밖으로 내면 일 년 내내 곡식 나갈 일이 생기며 농사도 흉년이 든다고 믿어 남에게 빌려주거나 판매하지도 않았다. 가게의 상인들이 첫 마수걸이를 중히 여기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놓은 다음, 그 사발을 지붕 위에 올려놓는다. 이튿날 아침에 곡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고 점을 치는데, 놓았던 곡식 중에서 날아간 것이 많은 곡식은 그해에 흉작이 되며, 남아 있는 것이 많은 곡식은 풍작이 된다고 하였다. 사발 안의 곡식이 많이 날아갔다는 것은 새나 짐승이 와서 많이 먹었다는 뜻이며, 그것은 새나 짐승이 많아 여름 농사철에도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암시다. 사발이란 밥그릇이나 국그릇과 같은 사기그릇을 말한다.

달집태우기

여느 지역에서나 달집은 태웠지만, 특히 구례의 달집태우기는 어른들의 불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보름달이 뜨기 전에 망우리를 돌리며 대나무 기둥을 세운 후 짚이나 솔가지 등으로 덮어 움막집을 만든다. 이 집은 달이 뜬 곳 즉 동쪽에 작은 문을 내고, 달이 막 떠오르는 순간에 불을 붙여 태운다. 맨 먼저 달집에 불을 붙이면 장가를 들며 결혼한 사람은 득남을, 결혼한 지 오래된 사람은 아이를 잘 낳으며, 한 해의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먼저 불을 붙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또 달집 불에 콩을 볶아 먹으면 한 해 동안 이를 앓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때 달집의 불이 활활 잘 타고 연기가 많이 나면 날수록 마을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든다고 믿었다. 달집을 태우기 전에 새끼를 두르고 각자가 바라는 바를 적은 소원지(所願紙)를 붙이기도 한다.

새쫒기

농사철이 되면 참새의 피해가 많기 때문에, 대보름날 아침에 미리 새를 막는 시늉을 하였다. 아이들이 빈 들에 나가 ‘후여! 후여!’ 하는 데 이는 여름에 모여들 새를 미리 쫓아내는 행위다. 또 모기를 쫓는 시늉을 하여 여름에 기승을 부릴 모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동제(洞祭)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제(祭)를 올린 후 크게 굿을 하였다. 또 밤이면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신에게도 제를 지낸다. 먼저 왼손잡이가 꼰 새끼의 매듭에 백지를 드문드문 끼워 금줄을 만들었다. 다 만들어진 금줄은 골매기돌에 매어놓고 풍악을 울리며 한바탕 신나게 논다. 이는 마을 단위의 제사로서 동제(洞祭)라고 부른다. 골매기돌은 동제를 지내는 대상 중 돌로 된 것을 의미한다.

동제는 산신, 용신, 서낭신 등 마을에서 섬기는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합동으로 올리는 제의(祭儀)로서, 마을 신앙의 행위적 표현이다. 이들 신의 종류는 마을마다 각기 다르며, 이들의 수호신의 서열도 각기 달랐다.

제를 지내는 시기도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곳도 있지만, 대보름에 혹은 삼월삼짇날에 지내는 곳도 있다. 횟수도 정월대보름과 단오를 기해 지내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정월 초하루 저녁에 지내기도 하고, 음력 10월에 지내는 곳도 있었다.

동제는 산고사, 동고사, 별신굿, 용궁맞이, 장승제, 기우제 등 지역의 생태적인 조건과 환경적 영향을 받아 차이가 났다. 반면 제례 즉 유교식으로 치르면 비교적 간단하지만, 당굿으로 할 경우에는 줄다리기나 풍물 등 복잡하고 다양한 부대행사가 뒤를 따른다. 이때 제관(祭官)은 마을의 원로가 하기도 하였으며, 중부지방의 도당굿이나 서해안의 풍어제를 비롯하여 제주도의 입춘굿 등에서는 무당이 주재(主宰)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무당을 방언으로 ‘심방’이라 불렀다.

유교식 동제는 참여자 수(數)도 제한적이며, 일부에서는 제관만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단위의 제사인 만큼 제관(祭官)은 부정이 없는 남자들이 참여하고, 마을 사람 전체가 이를 구경하는 곳도 있었다. 이때 구경꾼들은 입에 밤 한 톨씩을 물어 잡담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차단하는 완벽한 준비성을 보여준다. 제물(祭物)을 씻는 우물은 며칠 전부터 부정(不淨)을 막기 위하여 금줄을 치고 사용을 제한하였다. 어촌에서는 이를 더 넓게 해석하여 풍어를 위한 마을축제로 승화시켰다.

충남 서산시 고남면 고남리에서 행하던 '홍합제'는 어촌의 동제로 소를 잡아 지낼 정도로 성행하였다. 홍합제는 며칠 전에 제관을 선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섣달 그믐날 당산(堂山)에서는 당제(堂祭)를 준비하고, 바닷가에서는 썰물 때에 개펄에서 홍합제를 지낸다. 제관은 제물로 밥 세 그릇과 삼색(三色) 실과(實果)를 차린 후, 얻고자 하는 지역의 특산물을 불러들인다. 예를 들어 영산포 조개요! 하면 제관은 ‘영산포 조개 오너라.’ 혹은 정산물 조개요! 하면 ‘정산물 조개 오너라.’ 한다든가 ‘진도 해태요!’ 하면 ‘진도 해태오너라’고 외쳤다. 그러면 청년들이 ‘우~~ ’하면서 조개가 몰려오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면 해산물이 많아져서 풍어를 이루고, 어로 역시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동제는 유교식 가례를 약식(弱式)으로 줄여서 하는 편이지만, 일부에서는 무당을 불러 지내기도 한다.

강릉단오제도 이런 동제에서 출발하였으나, 오늘날에는 하나의 지역축제로 독립한 경우다. 따라서 축제 속에 제사와 굿이 등장하고, 탈놀이나 은산별신제 같은 작은 제(祭)가 포함되어 함께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해남의 도둑잡이굿, 완도의 장보고당제, 보성의 벌교갯제, 연기의 전의장승제, 고창의 오거리당산제, 안동의 도산부인당제, 안동의 마령동별신제, 삼척의 원덕남근제, 김제의 마현당제 등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연싸움

연날리기는 겨울이 시작되면 같이 따라오는 놀이다. 다양한 종류의 연(鳶)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얼레를 만들고 연줄을 감아 연을 공중에 띄워 날리면 바람을 맞아 연은 높이 올라간다. 고려 때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眈羅)를 정벌할 때 연을 만들어 썼다고 전한다. 연을 날리다가 다른 사람의 연줄과 서로 맞걸어 비비는 것을 연싸움이라 하는 데, 연줄이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이 연싸움에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연실에 사금파리가루나 구리가루 등을 입혀 튼튼하면서도 날카롭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정하지 못한 처사로서, 순수하게 연줄을 거는 방식과 당기는 기술로 싸우는 것이 정당하다 하겠다.

연날리기에 대한 유래를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신라 김유신조에 ‘647년 진덕여왕 때에 대신 비담과 염종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을 때, 월성(月城)에 큰 별이 떨어져 왕과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므로 김유신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달아 띄웠다’고 적고 있다. 이 또한 난(亂)을 평정하려고 하늘에서 장수가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주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을 만드는 재료는 대나무를 얇게 깎은 기둥 살을 대고, 그 위에 튼튼한 한지(韓紙)를 발랐다. 연을 띄우는 방법은 연에 실을 매어 당기는데 바람을 받으면 앙력(昻力)이 생길 수 있도록 약간 경사각을 주었다.

놋다리밟기

안동지방에 전하는 풍속으로 대보름날 저녁에 부녀자들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줄을 섰다. 이들은 마치 생선을 세로로 세워 꿴 형상을 하였는데, 헤성헤성하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총총하게 늘어섰다. 그 위로 양쪽에서 부축한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가면서 흥을 돋운다. 소녀가 ‘이것이 무슨 다리인가?’ 하고 선창을 하면 엎드려 있는 부녀자들은 일제히 ‘청계산(淸溪山) 놋다리지~’하고 후창(後唱)하는 놀이다. 여자아이는 이렇게 인간 매듭 위로 왔다갔다하면서 놀며 새벽이 되어 돌아간다. 놋다리밟기는 엎어 놓은 기왓장을 밟는 것과 같다 하여 일명 기와밟기라고도 한다.

안동지방의 놋다리밟기가 유명한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예천을 지나가던 것과 연관이 있다. 일행이 소야천(所夜川) 나루에 당도하였으나, 마침 배가 없자 부녀자들이 나와서 인간 다리를 만들어 주어 공주가 그 위를 걸어갔다고 전한다. 기와밟기는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에서 일부 재현되고 있다.

기복풍속

기복풍속은 글자 그대로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앞으로 다가올 여러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 원하는 속내를 표현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그리고 직업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달맞이 놀이

정월대보름날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가서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달맞이다. 이때 남보다 먼저 달을 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여 발길을 서둘러 산에 올랐다. 각자가 바라는 소원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개인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 소원을 비는 것은 똑같이 소박한 꿈이라 할 것이다. 보름달이 가지는 의미는 가득 찬 기운을 의미하며, 잉태의 여성, 완전함의 풍요를 들 수 있다.

시절은 아직 한겨울이라 춥기도 하겠지만 남보다 먼저 달을 보려는 마음은 추위도 잊게 한다. 또 달빛을 보면서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는데,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지역에 풍년이 들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빛이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희면 비가 많다고 하였다. 또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꽹과리와 징 그리고 북 등 온갖 악기를 동원한 농악대를 이끌고 올라가기도 한다. 달이 뜨기 전까지는 풍악으로 흥을 돋우다가,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상쇠의 신호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는 소망을 빌기도 한다.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두면 그해에는 많은 과일이 열린다고 한다. 또 석류나무의 가지에 돌멩이를 끼우면 열매가 커진다고 하였으니 둘 다 같은 말로, 과일나무에 돌을 얹어놓는 풍속이 생겼다. 이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산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나무를 살피고 과수농사를 준비하라는 말로 풀이된다.

안택(安宅)

안택은 집 안에 탈이 없게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마을 단위의 공동제사에 비교하여 개인이 지내는 제사다. 안택은 정초에 지내는 것이 보통인데 조상신(祖上神), 불을 담당하는 조왕신(竈王神), 생산과 양육 및 건강을 담당하는 삼신(三神), 마을을 관리하는 동신(洞神)등에게 지내며, 재앙이나 질병 그리고 화액을 쫓아내고 가내의 평안을 비는 제사다. 제사가 끝나면 차려진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무병무탈을 빌었다. 지금도 개업하여 번창하기를 바란다든지 새로운 집을 지어 행복하기를 바란다든지 하는 등 목적을 정하여 차려지는 제사를 고사라 부르는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풍습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까지 함께 전하고 있다.

무사(無事) 안녕(安寧)을 비는 것에서는 안택과 무당굿이 같지만, 안택은 무당이 신과 접속하는 것에 비해 고사는 순수하고 소박한 기원에 해당한다.

복토(福土) 훔치기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꼭두새벽에 종각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리거나 부뚜막에 바르는데, 이는 재산 모으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땅은 농사를 짓는 터전으로 지모신(地母神)이라 여겼으며, 풍요로 복락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종각 네거리는 당시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을 것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이것이 변하여 보름 전야에 부잣집의 흙을 훔쳐다 보름날 아침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는 풍속이 생겼다. 이는 자기도 그 집과 같이 부자가 되고 싶은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니, 부자는 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불을 밝히고 지키기도 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집의 터줏대감이 따라가서 복이 모두 달아나고 재물을 잃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복을 부르는 흙을 훔쳐왔다고 하여 복토훔치기라고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갯벌훔치기가 있는데 당시는 갯벌이 곧 풍요로움을 주는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제(山祭) 지내기

산제는 동리의 수호신인 산신(山神)께 드리는 제사로 동신제(洞神祭)로 통하기도 한다. 산제는 정월대보름날 혹은 보름을 전후한 길일을 택하여 지내는데, 마을 진산(鎭山)의 산제단 또는 산제당이라고 부르는 단(壇)이나 당우(堂宇)에서 지냈다.

제사를 맡을 제주의 집에 농기를 세워 알림으로써 제사가 시작되며, 제주(祭主)는 부정(不淨)이 없어야 한다. 목욕재계하여 몸을 청결하게 함은 물론 마음가짐도 선량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야 한다. 제사를 지내는 제기(祭器)는 해마다 새로이 장만하는 것이 상례이고 제수(祭水)로 쓸 우물에도 황토(黃土)를 놓아 악귀를 쫓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또 제사가 끝나기 전에는 함부로 우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멍석을 덮어 보호하였다.

드디어 제삿날이 되면 농기(農旗)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동민(洞民)이 뒤를 따라 산에 올랐다. 자정이 지나고 첫 닭이 울면 산제를 올리며, 새 그릇에 새 음식을 담아 정성을 들였다. 제수(祭需)는 모두 제주가 직접 만들고 축관(祝官)의 독축(讀祝)이 끝나면, 마을 주민 모든 호주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워 올린다. 농기는 제가 끝날 때까지 그 옆에 세워둔다.

달집 짓기

낮에 달집을 지어놓았다가 보름달이 떠오르면 불을 질러 태우면서 그해 소원을 빌었다. 그동안 날렸던 연을 모아 달집이 탈 때 같이 태워 액막이를 하였으며, 신수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온 사람은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을 떼어내어 태우는 것으로 액막이를 하기도 하였다. 달집이 타고 난 뒤 타다 남은 대나무를 부지깽이로 사용하면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서로 가져가기를 원했다. 요즘에는 밥을 지을 때 아궁이에서 때는 불이 사라져 그냥 전하는 말로만 남아 있다.

이것은 소지(燒紙)와 같은 소액(燒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용왕먹이기

보름날 바닷가나 개울가에 제수(祭需)를 차려놓고 비는 것을 ‘용왕 먹인다.’고 한다. 흔히 행하던 용왕제나 풍어제는 집단적인 마을 단위의 동제(洞祭)인 반면, 용왕먹이기는 개인이 고사를 지내는 작은 행사로 용왕에게 음식을 먹여 마음을 유(柔)하게 한다는 것이다.

까마귀 밥주기

엄동설한에 새들이 먹을 식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름날 아침 오곡밥을 도마 위에 담아서 지붕이나 담장 위에 놓아두면 새들이 와서 배불리 먹었다. 이것은 내가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먹이가 부족한겨울철에 주변의 새들을 배려하는 심성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습이라 할 것이다. 늦가을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을 남겨두었던 선조들의 자연사랑 동물사랑을 확인하는 듯하다.

그을음 쓸기

우리의 옛 부엌은 환기창이 작았던 것은 물론, 연료를 직접 태움으로써 그을음이 앉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보름날 그을음을 쓸면서 ‘그스름 쓸자 그스름 쓸자’고 하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여겼다. 당시 부엌은 많은 거미줄과 함께 시커먼 그을음이 있어 어둡게 보였는데, 이렇게 청소를 함으로써 새로운 기분이 들고 위생상에도 좋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곧 바쁜 농사철이 되면 이런 청소도 할 수 없을 것이니 한가한 대보름에 미리 청소하던 지혜가 엿보인다.

쥐불놀이

정월 14일 밤이나 혹은 보름밤에 밭둑 혹은 논둑을 태우는 행사로 이것을 쥐불놀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잡귀를 쫓고 풍작을 거둘 수 있으며, 1년 동안 무병하고 액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름내 자랐던 풀을 태워 거름으로 만들어서 농사에 보탬이 되며, 병충해의 서식지를 없애는 것으로 풍년을 예약하는 것과 같았다. 황해도에서는 둑을 경계로 하여 두 마을의 시합이 있었다. 한 편에서는 쥐불을 놓고 다른 편에서는 그 쥐불을 끄는 것으로 겨루었다.

이 놀이는 딱히 정월 14일이 아니더라도, 새해 들어 처음 맞는 쥐날 즉 상자일(上子日)에 실시하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들은 깡통에 불씨를 담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불을 질렀다. 이때 발생하는 불의 크기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특히 쥐구멍이 있으면 일부러 불을 놓아 쥐들이 튀어나오면 잡기도 하였는데, 불씨가 오랫동안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하여 솔방울이나 작은 장작개비를 넣어 불을 사르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불깡통을 돌리면 마치 달처럼 둥근 모양을 이루어 망월 곧 ‘망우리를 돌린다.’고 하였다. 요즘은 쥐불로 인한 병충해의 소각(燒却)이 농사에 별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석전(石戰)

석전은 글자 그대로 돌싸움인데 돌을 무기로 하는 편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상원(上元)에 마을과 마을이 싸우는 것으로, 마을을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나누거나 하천 또는 구릉을 기준하여 가르기도 한다. 서로가 돌팔매질을 하며 미리 정해진 시간 동안 싸우는데, 먼저 도망하는 편이 지는 경기다. 안동과 김해, 황해도, 평안도에서 성행하였으며, 일명 척석희(擲石戱)라고도 부른다. 석전은 대보름과 초파일, 단오를 골라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게 그리고 상대방과의 일정에 따라 다르게 시행되었다.

대체로 대보름보다는 초파일에, 그리고 초파일보다는 단오에 더 성행했던 석전은 신라 시대에 석투당(石投)이라 하여 사마귀처럼 전투적인 특수군대를 조직하였었다. 석투당은 고구려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투 대비용으로 활용되었으며, 그에 따른 민속놀이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강점기에는 민족의 단결과 응집된 세(勢)를 방지하기 위하여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가장 성행하였던 때에는 34,000명이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중이 모이는 더군다나 무기와 다름없는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일본에게 언제든지 항거할 수 있다는 뜻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중종(中宗) 5년에 부산포, 염포, 제포 등에 거주하던 왜인(倭人)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석전사들이 왜구 토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다리밟기가 끝난 후 삼문 밖의 아현(阿峴)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몽둥이와 돌을 들고 떼로 싸웠다. 이것을 물가의 전투 즉 변전(邊戰)이라 하는 데,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성안에서도 이를 본따 종로네거리와 비파정(琵琶亭)에서, 성 밖은 만리현(萬里峴)과 우수현(雨水峴)에서 성행하였다.’고 전하는 것처럼 석전은 세세한 규칙이 없어 순간순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전체적인 규칙과 지휘자의 신호에 따라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지는 엄연한 놀이에 속했다. 이 놀이는 김해지방에서도 성행하였는데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나와도 개의치 않아 고을의 수령도 마음대로 제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비슷한 풍속에 대보름달이 떠오를 때 시작되는 횃불싸움이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일본과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고르게 즐겼던 민속놀이인데, 마을과 마을 또는 면 단위로 편을 나누어 주민 대다수가 참여하던 놀이다. 이들은 정초(正初)가 되면 벌써 집집마다 염출한 짚을 틀어 꼬아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줄은 외줄 혹은 두 줄로 엮었으며, 뱀이 달걀을 삼킨 모양, 중앙이 양끝보다 굵은 구렁이 모양 등으로 만들었다. 줄은 마치 지네다리를 연상하듯 8개로 갈라 작은 줄을 만들고, 남녀 혹은 동서로 나뉘어 시합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서쪽이 이기면 풍어가 든다고 믿었다. 대보름에 행해진 줄다리기가 가물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불편해지면 다시 실시하던 지역도 있다.

현재의 일반 행사에서는 짚 대신 화학섬유로 만든 줄을 사용하기도 하는 데, 이렇게 하면 싸움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마을의 단합(團合)과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정신을 배울 수가 없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농경의례(農耕儀禮)의 하나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이었다.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은 용(龍)에 비유되며, 물의 신(水神)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청룡과 백룡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보통은 암줄과 수줄로 구성되는데, 이는 음과 양을 나타내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태양과 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주로 여자들이 이기지만 이것은 많은 남자들이 여자줄에 참가하여 승리를 유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땅에서 얻는 지신(地神)의 도움으로 다산과 풍요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런 일을 시작할 때는 지신밟기부터 걸립(乞粒)에 이르기까지 마을 전체의 행사로 승화시켰는데, 이는 힘든 농사일을 서로 돕고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대동(大同)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전국에 전하는 줄다리기는 매년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실시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특히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전국적으로 주요 18개의 행사 중 6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칠석고싸움, 기지시줄다리기, 순흥줄다리기, 입석줄다리기, 당산줄다리기, 양동줄다리기 등이 대보름에 행해진다. 그러나 추석이나 단오, 백중처럼 특별한 날에 즐기기도 하였다. 줄을 당기는 것은 물론이며 서로 엉키면서 승부를 가리는 것이 고싸움이나 차전놀이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줄을 만들 때에도 상당 기간에 걸쳐 일정한 금기를 지켰으며, 줄다리기가 끝나면 돌을 세운 입석(立石)이나 마을의 당산에 감아놓는 것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현재의 줄다리기는 국제경기로 발전하여 하나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다.

귀신날

정월 열엿새를 귀신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귀신이 집 안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대문에 채를 걸어놓는다거나 문 밖에서 목화씨나 고추씨를 태운다. 그러면 귀신이 채의 눈을 세는 도중에 날이 밝으면 도망가고, 또 목화씨나 고추씨가 타는 냄새로 겁을 먹고 도망간다는 것이다. 또 귀신이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고 하여 모두 엎어놓거나 감추기도 하였다. 만약 귀신이 내 신발을 신고 간다면 그것은 아주 불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상원(上元)의 민속놀이로는 탑돌이가 있다. 탑돌이를 하는 동안 잠깐 스치는 사이 마음에 드는 연인을 만났지만 바로 헤어져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얻은 상사병(相思病)을 ‘보름병’이라 할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세조는 서울 원각사(圓覺寺)의 '탑돌이'로 인한 풍기가 문란하다고 하여 제한하는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 소머리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나무소싸움, 봉죽놀이, 주지놀음 일명 사자놀이, 고싸움놀이, 당산옷 입히기, 감영놀이 혹은 관원놀이, 농기세배, 용호놀이, 돈치기, 사자놀이, 솟대, 영등날에 쓰기 위한 볏가릿대 세우기, 오광대놀이, 고싸움, 섣달그믐의 수세와 같은 보름새기, 제웅치기, 나무조롱달기, 모깃불놓기, 액을 물리치고 수복을 맞이하는 방사(防邪, 放邪)놀이 일명 방실놀이, 차전놀이 일명 동채싸움, 가마니짜기, 곡식 집 밖으로 안 내보내기 등도 있다. 상원에 모깃불을 놓는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안 가나, 여름 모기의 상징적 의미 외에 흙집의 광이나 부엌 또는 허청에 살았던 모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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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