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0. 설날(元日) - 설날풍속, 궁에서의 설날, 현실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05:15

10.5 설날 풍속

설날의 세시풍속은 아주 많다. 새로운 해를 맞는 날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어른이 되기에 조심하여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 1년을 지낼 각오와 희망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런 날에 전날밤 수세를 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도 낮잠을 잔다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였다.

이날은 '으뜸 되는 아침'이라는 뜻으로 원단(元旦) 혹은 원일(元日)이라 하였고, 한 해를 맞는 전통의례적(傳統儀禮的) 풍속들이 다양하게 실시되었다. 이런 풍속들은 홍경모의『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비롯하여 김매순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유득공의『경도잡지(京都雜誌)』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설빔설날 아침은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로 모두가 들떠 있다. 어른들은 작년에 이루지 못한 일을 새해에 이루고 싶은 욕망과 새해에 무사무탈 풍년을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은 설빔과 맛있는 음식으로 명절에 대한 기쁨이 가득하였다.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의 명절기념으로 새 옷과 새 신발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설빔이며, 누구를 가리지 않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준비하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 것이 더 좋은지, 누구 것이 더 많은지 비교하며 자랑하기도 하여 어른들이 곤란한 경우도 종종 생긴다. 물론 어른들의 경우에도 설빔은 있었다. 이참에 두루마기와 도포, 버선, 대님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추운 겨울을 나는 솜옷을 손질하기도 하였다. 세배설빔으로 얻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마친 후, 집안 웃어른들께 새해의 첫 인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한다. 세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세배를 올렸으며, 제사를 지냈던 술로 음복(飮福)을 하였다. 서로 덕담을 나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올린다. 이때 절에 대한 보답으로 다과와 용돈을 주기도 하는 데, 이미 배가 부른 상태이므로 풍성한 세찬이나 세주로 보답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이웃 모두와 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친척에게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의 예의라고 생각하였던 좋은 풍습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정초에 세배를 드리지 못하였다면 7월부터 9월 사이에 피는 미나리꽃이 지기 전까지는 세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무리 늦더라도 반드시 차려야 하는 격식 중의 하나였다는 의미다. 어려운 웃어른을 만나면 일 년 내내 큰절을 하는 풍습과 무관하지 않다. 예전 여자들의 문밖출입은 자유롭지 못하여 세배도 마음대로 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초사흘이 지나면 여자 하인을 시켜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께 인사를 올렸는데, 이처럼 여자 하인이 내 대신 문안을 한다 하여 문안비(問安婢)라 불렀다. 이때의 문안비는 보내는 사람이 찾아 온 것에 버금가게 여겨 세찬을 대접함은 물론 답례문안비를 보내기도 하였다.

세함(歲銜)

세함은 새해의 세배를 대신하는 것으로, 빠트리기는 서운하지만 그럼에도 찾아뵙기는 곤란한 경우에 활용되었다. 관아의 아전과 종을 아우르는 서예(胥隸), 그리고 각 영문의 장교와 나졸을 합한 교졸(校卒)들은 상관이나 훈장 댁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한지(韓紙) 명함(名銜)을 드렸다. 왕기(王錡)의『우포잡기(寓圃雜記)』에 ‘매년 설날이면 주인들은 설을 축하하러 나가고, 다만 백지로 만든 장부와 붓과 벼루만 책상 위에 배치해 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만 적고 가기 때문에 영접하고 전송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성묘(省墓)설날 아침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살펴보는 것을 성묘라 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으니 살아계신 조상께는 세배를 드리고,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신 조상께는 묘소에 가서 알리는 것이다.

예전 대가족제도가 성행할 때에는, 수많은 자손들이 집안 어른으로부터 조상(祖上)의 무용담(武勇談)이나 효열담(孝烈談) 등을 들어가면서 성묘에 나서곤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가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달라 한꺼번에 모이는 일이 쉽지가 않자 점차 사라져가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각자의 편리성에 의해 짬나는 대로 수시로 성묘를 하는 풍습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성묘는 설날과 한식날, 그리고 단오와 추석날에 실시하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비슷한 내용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서는 일월신에게 절을 하며, 제주에서는 사당에서 굿을 하였다. 이때 굿당은 산이나 냇물, 연못, 나무를 가리지 않고 편리한 대로 이유가 있는 대로 정하여 섬겼다. 이러한 제주의 풍속을 화반(花盤)이라 한다.

세찬(歲饌)과 세주(歲酒)설날이 되면 물론 먹기도 하지만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라도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이런 때 새해를 맞이하여 만든 모든 음식을 세찬이라 하고 술은 세주라 불렀다. 물론 한자(漢子)로 보아 글자의 뜻만 따진다면 다같이 한 해의 어떤 시기에 먹는 반찬이라는 세찬(歲饌)에서는 같을 수 있으나, 세찬의 처음 뜻은 설날의 반찬이었다. 그러니 추석절 차례상에 사용할 음식은 세찬이 아니라 그냥 제수 음식(祭需飮食)이 되는 것이다.

세찬은 살림살이의 여유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기본적으로는 쌀밥에 흰떡과 쇠고깃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조금 어려운 집에서는 쇠고깃국 대신 닭고기국을 끓이는 경우도 있었고, 만두소나 떡국 국물을 만드는 데 사용할 꿩고기 대신 닭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오래전 풍습에는 소를 1년 중 정초에만 잡을 수 있었다. 옛 농경사회에서 아주 긴요한 소의 무분별한 도축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의 도축을 법으로 금하다가, 원일(元日)을 기하여 특지(特旨)를 내려 3일간의 도축을 허락하였다.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이 쓴 『원일잡시(元日雜詩)』에 의하면 ‘동쪽 교외 소는 흥인문으로, 남쪽 교외 소는 숭례문으로, 양쪽 문으로 들어오는 소가 하루에 천 마리인데 도성 안에 살아남은 소는 한 마리도 없다.’고 하였다. 이런 예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송금(松禁), 쌀로 술을 함부로 빚지 못하게 하는 주금(酒禁), 그리고 소를 함부로 잡지 못하게 하는 우금(牛禁)으로 나타났다.

도소주(屠蘇酒)

설날 아침 차례를 마친 후 마시는 술은 넓은 의미의 음복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좁게는 도라지, 산초(山椒), 방풍(防風), 백출(白朮), 육계피(肉桂皮), 진피(陳皮) 등을 넣어 빚은 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 도소주는 한 해의 악귀를 물리치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기원이 담겨 있다.『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는 도수주를, 그리고『사민월령(四民月令)』과『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산초나무 술 즉 ‘초백주(椒栢酒)’를 마신다고 적고 있다. 복조리걸기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사라는 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온다. 자정이 지나 벌써 설날이 되었으니, 집 안에 필요한 1년치 복을 다 받으라는 소리다. 그러면 사람들은 1년 동안 사용할 복조리를 한꺼번에 사서 걸어놓는다. 그것도 이른 신새벽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여 시간을 미루지 않고 서둘러 장만했다.

이것은 조리로 쌀을 고르면서 필요한 곡식만 걸러내듯이 좋은 복만 걸러 들어오라는 의미였으며, 걸어둔 복조리 안에는 돈이나 엿, 농사에 쓰일 씨앗 등을 넣어 풍성해지기를 기원하였다.

그런 복조리는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으며,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겹치는 곳에 습기가 차고 먼지가 많이 끼는 단점이 있다. 그러다가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조리질할 때 갑자기 못쓰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새로운 조리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때서 바쁘게 사러 가지 않고 옆에 걸어두었던 복조리를 가져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통이었다. 여기에는 행여 밥을 못 지어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근심을 덜어내는 준비성이 담겨 있다.

조리는 보통 조릿대나 싸리로 만들며, 조리로 거르면 복만 남고 헛것은 모두 빠져나가라는 의미로 ‘복조리’라고 부른다.

삼재막이〔三災法〕

나이가 들어 삼재(三災)에 해당하는 사람은 자기 집의 문설주에 매 세 마리를 그려 붙임으로써 그 해의 액(厄)을 막는 방편으로 삼았다. 삼재란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의 3가지를 말하며, 삼재에 들면 이 기간에는 언행(言行)을 삼가 조심하여 삼재의 해(害)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삼재는 다른 말로 병난(兵難), 질역(疾疫), 기근(飢饉)을 말하기도 하므로, 일상적인 활동에서 개인의 세세한 잘잘못을 삼재로 치부하여 삼재막이로 현혹(眩惑)하는 것은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삼재는 사람의 건강이나 재물, 인간관계, 승진, 사업 등 모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니 원래의 삼재와는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말을 맞추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듣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참고로 삼재에 해당하는 해를 보면 뱀띠(巳), 닭띠(酉), 소띠(丑)는 돼지띠, 쥐띠, 소띠 해에 삼재가 들고, 원숭이띠(申), 쥐띠(子), 용띠(辰)는 호랑이띠, 토끼띠, 용띠 해에 삼재가 들며, 돼지띠(亥), 토끼띠(卯), 양띠(未)는 뱀띠, 말띠, 양띠 해에 삼재가 들고, 호랑이띠(寅), 말띠(午), 개띠(戌)는 원숭이띠, 닭띠, 개띠 해에 삼재가 들었다고 한다.

삼재에 해당하는 3년 중 첫해는 들삼재라 하여 들어오는 삼재, 중간은 눌러 앉았다고 하여 눌삼재, 마지막 해는 나간다고 하여 날삼재라 부른다. 이날삼재는 악귀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 심술을 부리고 가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믿었다.

홍수매기

홍수매기는 그해에 닥칠 횡수(橫數)의 재앙(災殃)을 붙들어매어 막는다는 제례의식(祭禮儀式)으로, 횡수막이의 변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섣달그믐이나 신년 초에 신수(身數)를 보고 무당을 불러 새해에 예상되는 횡수를 막는 의식이다. 설사 횡수가 없다 하여도 좋은 복을 바란다는 의미로 날을 받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홍수매기는 삼재막이와 유사한 풍습이다. 이런 경우 안택고사와 동시에 치르기도 한다.

무당 또는 경꾼은 밤새 지신제(地神祭)를 지낸 뒤 새벽에 삼거리로 나가서 홍수매기를 한다. 이때 떡시루, 북어, 과일, 돈, 겉벼 한 말, 수수팥단지, 쑥대나 수숫대로 만든 활과 24방위의 장군 이름을 쓴 기다란 백지(白紙), 액살(厄殺)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쓴 백지를 가지고 나간다. 수수팥단지에 24방위의 장군이름을 쓴 긴 백지를 붙이고, 화살촉은 수수팥단지로 삼는다. 활은 겉벼를 담은 말에 꽂아 놓은 뒤 그것을 사방으로 튕겨서 쏘는 것이다.

무당이나 경꾼이 주문(呪言)을 왼 후 사방팔방에 화살을 쏘는데, 먼저 활촉 즉 수수팥단지를 액살(厄殺)이 든 사람의 머리에 잠시 댔다가 쏜다. 이때 모든 방향에서 오는 액살을 막고 잡귀도 쫓아낼 수 있도록, 활촉을 동서남북으로 모두 쏜 뒤 소지(燒紙)를 올린다.

홍수매기가 끝나면 준비한 음식을 한곳으로 가져가 모두 나누어 먹었으며, 돈도 아무나 주워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것은 마을 사람 전체가 액막이를 하고 복을 받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초저녁에 풍장소리가 나면 벌써 액막이 홍수매기를 짐작하고 그 뒤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와 더불어 제사를 지낸 음식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풍속도 생겨났다.

어떤 곳에서는 정월 14일에 드리며, 제물로는 쌀 3되 3홉에 팥을 넣어 떡을 찔 때 3겹으로 찐다. 다음에 소의 창자 3자 3치와 짚신 3켤레, 돈 3냥을 상 위에 올려놓는다. 이 밖에도 치성을 드릴 사람의 생시(生時)를 적은 단자, 저고리 등 여러 소지품을 놓고 빌었다. 이때 3이라는 숫자는 삼재막이를 하는 것과 같이 끝낸다는 의미로 믿었다. 지금도 무엇을 하다가 처음 의도했던 대로 안 될 경우, 남은 미련 때문에 ‘삼세판은 하자’고 하기도 한다.

안택고사(安宅告祀)

정초가 되면 가정의 평안을 비는 안택고사(告祀)를 지낸다. 줄여서 안택(安宅)이라고도 하는 데, 지신제는 성주신, 조왕신 등 주요 가신(家神)에게 지낸다. 제관(祭官)은 주로 푸닥거리를 위주로 하던 여자 무당 즉 ‘선거리’가 맡거나, 무계(巫系)에서 강신(降神) 초기의 남자 독경자(讀經者) 즉 ‘경꾼’이 맡는 경우도 있다. 강신이란 신내림을 말하며, 신이 특정인을 지정하여 신계와 인간계의 중간에서 가교역을 하는 무당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안택제를 시작하기 전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 세 무더기를 갖다 놓아 부정(不淨) 여부를 가린다. 제주가 되는 주부(主婦)는 목욕재계하여 심신(心身)을 정결히 한 후, 저녁 식사 후 어둑해지면 조왕신, 성주신, 지신의 순서로 지신제를 지낸다. 부엌에서는 시루를 떼지 않은 채로 조왕신에게 빌고, 시루를 떼어낸 다음 성주신 앞에 놓고 제를 올린다. 이러는 사이 밤이 깊어지면, 시루떡을 또 하나 쪄서 뒤뜰 즉 뒤쪽 울안에 있는 지신(地神)에게 올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새벽이 밝아온다.

아기를 낳지 못한 가정이나 혹은 어린아이가 있는 집 안에서는 새벽이 되면 밥 세 그릇과 미역국 세 그릇을 놓고 삼신(三神)에게 제를 지내기도 한다. 삼신은 아이를 점지하는 신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대보름의 안택고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의 옛 풍습에 등장하는 금줄은 노란 새끼를 왼편으로 꼬아 붉은 고추를 달았으며, 푸른 소나무 가지도 달았다. 그리고 백지(白紙)를 묶어서 검정색이 돋는 성황당이나 당산나무에 맸다. 여기에 등장하는 색이 바로 오방색(五方色)이며, 상생의 원리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색으로 표현하면 청, 적, 황, 백, 흑색이 되며, 이것을 정색(正色)이라 한다. 이런 색은 절의 단청을 비롯하여 우리 음식의 구절판, 한지공예함, 복주머니, 색강정, 색동저고리나 시루로 쪄낸 무지개떡에서도 나타난다.

지신밟기

지신밟기는 집의 터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주인의 기운보다 강하면, 거주하는 주인에게 액운이 온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주인은 집터를 누르고 자신이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행위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지신밟기다.

이 행사는 정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이어지는데 자신 스스로를 위로하는 풍습으로, 마을의 청장년들이 사대부(士大夫) 혹은 팔대부(八大夫)와 포수(砲手)로 꾸며 노는 놀이다. 포수는 짐승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총을 매었으며, 등 뒤의 망태기에는 꿩을 잡아넣은 채로 총 쏘는 시늉을 한다. 한편 사대부와 팔대부는 관을 쓰고 위용을 보이며 점잖게 행렬을 주도한다. 이때의 팔대부는 특별한 관리나 벼슬아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사대부에 빗대어 그냥 만들어낸 것으로 지신밟기에서만 등장하는 양반네를 지칭한다.

지신을 밟는 지신패는 풍물이나 풍장을 치는가 하면 풍물굿 일명 풍장굿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지신밟기와 다리밟기를 동시에 하기도 하여 마을의 공동의식을 행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본래는 마을의 지신(地神)에게 드리는 행사였지만, 마을의 우물이나 도로, 당(堂)은 물론 개인의 집에 들어 성주신과 조왕신 등 가신(家神)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로까지 퍼져나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액초복(除厄招福)하여 1년 내내 무병하고 집 안에 화평이 찾아온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앞에서는 지신패가 징이나 꽹과리, 장구, 북 등을 치고, 그 뒤에 주민들이 열을 지어 따라 다닌다. 먼저 발문 읽기를 한 후 대문 앞에서 문굿이라 하여 한바탕 방문 인사를 하면서 주인에게 청하는 형식을 취한다. 승낙을 받으면 집 안에 들어서서 마당을 한 바퀴 돈 후 대청에 촛불을 밝히고 대청굿을 한다. 이 대청굿은 성주굿이라 하여 집안의 기준이 되어 가장 역할이 큰 귀신에게 하는 굿이다. 다음은 일명 정지굿이라 하는 조왕굿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장만하는 부엌에서 실시한다. 커다란 솥뚜껑을 뒤집어 놓으면 주인이 쌀을 담은 대접을 얹고 그 위에 촛불을 켜면 시작된다. 마당, 뒤뜰, 부엌, 광을 돌아다니며 땅을 밟는 시늉을 한다.

다음은 샘굿으로 깨끗한 물이 철철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굿을 한다. 이때의 샘굿은 칠석날의 샘굿이나 기타 샘굿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어서 철륭굿을 하는 데 된장이나 간장 등 장맛을 좋게 하는 의미로 장독대에서 지낸다. 마지막으로 집안의 부를 일으키는 의미에서 곡식을 저장하는 광에서 광굿을 한다. 광굿은 일명 곡간굿이라고도 한다. 곡간에서 식량을 빼먹는 쥐를 없애고 재물이 쌓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떠나면서 술굿을 하기도 한다. 이 술굿은 주인이 고맙다는 답례로 차려 놓은 술상을 둘러서서, 감사의 예를 드리고 마당의 지신을 달랜다. 이때 주인은 집안의 형편대로 떡과 술로 상을 차려 대접하며, 여유가 있으면 별도의 답례 물품도 준비하였다.

경남 김해시 가락면 대사리에 전하는 정초(正初)의 지신밟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월 초이틀이 되면 주민들이 지신밟기를 할 ‘지신패(地神團)’를 꾸민다. 지신패는 우두머리로 영좌 1명이 있고 그 밑에 경리를 담당한 공원과 상쇠, 종쇠, 징, 호적, 장구, 북, 소고(小鼓), 포수, 사대부, 사동, 각시, 기잽이 등 35∼36명이 한패로 구성된다.

김해시는 이런 풍속을 시내 곳곳에서 재현하고 있는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기(旗)를 앞세우고 민가를 돌며 요란한 풍물을 울리면서 시작한다. 이런 행위를 통틀어 풍장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어 집 앞 대문에 다다르면 ‘문열이쇠’를 치고 울안에 들어서면 20분 정도의 ‘지신쇠’를 치며 지신을 밟는다. 이때도 상쇠를 선두로 하여 모둠진법, 태극진법, 팔자진법, 덕석말이진법 등을 치고, 대청의 성주굿, 부엌의 조왕굿, 장독대의 철용굿, 우물의 용왕굿, 곡간의 고방굿, 외양간의 우마굿, 변소의 측간굿을 친다.

각 굿을 치는 자리마다 소반에 쌀 3되를 부어놓되, 그 위에는 쌀을 채워 숟가락을 꽂은 가장(家長) 즉 대주(大主)의 밥그릇을 놓고 실타래를 건다. 그리고 소반 양쪽에 촛불을 켜고 정화수 한 대접과 실과(實果)를 진설(陳設)한다. 그러면 종쇠가 굿상 앞에서 축원을 하고 상쇠가 사설을 매긴다. 상쇠는 풍장을 지휘하는 책임자이며 다음은 중쇠, 그리고 말(末)이 종쇠다. 이들은 꽹과리를 치면서 박자를 맞추고 징이나 북, 장구를 이끌어간다.

중간에 철륭굿 일명 철룡굿이 끝나면 주인은 술상을 차려 지신패들이 쉬게 한 후, 기운을 얻으면 다음 굿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상에 놓은 쌀과 돈은 걸립(乞粒)으로 받아들여 공원(公員)이 챙긴 후 마을의 공동 경비로 사용한다. 한 집이 다 끝나면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데, 이때는 ‘길쇠’를 쳐서 흥을 돋우고 마을 축제분위기를 연출한다.

덕담(德談)

새해 들어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타인(他人)의 안부를 묻고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을 덕담이라고 한다. 물론 이 덕담은 꼭 새해에만 하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풍습이다. 이런 덕담은 그 사람의 형편에 맞춰 좋은 격려를 해주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험에 꼭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이번에 순산(順産)하시오.’ 등과 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손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덕담할 때는 말하는 사람이 시키는 것을 윗사람이 듣는 형식인 것은 삼가야 한다. 굳이 말이 거창하지 않더라도 글자 그대로 듣는 사람이 바라는 바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취업이 힘든 때에 ‘올해는 꼭 취업을 하거라.’ 혹은 혼기를 놓친 친척에서 ‘올해는 꼭 결혼하거라.’ 하는 식의 위로는 피하는 게 좋다.

청참(聽讖)설날 새벽에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사람이나 짐승 소리, 물소리와 같이 처음 들리는 소리로 1년의 신수(身數)를 점치는 신수점(身數占)이 있다. 보통은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소리나 까마귀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거나 불행이 올 징조라고 믿었다. 이는 사람이 느끼는 길조(吉鳥)냐 흉조(凶鳥)냐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말이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서는 모든 동물의 소리는 길조(吉兆)라고 여겼는데, 이는 사람이 이런 동물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좋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중국에서도 문 밖으로 나가서 조왕신이 알려준 방향으로 거닐다가 첫 번째 들리는 소리를 듣고 새해의 길흉을 점쳤음을 적고 있다.

윷점(柶戱)

설날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에 연날리기와 윷놀이가 있다. 이때 윷으로 점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윷가락을 3번 던져서 나온 괘를 하나로 합하여 신수를 보는 것이다. 원래 윷가락은 짧게 자른 싸리나무 2토막을 반으로 쪼개서 사용하였지만, 요즘은 아무 나무나 구하기 편리한 대로 만들고 있다.

이때 사용하는 점괘는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마치 토정비결과도 같이 정해져 있으며, 그 내용은 별도로 첨부한다.

윷놀이

윷점과 달리 윷으로 경기를 하는 방법이다. 정초 양지바른 곳이나 따뜻한 사랑방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즐겼던 놀이로, 척사(擲柶) 혹은 사희(柶戱)라고 하였다. 가을추수가 끝나고 농한기에 여러 가지 놀이가 행하여지거나 명절이 되어 방에 들어앉게 되면서부터 윷놀이는 우리의 생활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놀이가 되었다.

윷은 부녀자용으로 박달나무를 곱게 다듬고 채색하여 예쁘게 만들었으며, 남자용으로는 밤나무를 베어다 크게 만들었다. 남자용은 직경 3cm 되는 나무를 길이 15cm쯤으로 잘라 만들었는데 껍질은 검고 속은 흰색이므로 희미한 등불에서도 안팎이 잘 보인다. 윷짝 즉 윷가락은 지방에 따라 다르게 전한다. 장작윷은 장작 모양으로 크게 만든 것이며, 밤윷은 밤톨만 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재료는 아무것이나 보통의 단단한 나무는 상관없으나, 박달나무, 오래된 싸리나무, 밤나무 등이 주를 이뤘다.

윷놀이는 두 사람 이상의 짝수면 여러 편으로 짜서 놀 수 있다. 말을 두 개 이상 겹쳐서 놀 수 있으므로 말이 가는 도중에 적에게 잡히지 않도록 길을 잘 선택하는 방법과, 멀리 달아날 수 있는 높은 점수를 내는 것이 좋다. 부녀자는 내방에서, 사내들은 사랑방이나 마당에서 윷을 놀았다.

한편 날씨가 추운 지방에서는 대체로 실내에서 윷을 놀기 때문에 크기도 아주 작았다. 평안도에서는 검붉은 자주색 콩의 한 면을 자르고 눈을 새겨서 윷짝을 만들었다. 크기가 콩만 하므로 콩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변형된 윷으로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산윷(散윷)이라는 것도 있었다. 수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도구인 산가치나 콩, 팥 등을 늘어놓고, 윷가락을 던진 후 나오는 수만큼 거둬들여서 많은 편이 이기는 방식이다.

이때 윷에 나오는 각 사위의 이름은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의미한다. 이것은 옛 부여족(夫餘族)이 다섯 마을에 각각 한 종류씩 나누어주고 빠른 번식을 위하여 경쟁을 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집 안에서 기르는 가축을 형상화한 것으로, 항상 가까이에 두고 보살피며 더불어 산다는 뜻도 들어 있다.

윷놀이의 말판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별자리 28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모걸걸’로 가장 빨리 나오는 코스를 동지, 한 바퀴 돌아서 가장 늦게 나오는 코스를 하지, 처음 ‘모’길에서 중심점을 통과한 후 6개를 간 후 모로 나가는 것을 춘분, 모에서 모로 직진한 후 중심점을 통과하여 나올 수 있는 코스를 추분이라 한다. 춘분과 추분은 그 숫자가 같으나 ‘모’다음에 어떤 것이 먼저 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오행점(五行占)

나무를 잘라 장기알과 같이 만든 다음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五行)을 그린다. 다음에 이 나무를 던져서 점괘를 얻으면 그것으로 새해의 신수(身數)를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다섯 개의 나무가 있다고 하여 오행점(五行占)이라 부른다.

농점(農占)설날에 꿈을 꾸면 풍년이 들고 꿈을 꾸지 않으면 평년작이 든다고 하였다. 설날 아침 소가 일찍 일어나면 풍년이 들고, 날이 샐 무렵에 까치가 울면 마을이 태평하고 좋은 일이 생길 것으로 믿었다. 한편 까마귀가 울면 마을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차례를 지내기 위해 부산한 설날 아침이면, 으레 소도 일찍 깨어날 수밖에 없었으니 항상 풍년이 들어 우리가 먹고 살기 좋아졌나보다. 야광귀쫓기(夜光鬼逐)설날 이브가 되면 야광귀(夜光鬼)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이 있으면 마음대로 신고 간다고 믿었다. 이때 신발을 도둑맞은 사람은 그해 일 년 동안 신수〔身數〕가 나쁘다고 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발을 방이나 다락에 감춰두었다. 또 이 야광귀를 쫒아내기 위하여 왼손으로 꼰 새끼로 금줄을 만들어 걸어두거나, 곡식을 고르는 체를 대문간에 걸어두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체에는 눈⁾目)이 많아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이 발휘되었듯이, 죽은 사람이 상여 나갈 때에도 눈이 넷 달린 가면(假面) 즉 황금사목(黃金四目) 탈을 써서 귀신을 쫒아냈다.

혹자는 야광(夜光)을 약왕(藥王)의 발음이 변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약왕은 불교의 부처 중에 약(藥)을 담당하는 부처로, 얼굴 형상이 매우 험상궂어 이를 본 아이들은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더러는 부족하고 한편으로는 모자란 신 즉 이강신(羸羌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십이지일(十二支日)설날에서부터 12일 동안의 각 일진(日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기리는 것이다. 이날은 그해에 해당하는 간지(干支)의 동물에 따라서 몸에 털이 있으면 유모일(有毛日), 용이나 뱀처럼 몸에 털이 없으면 무모일(無毛日)로 나눈다. 이때 설날이 유모일이면 그해는 오곡이 잘 익어 털처럼 많은 수확으로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섣달그믐밤부터 설날이나 정월대보름날에 걸쳐 과실나무가 있는 집에서는 올해에도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행사를 한다. 과실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놓으면 그해 과실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이것을 과일나무 시집보낸다고 하는 데, 이는 나뭇가지의 음양에 의한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나뭇가지에 돌을 올려놓음으로써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꽃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의미와 바른 수형(樹形)을 하여 고루 자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울안에 있는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배나무, 석류나무 등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울타리 안의 나무도 한식구와 다름없으니, 장성(長成)한 딸을 시집보내듯 나무도 시집을 보내야 많은 과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였다고 할 것이다.

널뛰기

여자들은 정초에 널뛰기를 하였다. 긴 판자 끝에 서로 마주보고 서서 교대로 뛰며, 누가 높이 올라가나 시합하는 것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널을 처음 뛰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균형을 잡기가 어려우나, 숙달된 사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시계와도 같다.

정초에는 누구나 설빔을 장만하여 아름답게 단장을 하였으니 담장 너머로 보일락 말락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치맛자락과 옷고름은 한 폭의 그림이라 할 것이다. 널뛰기는 여자들이 나무판자를 놓고 뛰며 논다고 하여 여판도희(女板跳嬉)라고도 하였다. 날이 춥다고 하여 방안에 앉아만 있으면 다리에 힘이 약해지는데, 가끔은 이처럼 운동을 하면서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다.

연(鳶)날리기

정초 청소년들이 즐기던 놀이 중에 연날리기가 있다. 초겨울부터 늦겨울까지 날리던 연은 대보름날 저녁이 되면 액막이연으로 변한다. 연에 액(厄)이라는 글자를 적어 연을 띄워 보내는 것으로, 나의 액을 모두 가지고 떠난다고 믿었던 놀이다. 연은 한지에 대나무살을 붙여 만들었는데 보통은 가로 두 자에 세로 석 자의 비율로 하였다. 종이의 중앙은 구멍을 내어 바람의 균형을 잡도록 하였으며, 대나무살 5개로 모양을 잡아주었다. 연은 맞바람을 받아야 잘 오르며, 얼레라는 기구에 연실을 감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얼레를 연자세라고 하였는데, 이 연자세는 연의 실을 감고 풀어 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웅덩이의 물을 퍼서 올리는 무자위를 물자세라고 부르던 것과 연관이 있다.

연은 조용히 날리기도 하였지만 필요한 때에는 연싸움도 하였다. 연실을 서로 얽어매고 잡아당겨서 연실이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경기다.

토정비결보기(土亭秘訣)

연초가 되면 모든 사람들은 1년의 신수가 어떠할지 궁금하여 미리 알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이유로 점집을 찾기도 하지만, 400여 년 전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지은〔토정비결〕을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사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토정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훨씬 뒤에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일년지계재원단(一年之計在元旦)’이라는 말이 있듯이, 1년의 모든 신수(身數)도 원단(元旦)에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초가 되면 점복사(占卜士)에게 점(占)을 보거나, 한 해의 신수점(身數占)을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방법으로 본인이 직접 보기도 하였다.

정초 뱃고사 정월 초하루가 되면 선주(船主)들은 배에서 고사(告祀)를 지낸다. 뱃고사는 배안에 있는 성주신(星主神)에게 주과포(酒果脯)를 차려놓고 한 해의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육지 마을에서 성황당에 제사를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포구에 있는 성황당에서 1차 제사를 지낸 후 2차로 무녀(巫女)를 데리고 가서 축원(祝願)을 한다. 자연의 위대한 힘을 어쩌지 못하는 어부들로서는 정초에는 풍어를 기대하는 고사를 지내고, 가을에는 감사의 의미로 배 안에 있는 성주신(星主神)에게 안택(安宅)을 올린다. 뱃고사를 지낼 무렵 상가집이나 어린애에게 부정(不淨)이 나면 으레 마른 짚에 불을 붙이고, 뱃머리인 이물에서부터 휘둘러 고물에다 버리는데 이것을 '부정쓸기'라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정이 가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뱃고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촌의 공터에 모여 용왕에게 풍어와 무사를 기원하는 풍습은 동해안의 별신굿, 서해안의 배연신굿과 대동굿, 남해안의 별신굿 등으로 전해온다 .

기타 제기차기, 썰매타기, 딱지치기, 자치기, 팽이치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도 있지만 이들은 반드시 정초에만 하는 놀이가 아니라, 농한기에 겨울을 나는 놀이로 생활의 지혜에 속했다.

법고(法鼓)

승려들이 저자거리에 나가 등에 지고 있는 북을 치는 것을 법고(法鼓)라 한다. 또 일반인에게 좋은 문구를 보여주며 시주를 하거나 종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하는 문구 즉 모연문(募緣文)을 펴놓고 방울을 울리며 염불(念佛)을 하면 사람들이 돈을 던져주었다. 이때 시주의 의미로 떡 두 개를 주었다가 돌아서서 한 개를 얻어먹는데, 이렇게 중의 떡을 얻어먹으면 마마 즉 두동(痘腫)을 큰 탈 없이 잘 넘긴다고 하였다. 모든 절의 상좌승(上座僧)은 재(齋)를 올리는 데 필요한 쌀을 구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다섯 마을에 걸쳐 바랑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경문(經文)을 왼다. 그러면 해당하는 집에서 쌀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누군가가 복을 빌어주고 누군가가 답례를 하는 풍속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승경도(陞卿圖)놀이

승경도놀이는 승정도(陞政圖)놀이, 종경도(從卿圖)놀이, 종정도(從政圖)놀이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데,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부인들이 즐기던 실내 놀이다. 5각형 막대 모양의 윷가락 1개에다가, 각 면의 모서리마다 하나에서 다섯까지 홈을 파서 만든 윷을 던진다. 처음에 나오는 괘로 문(文), 무(武), 은일(隱逸), 남행(南行)을 선택한 후, 다음부터 나오는 괘는 말판에 따라 진행한다. 이때 홍문관 같은 벼슬에 해당하는 지점에 닿으면, 왕에게 직언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 벌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판에서도 벌을 줄 수 있다. 사약, 귀양, 승진, 장원, 합격 등의 말판을 사용하여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에 대한 기대와 각오를 다지던 놀이다.

소발(燒髮)

소발 즉 머리카락 태우기는『동국세시기』에 언급되어 전한다. 설날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남녀가 지난 일 년 동안 머리를 빗을 때 빠진 것을 모아 태웠다. 이 머리카락은 주머니(臘紙待)에 담아서 빗함 속에 두었던 것으로, 전염병을 물리치고 머리가 빠지는 것처럼 좋지 않았던 액운을 떨쳐낸다고 믿었다. 또 머리카락은 음의 기운으로, 음귀(陰鬼)와 관련되어 방안에 함부로 굴러다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현재도 귀신이 나타날 때는 거의 대부분이 여자이면서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을 하는 것도 다 이것과 연관이 있다.

10.6 궁에서의 설날

궁궐에서 설날 아침 왕이나 왕세자 등이 세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문(古文)에 설날 즉 원일(元日)이 되면 밝고 맑은 때를 골라 영의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정전의 뜰에 모여 새아침의 하례를 올린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일정한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행사는 동지나 제석에도 있었는데, 이때는 오후 4시 즉 신시(申時)에 치렀다. 또 ‘왕이 제학을 시켜 시를 짓도록 한 후 합격한 글귀는 대궐의 기둥이나 문 등에 붙이게 하였다.’고 적었다. 세화나누기도 세시풍속 중의 하나다.

세화

세화(歲畵)는 기원(祈願)을 담은 그림으로, 한 해의 악귀를 쫓고 다복하며 무병장수하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세화에 호랑이나 용, 학, 해태, 봉황, 사슴 등 십장생을 등장시켰고, 소생하는 의미의 매화나 동백과 변함없는 괴석, 수석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녀가 포함되었다. 이때 민초들은 전문 그림꾼을 살 형편이 안 되었으므로,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느냐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면 족했던 것이다.

궁궐에서 세화(歲畵)를 하사하기 위하여 도화서 직원 30명이 연간 20장씩, 합격 후 다음 발령을 기다리는 임시 도화서직원 즉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30명이 연간 30장씩을 그려 무려 1,500장이 그려졌다. 이들 작품으로는 오봉산일월도, 십장생도, 해학반도를 비롯하여 미인도, 수렵도 등이 남아 있다.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선녀, 수성, 직일신장, 금신장, 갑신장, 십장생 등이었다.

그중에서 장군상은 특별히 악귀를 몰아내는 것으로 믿어 대문에 붙여 놓았는데, 이를 문배(門排)라 하였다. 세화가 악귀를 쫓는다거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은 분명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세화는 부적(符籍)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오히려 민속화(民俗畵)나 풍속화(風俗畵)와 같은 형태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하(朝賀)

설날 아침 또는 동지나 왕의 즉위일, 왕의 탄신일 등에 왕과 문무백관이 하례(賀禮)를 가진 후 덕담을 나누던 것을 말한다. 신하는 축하를 드리고, 왕은 교서(敎書)를 내리는 등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특히 정조는 새해에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각 관찰사에 내렸다고 한다.

또 지방에 있는 관리들은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지역의 특산물 등을 보내 축하하였다. 이때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고 지난해의 수고를 치하하였다. 또 조정의 관리나 관리의 부인이 장수하면 그 나이에 맞게 각기 다른 선물도 하였다.

10.7 설날의 먹을거리

설날에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세찬과 세주가 있다. 따라서 각종 음식은 장만할 수 있는 만큼 여러 종류를 준비하였으니,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세찬에 준비하는 음식들은 밥은 물론, 흰떡과 시루떡, 인절미, 떡국 등을 포함하여 온갖 나물과 탕류가 등장한다. 또 특별히 만드는 식혜라든지 수정과와 한과류도 중요한 설 음식의 하나다.

또한 음료 역시 각종 술을 비롯하여 많은 과실로 담근 차(茶)도 등장하였는데, 시절 또한 추워서 음식이 잘 상하지 않아 보관하기에도 적당하였다. 일반적인 설 음식으로는 떡과 떡국, 만둣국, 떡볶음, 떡산적, 떡잡채, 생선찜, 편육, 족편, 녹두빈대떡, 갈비찜, 사태찜, 삼색나물, 신선로, 전, 겨자채, 잡채, 나물, 인절미, 약과, 다식, 정과, 강정, 산자, 절편, 수정과, 식혜, 각종 과일 등을 들 수 있다. 설날의 대표 음식인 떡국도 보통의 떡국떡, 생떡국떡, 조랭이떡, 색떡국떡 등 다양한 떡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국물로 사용되는 장국은 닭장국, 사골국, 쇠고기장국, 바지락장국, 굴장국 등이 있고, 고명에도 파와 김 그리고 실고추는 물론이며 황백지단, 다진고기고명, 고기산적 등이 있었다. 요즘에도 김치떡국, 카레떡국, 들깨연두부떡국, 개맛살시금치떡국, 졸인토마토떡국, 굴떡국, 잣떡국, 깨떡국, 시금치떡국이 있다.

10.8 설날과 현실

설날은 어느 누구에게나 즐거운 명절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반가운 친척들을 만나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설 명절을 기다리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설날은 동절기이므로 추석에 비해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따듯한 방안에 있어도 되는 좋은 날에 속하며, 어디에 가든 먹거리가 넘쳐나는 날에 속한다. 그러나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설 준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제수 음식을 차리는 것은 물론이며 식구들의 설빔을 마련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최근에 들어서도 어른들께 드릴 선물과 용돈이 부담스럽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의 설빔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세뱃돈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떡이나 과일이 전부였지만 요즘에는 돈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옛것이 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현대인이 수행하기에 부담을 느끼는 명절이라면, 옛것을 되살려 그대로 따르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고유 풍속으로 남겨둘 필요는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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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