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유시민/ 웅진씽크빅/ 2009.10.27/ 317쪽
저자
유시민 : 1978년 서울대학교 입학 한 후 시국사건에 휘말려 두 차례의 제적을 당한 후 1991년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독일 요한네스 구텐베르크대학에서 5년간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2002년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하여 대표를 맡았다. 16대와 17대 국회의원, 44대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다. 시민운동가, 칼럼니스트, 방송인으로 활약을 하였다.
저서에『거꾸로 읽는 세계사』,『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유시민의 경제학』등이 있다.
줄거리 및 감상
이 책은 유시민이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혹은 예전에 읽었던 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대학시절 떳떳하게 내놓고 읽지 못하던 책을 숨어서 읽었을 때와 지금 다시 읽었을 때의 감정을 비교하면서 책이 주는 교훈을 되새기는 내용이다.
표도르 토스토옙스키 작품인『죄와 벌』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이 이토록 하찮은 일을 하다니! 이 말은 소설에 나오는 말로, 어떤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평상적인 일상사의 일에 신경을 쓰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은 모두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런 일이란 살인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생각하기 힘든 큰일이라는 뜻이다.
리영희의『전환시대의 논리』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린 아이만 벌거벗은 것을 보고 왜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마음씨 나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실로 짠 옷이라는 말에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없는 옷을 보면서 아주 멋있는 옷이라는 말을 한다. 이때 아이가 임금님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감히 어른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용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실은 아이가 말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임금님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어려운 일에 대하여 용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한다. 말하자면 어른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마치 진실인양 정당화시키는 것을 꼬집는 것이 교훈이다.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 군인을 파견한 것이 정당한 것처럼 꾸며졌지만 사실은 명분이 없는 말하자면 미국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서 전쟁을 일으켰고, 우리는 경제와 힘의 논리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극비문서를 공개하여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정부는 간첩죄로 몰아붙였지만 워싱턴타임스까지 들고 일어나자 법원은 6월 30일 간첩죄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모두가 정부를 대변하기 위한 거짓을 만드는 것들이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은 1978년 유신시절에 금서로 되어있었다. 이때 유시민은 창문을 담요로 덮어 빛을 가려가면서 읽었다. 위에 언급한 발가벗은 임금님을 만들기 위하여 생겨난 유신이었기에 이를 어기면 누구든지 마음씨가 착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때 가장 통치하기 쉬운 방법은 상대를 혹은 정적을 공산주의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내편이 아닌 경우는 무조건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의 대표적인 희생자가 김대중이다.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둔 김대중을 박정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간판을 붙여주었는데, 이때의 제목이 바로 공산주의자였다. 그 뒤로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일관되게 괴롭혔다. 사상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한 장본인이면서, 혈서를 쓰고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던 친일파이면서 말이다. 이처럼 집권자가 상대를 죽이는 방법은 좌파이면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만 찍으면 끝이 나는 게임이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파악하지 못 한 채, 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냥 그런 소문만 퍼뜨리면 원하는 대로 해결되는 요술방망이 말이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김대중에게도 뒤집어씌웠으며, 유시민에게도 적용되었고, 심지어 2014년에도 이석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친북좌익이라는 올가미는 권력을 유지하는 만능키로 통했다.
토머스 맬서스의『인구론』
토머스 맬서스의『인구론』은 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맬서스가 주장하는 인구론은 사람의 번식력이 작물의 증가량보다 높기 때문에 결국에는 사람들이 굶주려 죽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병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그 균형을 이루거나 전염병 혹은 인위적인 전쟁을 통하여 그 비율을 조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런 가설을 알고 난 뒤의 대책은 무엇일까. 맬서스는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절하게 되니 일부러 조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순이면서 인간을 하나의 자연 현상에 비춘 것이 조금은 비인간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읽혀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대위의 딸』
우리나라의 1960년대 유행했던 글귀 가운데 하나가‘삶이 그대를 곳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로 푸시킨이 쓴 싯구이다. 푸시킨은 이 시로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해진 시인으로서의 시가 되었다. 사실 이 말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춰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기뻐할 여지도 없이 전쟁에 의한 폐허가 되어 삶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언제 어떤 명목으로 누가 나를 속일지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일부러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주변 상황으로 인하여 의도하지 않게 벌어지는 그런 일들이 삶에서 속이고 속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던 것이다.
이 싯구를 쓴 푸시킨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런 상황을 나중에 겪었고, 싯구는 먼저 쓰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빗대어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벌써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삶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상하면서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을 바로 보는 선각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맹자의『맹자』
책으로써의 『맹자』는 인간으로서의 맹자가 아닌 제자들이 훗날 그를 기리며 적은 것이다. 『맹자』는 맹자가 천하를 두루 여행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그의 제자들과 나눈 세상의 담론을 적은 것이다. 맹자 역시 공자와 마찬가지로 죽은 지 150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사상을 인정하기 시작하였으며, 비로소 성인의 대열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살아생전에는 한낱 유학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맹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하여 소를 잡지 말고 양을 잡으라고 하였다. 어떻게 따지면 소나 양이나 생명을 끊는 것은 똑같은 것이며,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맹자가 본 소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맹자는 양을 잡으라고 하고서는 양을 보지 않았다.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소를 잡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굳이 양이 아니더라도 다른 동물 혹은 다른 소를 잡았으면 그것으로 해결된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마음이 여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도 인의예지를 군자의 우선으로 꼽았던 것이다.
최인훈의『광장』
『광장』은 잡지 새벽에 1960년 11월호에 처음 실렸다. 이어서 여러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작품 속의 주인공 이명준은 부당한 이유로 끌려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남의 현실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북으로 간다. 그 후 북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포로가 되어 제3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인도로 가는 배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전쟁 후 이승만정권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나, 이러한 현상은 유시민이 쫓겨 다녀야 했던 1978년이나 지금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명준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가 되어 북으로 도망을 갔는데, 사실 이명준이 북으로 간 것은 본인이 빨갱이라서 제 집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남의 현실을 피해가는 과정이었으나 집권세력들은 역시 빨갱이가 빨갱이 집을 찾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공적인 빨갱이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자신이 마치 오래 전부터 빨갱이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사마천의『사기』
『사기』는 중국의 사자성어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는 곳이다. 한편 사마천은 역사를 한층 더 정확하고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결국은 그러다가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훗날 거세형을 받고 풀려났으며, 훗날 복권되어 벼슬에 천거되었지만 나서지 않고 집필에 주력하였다.
역사는 도전과 그에 따른 응전의 연속이다. 시대가 바뀌면 그에 따른 지도력이나 권력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하여 나라를 세울 때에는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사람이 주역이지만, 나중에 안정이 되고 새로운 제도를 겸비하여야 할 때에는 무장보다는 이론가 혹은 사상가가 더 절실한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변화에 따른 응전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기』의 백미는 한신의 토사구팽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볼 것은 바로 도전과 응전이다. 한신이 유방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후 안정된 상태에서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조직을 잘 장악했다든지 혹은 막후에서 조정하는 여인을 잘 농락하였든지 하는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못했기에 도태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사가 새옹지마이며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권력도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이반 데니스소비치의 하루』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수용소에서 10년을 보냈는데, 무슨 일을 하든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심성의껏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벽돌을 쌓는 일과를 하는 도중에 일을 마치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도 밥을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시멘트를 물에 섞어 놓은 몰탈이 굳지 전에 빨리 벽돌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마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 그릇의 밥보다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며, 생존경쟁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다. 세계 최대의 선박 사고인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였을 때 700명의 목숨을 구했지만, 죽은 사람은 1500명이나 되었다. 이때 선장은 우왕좌왕하면 모두 죽을 처지에 놓인 영국 사람들은 보면서 죽어도 영국인답게 죽으라는 말을 하였다. 어차피 구명조끼가 없어 죽어야 할 사람이 1500명이나 되는데, 힘센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 싸우지 말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해 먼저 탈출시키고 건강한 사람들은 최후까지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여 살아보자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죽게 된다면 영국인의 품위를 지키며 죽자고 하였다. 그 결과 700명은 목숨은 구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 영국에서는 그 선장의 무덤에 그런 내용을 적어 길이 보전하였다. 수용소에서 밥을 굶는 다는 것, 수용소에서 시키지 않은 일을 더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며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에 속했다. 그러나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이 아닌가 하였다.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
진화론은 어떤 일을 하면서 좀 더 잘하려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데 편리하도록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점차 더 우수한 품종만이 살아남는 다는 말이다. 이것을 이기적 유전자라 부른다. 많은 유전자 중에 자기가 살아남겠다고 우기는 이지적 사고를 가진 유전자가 결국은 다른 유전자를 물리치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열성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정말 맞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윈은 신의 창조론에 반대되는 이론인데, 실제로 그렇게 오랜 기간을 살아본 사람도 없는 것은 물론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진화할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창조론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진화론은 믿을 수 있는지 그것도 궁금하기는 하다.
진화론이 맞다면 바로 인접한 종 간의 교배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식물조차도 다른 종에서 교배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서로 완전히 다른 종이 생겨났는지 설명이 안 된다.
소스타인 베블런의『유한계급론』
‘부에 대한 욕망은 그 본질적 속성 때문에 한 개인의 경우에도 충족도기 힘들다. 하물며 부에 대한 평균적 일반적 욕망의 충족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이처럼 부에 대한 욕망은 해결할 수가 없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하여 탈세와 뇌물공세 등 여러 가지 반칙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이것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기 원하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토지의 개인적 소유는 야만문화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개인적 소유를 하여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 인간 집단을 통틀어 유한계급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노동을 하지 않고 이자를 받거나 토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 것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좀 더 검토되어야 할 내용이다. 대체로 부유한 사람들이 보수층이 많은데, 이것은 자신의 부를 좀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욕망에서 파생된 성격이다. 부자가 자기 토지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변화를 싫어하며,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보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조지의『진보와 빈곤』
『진보와 빈곤』은 단순한 경제서가 아니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문학을 고루 겸하고 있는 아주 수준 높은 작품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19세기에 출판된 논픽션 영어 책으로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하여 성직자 고은 백만장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주목하였다. 주 내용은 사회가 발달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노동자의 임금은 떨어지고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좋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은 소출을 내어 지주에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러니 노동자는 일하고도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의 공개념을 도입하여 토지를 가진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수익으로 하자는 것이다.
진보와 빈곤은 동시에 존재하는데, 앞에서 말한 대로 많은 토지를 가진 부유층을 더 많은 수익을 내지만 진보층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 사회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며 자유롭던 중산층이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부패를 경원시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패와 결탁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급기야 청백리가 부패한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며 심지어 부패 자체를 부러워하며 닮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보수는 없는 것인가.
하인리히 뵐의『카나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지식인들이 명예를 먹고 산다고 하지만 대중매체인 매스컴에 의해 명예를 실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경우는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의도적이 악의적으로 명예를 떨어뜨리는 경우도 너무나 많이 있다.
유명 신문에서 어떤 사건을 보도할 경우, 진실로 취재를 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일반인들은 유명 신문사의 명예를 믿어 그 기사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의 빨갱이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마는 자꾸 반복하여 그럴듯한 포장으로 계속 보도를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그런 내용을 믿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하면서 조금은 그런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매스컴의 위력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떨어진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라 불가능하다. 아무리 사실과 다르다고 하여도 믿어줄 사람이 없으며, 다시 유력 신문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잘못 된 기사였다고 정정 보도를 하더라도 이미 실추된 명예는 원상회복되지 않는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몰고 가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 줄 알고 만다. 나중에 화가 나서 잘못 보도한 기자를 죽이게 되면 역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다르다고 하면서 부추긴다.
따라서 언론이 공정하고 정확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 사람의 명예는 물론 그 사람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것이며, 실제로 살인은 그런 기사를 쓴 기자가 하는 셈이다. 그러나 기자는 지금까지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으며, 그로 인한 불이익을 당한 적도 없다. 이런 것이 기자의 허영심을 키우며 기사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하는 요인이다.
E.H.카의『역사란 무엇인가』
진실은 언젠가는 들어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에서 보면 진실이 저절로 들어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역사는 진실이라는 허울에 어떤 것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은 진실이라고 쓴 부대를 가지고 있지만, 내용물로 똥을 담으면 똥 부대가 되는 것이며 진실을 담으면 진실 부대가 되는 것이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고 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열정을 가지고 썼다면 그것이 후세에 남아 전달되는 진실이 되지만, 거짓으로 썼다면 후세에 전하는 역사라 하더라도 진실로 포장된 거짓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유시민이 읽은 책을 정리한 내용은 위와 같다. 나는 유시민이 읽으면서 이런 저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누가 말하면 독서가 취미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책을 읽고 그런 말을 하는가 생각나서 그런 것이다. 한편, 이 책을 읽고 나니 유시민이 책을 보는 눈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본 여러 책 중에서도 아주 내 맘에 쏙 드는 그런 책이라 생각되었다. 유명한 평론가가 책을 평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산문 작가가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은 아주 훌륭한 독서노트라는 믿는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청춘의 독서』가 아니겠는가.
이 책을 만들어 준 저자 유시민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201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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