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임금 잔혹사
조민기/ 책비/ 20140530/ 342쪽
저자
조민기 : 한양대 문화인류학 전공, 다양한 문명을 공부하면 다른 시대를 조명하는 일에 취미를 가졌다. 영화회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홍보기사로 작성한 시리즈가 호응을 얻어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줄거리 및 감상
조선은 고려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함으로써 이른바 반역에 의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성계는 고려에서 상당한 무장이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군사를 몰아 돌아온 것이다. 이때 이미 고려의 국왕은 그 존재감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으며, 이성계를 비롯한 일부 세력이 득세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에 자신도 아들의 권력다툼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미 한씨 부인이 있었으나 사망하였고, 건국 후에 강씨를 정비로 맞아 들였다. 이 둘과 후궁 4명으로부터 적자녀 8남 3녀 그리고 서자녀 2녀들 두었다. 이런 수치에서 보듯이 8명의 왕자들은 나름대로 세력을 키우기도 하고 일부는 포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1차와 2차 왕자의 난을 맞는 비운도 겪었다.
다시 말하면 왕이 되기 위하여는 숱한 어려움도 견뎌내야 하고, 때로는 정적들과 원치 않는 싸움도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단계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미처 왕이 되기 전에 죽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발생한다. 태조의 막내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이 그랬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 이제가 그랬다. 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이장,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 이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이왕,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 영조의 차남 사도세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가 그런 예이다. 이들은 대체로 병사를 하였다고 믿고 싶지만, 의외로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는 사도세자가 그럴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의 걸림돌이었고, 다음 왕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실정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통치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당파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상호보완작용을 하면서 그러나 필요한 경우는 심하게 벌을 줌으로써 만연한 사색당파의 회오리 속에서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왕 혹은 세자의 독살설은 어떤 경우 사실일 가능성이 짙다. 몰론 현재의 조사로 그 당시 상황을 알아낼 수가 없으니 단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 기록들에 의하면 일부는 그럴 것이라고 해석하게 만든다.
이것이 왕권의 유지를 위한 술수다. 물론 조선 외에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친족을 혹은 아들마저도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조선임금 잔혹사인 것이다.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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