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3. 영등날(靈登日)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05:29

13. 영등날(靈登日)

조상들은 음력으로 매 달의 1일과 15일을 중시하였다. 그중에서도 2월 1일을 영등날로 부르는데, 이날은 비바람을 일으키는 영등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2월은 영등달이 되며, 영등신을 모시는 놀이를 영등굿놀이라 한다.

영등신(靈登神)은 주로 영남지방과 제주지방에서 많이 믿었던 신으로, 두 딸을 대동하여 내려오는 때에는 일기가 온화하며 산들바람이 불어 풍년이 들지만 며느리까지 대동하여 내려오는 날에는 거친 바람으로 풍파가 일고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부지방에서는 딸을 데리고 올 때는 옷이 화려하게 휘날리도록 바람이 불어 일기가 건조하여 농사가 패농하며,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초췌하게 보이기 위하여 비가 오므로 물이 많아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는 곳도 있었다.

이런 영등신은 2월 초하루에 왔다가 다음 다음 날인 3일 혹은 2월 15일에 올라가지만, 늦으면 2월 20일까지 있다가 올라간다고 믿었다.

13.1 영등일의 유래

영등신은 농신(農神)이면서 풍신(風神)이다. 그러므로 농어촌에서는 바람의 피해를 막고 풍년을 바라는 마음에서 영등일을 섬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는데, 이를 ‘바람 올린다’고 하였다. 영등일을 2월의 초하루로 잡은 것은 설날과 대보름이 지난 시절로, 이제 서서히 농사일을 준비하고자 하는 일깨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과 초하루가 가지는 신성함을 엮어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주로 영남지방과 강원, 그리고 제주지방 등 해안가에서 성행하였다.

조선 정조 20년 1796년에 원래는 중국의 명절이었던 ‘중화절’을 본떠 우리도 중화절(中和節)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척을 비롯한 다른 행사들이 민가에 퍼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 대다수 국민들은 상당기간 그냥 고유의 머슴날로만 여겼었다.

13.2 영등일의 기록

영등일에 대한 기록은 몇 군데에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영남 지방의 풍속에 집집마다 신을 제사 지내는데 그 신을 이름하여 영등신(靈登神)이라 한다. 무당이 영등신이 내렸다고 마을을 돌면 사람들은 다투어 맞이하여 즐긴다. 이달 초하루부터 사람을 꺼리어 만나지 않는데 15일 혹은 20일까지 간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주의 풍속에 2월 초하룻날 귀덕과 금녕 등지에서는 장대 두 개를 세워놓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 또 애월에서는 주민들이 말머리 형상을 한 나무를 채색비단으로 꾸며 약마희를 논다. 이것은 신을 즐겁게 하는 행사로 보름까지 하다가 그만둔다. 이것을 영등이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또 조선 후기 이옥(李鈺)이 쓴『봉성문여(鳳城文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 ‘매년 2월 길일에 집집마다 영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3일 전 문전에 붉은 흙을 깔아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마당에는 밥과 국, 인절미, 떡, 술, 어육, 나물 등을 정갈하게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 곳에 대나무 하나를 세우고... 15일까지 한다. 이렇게 하면 집 안에 질병이 없고 풍년이 들며… 영남 읍민 모두가 제사를 지낸다… 밤중에 분명히 느끼는 것이 있어 신이 가고 나면 옷이 땀에 젖었다. 대개 옛 두두리(豆豆里)류로 음사(陰祀)의 귀신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일부 마을에서는 실제로 2월 초하루를 상칭, 초닷새를 중칭, 그리고 스무날을 하칭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한 후 세 번의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때 하칭은 약식으로 물만 올리는 경우도 있으며, 초닷새 대신에 초아흐레에 행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영등신(靈登神)은 영남지방과 제주 등지에서 주로 모시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타 지역에서도 어촌을 중심으로 신앙화되었으나 최근에는 자연에 의지하던 신앙적(信仰的) 성격이 줄어들고, 점차 과학적인 어로에 참여함으로써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적어지고 있다. 지금도 어촌에서는 주부가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는 것도 영등일에서 유래되어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기간에는 상가(喪家)에 가지 않는다거나, 부정탈만한 흉한 일을 꺼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3.3 영등풍속

주요 풍속으로는 풍신(風神)에 대한 풍신제를 꼽을 수 있다. 풍신이 비바람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읍소(泣訴)하는 것이다. 이날 비가 오면 물기가 많은 어촌에 풍어가 들 것이라 하여 물영등일, 바람이 불면 농촌에 풍년이 들 것이라 하여 바람영등일이라 불렀다. 그러고 보면 영등일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전제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그해석은 우리에게 좋은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촌에서는 영등일 아침이면 하늘을 보고 웃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이는 바닷가에서의 바람은 해일(海溢)과 폭풍우(暴風雨)가 우려되어 안전한 어로(漁撈)에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풍신제(風神祭)

영등 할미가 내려올 때는 거친 비바람을 몰고 오거나 평온한가운데 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날 날씨에 따라 1년 농사의 풍흉을 예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세상의 모녀 지간과 고부 사이가 변화무쌍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옛날에도 고부간의 정이 사나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개선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주부는 이날 새벽 첫닭이 울면 장독대나 뒷간에 정화수를 떠두었으며, 아침이 되면 볏가릿대에 밥을 갖다 놓고 그해 농사의 풍요 및 가정의 안녕을 기도드렸다. 이때 영등할머니를 위해 비린내가 나지 않는 생선이나 비늘 없는 생선인 명태로 탕을 끓이고, 잡곡밥과 나물, 떡, 술, 포, 과일 등으로 제상을 차려놓았다.

제를 지낼 때는 양푼에 밥을 담은 뒤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꽂아놓았으며, 팥시루떡이나 수수떡도 쪄서 올려놓았다. 수수떡은 수수쌀에 쑥을 넣고 인절미처럼 납작하게 만들어 콩을 묻혀 낸다. 이때 사용되는 곡식은 1년 농사에서 처음 수확한 것으로 잘 보관하였다가, 제사용으로 사용하는 풍습도 전한다.

혹시 초하룻날에 제를 올리지 못하였다면 10일 이내에는 올리도록 하였으며, 제를 지낸 다음 날부터 보름까지는 장독대나 광, 마당 등 적당한 곳에 정화수만 떠 놓았다. 이날은 한 해 농사가 시작되는 날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한 후, 가내 평안과 앞으로의 농사가 잘되기를 빌며 식구 수대로 소지(燒紙)를 올린다. 이때 영등신과 접속한 무당은 가가호호를 돌며 원하는 집에 들러 고사를 지내주었다.

그러기에 영등할머니가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인간들이 지켜야 할 금속(禁俗)도 있다. 영등할미를 맞을 때에는 사람이 아직 한 번도 밟지 않은 황토를 파서 문 앞에 뿌리며 신성함을 나타낸다. 요즘말로 하면 최고의 영예를 얻은 자가 밟고 지나갈 레드카펫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또 대나무에 오색헝겊을 달아 사립문에 매달고 걸인이나 병자 등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이때 화려한 옷을 입거나 지나치게 치장하는 것도 금해야 한다. 이는 영등할미보다 좋게 보이면 화(禍)를 입을 것에 대한 방편(方便)이다. 지금도 무속인의 집 앞에 이런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등할미는 농신(農神)이기도 하니 들에 나가 논밭을 갈며 일하는 것을 삼가고, 쌀과 같은 곡식을 밖으로 내는 것도 안 된다. 이것은 겉으로는 영등신에게 빌면서 부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는 인상을 주어 노여움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등일에는 어부들도 출어를 삼가며 조신하게 지냈다. 이런 근신은 많게는 열흘 혹은 스무날까지 이어졌다.

또 영등신이 하늘에 올라가는 날에도 소지(燒紙)를 하였다. 찰밥과 명태무왁찌개국을 장독대에 올려놓고 식구 수대로 수저를 꽂아 빌고, 떡시루에 수저를 꽂기도 하며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기분 좋게 가기를 빌었다.

풍신제로 유명한 것은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인데, 이는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시 건입동 칠머리에서 펼쳐지는 굿으로, 영등일에 영등신을 맞는 과정부터 보내는 때까지 펼쳐진다. 영등신이 오는 날은 음력 2월 1일이지만 떠나는 날은 3일 혹은 늦으면 15일이 되기도 하며 지방에 따라 날짜도 다르다. 칠머리당굿은 영등일의 맞이굿(歡迎祭)을 시작으로 14일의 송별제로 끝난다. 주민들은 어촌마을답게 생계수단으로 어로를 택하였고, 비바람에 취약한 어부들이 자연에 대한 순응과 안전 및 풍어를 기원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칠머리당굿은 대체로 500여 년도 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국내 유일의 해녀(海女) 관련 굿으로 전한다.

굿은 모든 신을 불러 굿에 참가한 집안의 행운을 비는 초감제(初監祭)를 시작으로 본향당의 신(神)인 부부신을 불러 마을의 평안을 비는 본향(本鄕)듦굿, 요왕신과 영등신이 오시는 길을 닦아 맞이하고 어부와 해녀의 안전을 비는 요왕(龍王)맞이굿, 마을 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洞厄)막음굿, 해녀가 바다에서 잡은 것들의 씨를 다시 바다에 뿌리는 씨드림굿, 영등신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는 배방송(船放送)굿, 처음 불러들인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渡津)굿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의 사라봉공원과 제주항 사이에 있는 작은 언덕 별도봉의 입구에서 7개의 머리 모양을 한 곳에 당(堂)을 세우니 칠머리당이며‘도원수감찰지방관(都元帥監察地方官)’과‘요왕해신부인(龍王海神夫人)’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 영등일의 영등신을 함께 섬기고 있다. 영등신은‘영등할망’으로 불리기도 하는 데 바람신이며, 외눈백이섬 혹은 강남천자국에서 왔다가 기한이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신으로 상주신(常住神)이 아닌 내방신(來訪神)에 속한다.

칠머리당영등굿은 일반 문화재와 달리 전문 굿꾼이 진행하는 데, 무속인이면서 본 영등굿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장인(匠人)이 주도한다.

제주의 영등신에 대한 근원은 여러 가지로 전하고 있다. 먼저『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있는 것처럼 2월 삭일(10일)에 12개의 대나무를 세우거나 말머리 모양의 나무 등걸에 옷을 입히고 약마희(躍馬戱)를 즐겼으며 보름까지 배를 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물에 빠져 죽은 당나라 상인의 시신이 네 개로 나뉘어 여기저기 흩어져 떠올랐는데, 이 때문에 매해 정월 보름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 배를 띄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는 영등굿의 진풀이에서 영등대왕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서 들어온다는 말과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초감제에 등장하는 모든 신의 개념이 후자(後者)의 진풀이 영등굿의 영등대왕과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중화절(中和節)

2월 초하루는 영등날로 농사 혹은 어로와 연관된 바람신(風神)의 날로 여겼다. 이때부터 벌써 농사를 염려하는 시기로, 이에 대한 대비(對備)도 따랐었다.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는 반죽(斑竹)이나 붉은색이 도는 대나무(朱竹), 혹은 붉은색을 들인 향나무나 이깔나무로 만든 중화척(中和尺)을 재상(宰相)과 시종(侍從)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국 당나라의 백거이가 쓴 『백씨장경집』일명『백향산집(白香山集)』에서는 홍아(紅牙)로 만든 자와 은(銀)으로 만든 자를 하사받았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때 받은 자〔尺〕는 현재 시중에서 포목(布木)을 재는 자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동국세시기』에는 옛 당나라에서 행하던 일을 조선 시대에 와서 정조 20년 병진년 1796년에 본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면에서는 당시 중국의 중화정치(中和政治)를 따르던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던 제도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옛 당나라의 제도를 따르기보다는 그때그때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실제로 중앙의 통치편제나 지방의 조직까지도 중화의 영향을 받았던 만큼, 중화척(中和尺)도 정치의 척도를 자로 재서 측량한다는 중국의 의도를 따랐다고 본다. 이런 중화척은 농사에서 필요한 수나 크기를 계산하는 척도로 표현되었으며, 2월에 농사를 시작하는 첫날에 이를 하사(下賜)하는 것은 농사의 중요성을 정치의 중요성에 빗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래기퇴치

이날은 여름에 생기는 노래기를 퇴치하는 날이기도 하다. 노래기는 지방에 따라서는 노내기라 부르기도 하고, 다리가 많다고 하여 백족충(百足蟲), 몸을 둥글게 감는다고 하여 환충(環蟲), 한자로는 마현(馬蚿) 혹은 마륙(馬陸)이라고도 한다. 이 벌레는 주로 썩은 짚이나 습한 땅속에 서식하는 데, 옛날 지붕은 대부분 짚으로 되어 있어서 노래기가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노래기는 지네처럼 생긴 것이 징그럽게 보이며 냄새 또한 심한 노린내로 아주 고약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노래기 퇴치방법으로 집안을 청결하게 청소하여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못한 방법이었기에, 종이를 잘라서 향낭각씨(香娘閣氏)의 노리개를 만들어 주술(呪術)하였다. 만들어진 노리개는 ‘향낭각씨속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라는 글자를 써서 서까래에 매달아 두었다. 이는 향낭각씨는 속히 천리 밖으로 도망가라는 뜻으로, 향낭각씨는 바로 노래기를 미화한 표현이었다.

보통의 주술적 부적(符籍)은 대개 붉은색으로 글자를 쓰지만 이 노래기부적은 묵서(墨書)로 쓰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먹물이 노래기 색과 비슷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향낭각씨를 만들지 못한 가정에서는 소나무 잎이 달린 가지를 잘라 지붕 위에 올리거나 추녀 끝에 꽂아 넣기도 하였다. 이는 소나무향이 노래기를 쫓는 것은 물론, 송진(松津) 성분이 짚에 묻어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서민들의 경우 대부분 향낭 대신 소나무 가지를 활용하였다.

머슴날(奴婢日)

농가에서는 2월 초하루를 머슴날이라 하여 별도로 챙겨주었다. 이는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오랫동안 편히 쉬었으나, 이제 2월이 되었으니 농사 준비를 해야 하는 머슴들을 위로하는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이날은 머슴들이 즐겁게 쉬며 주인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면서 농악과 노래로 흥을 돋워주었다. 마침 20세가 되는 머슴에게는 성인식을 해주어, 어른이 되면서 다른 성인들과 함께 품을 주고받는 당당한 품앗이꾼으로 인정하는 날이다. 이때 시절 음식인 송편(松餠)을 노비들에게 자기 나이 수대로 나누어 먹이고 위로하였다.

이날은 정월대보름날에 세워두었던 볏가릿대를 털어내어 송편을 만들고, 술과 음식으로 일꾼들을 위해 잔치를 하였다. 이는 한 해 동안 농사를 잘 지어주기 바라며 대접하기 때문에 머슴날이라고 하였다.

일꾼들로서는 겨울 동안 쉬었던 몸에 생기(生氣)를 넣고 농사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썩은 새끼줄에 자기 목을 매고 ‘나는 죽었다’하는 시늉을 하면서 닥쳐올 농사일이 고됨을 비유하였다. 주인은 그런 머슴에게 가외로 용돈을 주면서 부담 없이 쓰도록 하였다.

특히 강원도 화천에서는 머슴들이 농악놀이를 하며 집집마다 걸립(乞粒)을 하였다. 걸립이 끝나면 장가 못 간 노총각들은 씨름판을 벌였으며, 장사로 뽑힌 총각은 혼기에 접어든 가난한 집 처녀와 맺어주었다. 저녁에 이르러 놀이가 절정을 치닫게 되면 주인집 자녀들의 건강을 비는 축문을 양초에 감아 강물에 띄워 보내는 낙화(落火)놀이를 하였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농악을 벌였다.

이날 머슴을 제외한 가족들도 나이 수대로 송편을 먹었다. 그러나 대가족에서 나이 수만큼 많은 송편을 장만하기에는 부족하여, 식구들은 열이나 스물 등 일정한 숫자를 빼고 먹기도 한다. 요즘 생일잔치 케이크 촛불에서 큰 촛불 하나를 작은 촛불 10단위로 삼는 것과 같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땅을 처음 갈아엎는 것을 초경(初耕)이라 한다. 초경은 소의 머리를 동쪽으로 하여 기운을 받게 하였다. 마침 논밭의 길이가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다 하여도 먼저 동쪽의 가로 방향으로 갔다 온 뒤에 땅의 모양에 따라 길이 방향으로 갈아엎었다.

좀생이보기

저녁 하늘에서 좀생이 별 즉 묘성(昴星)이 달의 전후에 있는 것으로 풍흉을 점쳤다. 예를 들어 별이 달의 앞에 있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으며, 또 좀생이별이 밝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좀생이별은 플레이아데스성단에 속한 6~7개의 밝은 별을 의미하며, 황소자리의 이타성이 가장 주된 별이다. 날씨 점

영등신이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2월 20일의 날씨로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다. 이때 저녁이 되면 마당가에 매어둔 소 말뚝 위에 올라가서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머리가 선명하면 풍년이고 흐려서 잘 보이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콩볶기

이날은 콩을 볶아 먹었는데, 콩을 볶을 때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알 볶아라’ 하는 주문을 외웠다. 이는 들녘에서 피해를 주는 새와 쥐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의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방해하는 의미였다. 이것 또한 무사태평(無事太平)과 농사의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행사에 속한다. 또 콩을 볶을 때 그릇이 뜨거워지면 콩이 톡톡 튀는 것에 비유하여, 노래기들이 모두 톡톡 떨어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노래기를 건드리면 마치 쥐며느리 일명 콩벌레처럼 몸을 마는데, 쉽게 말해 콩을 연상시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연(鳶)놀이

겨울이 되면 청소년들이 즐기던 놀이 중에 연날리기가 있는데, 대체로 12월 중순께부터 설날과 대보름 사이에서 가장 많이 놀았다. 연은 창호지에 대나무살을 붙였는데 주로 방패연을 만들었다. 연실은 지방에 따라 자새 또는 감개라고 불리기도 하는 얼레에 필요한 만큼 감아 사용하였다. 연을 바람에 맞보게 한 후 연실을 풀었다가 감았다가 하면서 상승바람을 타고 오르게 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연실은 주로 명주실(常白絲)이나 무명실, 그리고 당백사(唐白絲)를 사용하였다. 간혹 연싸움을 하는 아이들은 연실에 날카로운 금속조각이나 사금파리조각 등을 가루로 만들어 부레풀이나 밀가루풀로 붙여놓기도 한다. 연날리기는 지금도 성행하는 민속놀이로, 오락성은 물론 민속신앙적인 양면성도 지니고 있다. 연날리기의 민속신앙적인 면은 ‘액막이연 날리기’가 있는데, 이는 보름날 많이 하는 놀이로 연에 액(厄)이나 송액(送厄)이라는 글자를 쓰고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낸다. 이로써 자신의 1년 액운(厄運)이 모두 사라진다고 믿었다. 연의 오락적인 면으로는 연싸움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두 사람 이상이 연을 띄우고 연줄을 서로 얽어 잡아당김으로써 줄이 먼저 끊어지는 사람이 지는 경기다.

이외에도 음력 2월에 맞는 첫 번째 정일(丁日)을 봄 상정일(上丁日)이라 하는 데, 이때부터 점심을 먹기 시작하는 날이다. 그러다가 가을 상정일 즉 음력 8월 첫째 정일(丁日)이 되면 다시 점심을 거르게 된다. 농가에서는 겨울철 해가 짧고 일이 적은 기간에는 점심을 걸러 식량을 아끼면서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절식(絶食)을 하였던 것이다. 이 두 날이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종묘에서는 연 중 2월과 8월의 상정일 두 번에 석전례를 치른다. 여기서 말하는 석전(釋奠)이란 문묘에서 공부자(孔夫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따지고 보면 조상에 대한 예의는 모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차렸으니, 없는 집에서는 제사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 이해가 된다.

13.4 영등일 음식

요즘 사람들은 송편(松餠)이 추석의 대표 음식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2월 초하루인 영등일의 시절 음식에서도 등장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정월대보름에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리고, 그 속에 넣었던 곡식으로 송편이나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이 떡은 앞으로 농사일을 하게 될 머슴들이 힘을 내라는 의미로 주먹만 하게 만들었는데, 콩을 불려서 속을 넣고 솔잎을 깐 시루에 담아 쪄냈다. 푹 익은 송편은 물기를 없애고 참기름을 발라서 머슴의 나이 수대로 먹게 하였다. 따라서 2월의 송편은 머슴송편 혹은 노비송편이 되기도 한다.

소(巢)는 팥, 밤, 검은콩, 푸른 콩 등은 물론이며 꿀이나 대추와 같이 단 음식을 넣어서 만들기도 하였으며 약용인 미나리를 넣기도 한다.

또 영등날에는 정월대보름에 세워두었던 볏가릿대의 곡식을 풀어 솔떡을 쪄서 먹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볶은 콩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13.5 영등일과 현실

영등일을 크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것은 농어촌의 특정한 사람들만이 지켜왔던 풍속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콩을 볶아 먹었던 것은 누구나 생각하고 있다. 왜 2월 초하루에 콩을 볶아 먹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하였지만, 정월대보름이 지난 후 이제는 명절이 되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영등일이 온다.

이와 더불어 초가지붕에 소나무 가지를 던지며 ‘노래기 물러가라’를 외치던 것도 흔한 기억에 속한다. 당시에는 초가지붕이 많아 곤충들이 서식하기 좋았다는 반증이다. 요즈음은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많다고 하지만 지금도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노래기가 흔히 발견된다. 물론 예전과 비교하여 많은 숫자는 아니다. 노래기를 퇴치하는 소나무 가지는 콩을 볶는 당일 아침에 꺾어야 했지만 추운 날씨를 생각하여 전날에 꺾어다 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영등일이 머슴날이라고는 하더라도 머슴을 부리거나 머슴을 살러 간 특정사람들에게는 특별하였겠지만 보통의 서민들 간에는 다소 미약한 풍습일 수밖에 없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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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