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4. 삼월삼짇날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05:30

14. 삼월삼짇날

음력으로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 부르며, 발음상 '삼월 삼질'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양(陽)의 기운인 홀수가 두 번 겹친 날로 단오, 칠석, 중양과 함께 길일(吉日)로 여겨왔다. 이날을 한자로는 상사(上巳), 원사(元巳), 중삼(重三) 또는 상제(上除)라고도 한다.

13.1 삼월삼짇날의 환경

이날은 강남에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따뜻해져서 겨울철새가 가고 여름철새가 온다는 날이다. 그러나 요즘은 농촌에서도 제비 구경하기가 쉽지는 않다. 예전보다 먹이가 부족하여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반도의 평균기온이 올라감으로 인해 원활한 부화(孵化)가 어려워지자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간 것에 더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편 봄을 알리는 나비 중에 흰나비를 먼저 보면 그해에 상복(喪服)을 입게 되고, 색이 있는 나비를 보면 길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나비점도 있었다. 또 동면에서 깨어난 뱀을 보는 것은 매우 재수가 좋은 일이라 여겼다.

삼짇날은 만물이 활기를 띠는 계절로 사람들은 겨울 동안의 묵은 때를 씻는다 하여 동천(東川)에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일본에도 삼월삼짇날은 있지만, 이날은 양력으로 계산하며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건강과 장래의 소원을 비는 날로 통한다. 또 이날이 지나면 3월 말부터 5월 말까지 벚꽃을 감상하는 기간으로 알고 지낸다.

14.2 삼월삼짇날의 유래

삼짇날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내용은 없으나, 최남선은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하였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기렸으나, 상사일이 들쭉날쭉함으로 불편하여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뱀은 지혜와 생명에 관계되는 동물로 여겨진 것이다.

고구려의 삼짇날은 왕과 대신 그리고 군사와 백성 모두가 사냥대회를 열고, 그날 잡은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또 뛰어난 활약을 펼친 사람은 신분을 불문하고 장수로 뽑았는데 바보 온달이 장수로 뽑힌 날도 이날이었다. 신라 때에는 재액(災厄)을 털어내는 의식을 치렀다.

고려 시대에는 답청을 하였으며, 궁중의 뒤뜰에 여러 관리들이 굽이굽이 휘어져 흐르는 물가에 둘러 앉아 임금이 띄운 술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고 술잔을 들어 마시는 곡수연(曲水宴)을 행하였다. 조선 이후에는 조정에서 기로연(耆老宴)을 베풀었는데 이는 덕망이 높은 노신(老臣)들을 모아 베푼 잔치였다.

14.3 삼짇날의 풍속

겨우내 집 안에만 있었던 여자들이 음식을 준비한 후 오랜만에 산과 들로 나가 즐겼으며,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놀이도 하였다. 이날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화전(花煎)’을 주제로 하는 가사(歌辭)를 지은 후 좌상(座上) 노인의 평(評)을 받아 장원을 뽑기도 하였다.

또 구성원 전체가 돌아가면서 가사 한 구절씩 불러서 장편가사인 ‘화수가(花酬歌)’를 지었던 곳도 있다. 특정 지역에서는 용왕당(龍王堂)이나 삼신당(三神堂)에 가서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을 하기도 하고, 농사가 풍년들기를 바라는 춘경제(春耕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비맞이

삼짇날의 상징은 제비가 으뜸이다. 따라서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그해 처음 본 제비에게 세 번 절을 하고 왼손으로 옷고름을 풀어헤쳤다가 다시 여미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겨우내 웅크렸던 몸에 강남에서 제비가 몰고 온 봄기운을 듬뿍 받는다는 것이다. 또 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틀면 복을 가져다주며 질병과 더위를 이겨낸다고 하였다. 이런 제비를 향하여 해코지를 하면 부정(不淨)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우리의 전래소설『흥부전』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화전놀이(花煎놀이)

양력 4월 초순이나 중순에 해당하는 이날은 들판에 꽃이 만발하는 때이다. 따라서 유생(儒生)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모여 음식을 먹어가며 시조를 읊거나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풍속이 생겼다. 이렇게 즐기는 것을 화류놀이(花柳놀이)라 하고 이때 먹었던 음식들을 포함하여 화전놀이라 불렀다. 이날을 한자로 풀어 푸르름을 밟고 온다는 뜻으로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부른다.

부녀자들도 봄맞이놀이를 하였는데 시집살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루를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활짝 핀 진달래꽃을 꺾어 머리에 꽂거나 꽃방망이를 만들어 아쉬운 흥을 담아오기도 하였다.

함남 영흥 지방에서는 삼짇날 동류수(東流水)에 몸을 씻으면 한 해의 재액(災厄)을 떨어 버린다고 믿어, 시인(詩人)과 묵객(墨客)들이 강변을 찾았으며 이때 정자에 모여 화전놀이도 병행하였다고 한다. 화류(花柳)라는 단어가 마치 왜색(倭色)이 짙은 듯하나 사실은 화전놀이에서 파생된 우리말이다. 꽃놀이는 본래 3월 삼짇날에 파란 풀을 밟고 거니는 답청(踏靑)놀이에서 비롯되었다. 서울에서도 현 종로구 필운동인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 성북구 성북동의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밖의 버들이 가장 유명했던 곳들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의 화류(花柳)를 되찾고 조상들이 즐겼던 올바른 상춘(賞春)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풀각시놀이

삼짇날 무렵에는 여러 종류의 풀들이 자라나고 나뭇가지에도 물이 오른다. 이때 아이들은 풀과 나뭇가지로 여러 가지 장난감을 만들어 놀았다. 특히 소녀들은 담 밑에 나는 각시풀을 추려서 한쪽 끝을 실로 묶어 머리채를 만든 후, 나뭇가지에 묶어 풀각시놀이를 하였다. 풀각시의 머리는 땋거나 쪽을 지었고, 예쁜 색색의 헝겊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다. 간혹 풀각시 주변에 헝겊으로 이불이나 베개, 머리 병풍들을 만들어서 방안처럼 꾸며 놓는 경우도 있었다. 화창한 봄날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동심(童心)들이 양지바른 곳에 모여 다정하게 노는 모습들은 꿈을 길러주고 생활의 지혜를 쌓는 정서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풀놀이, 삘기놀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삘기는 작은 억새풀만큼이나 키가 자라는데 소풀 또는 띠풀이라고도 하는 억센 풀이다.

호드기놀이

소녀들이 풀각시놀이를 했다면 남자아이들은 들과 냇가로 모여 물이 잘 오른 버드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 호드기는 버드나무의 껍질을 비튼 후 겉껍질 속의 나무를 빼낸 것으로, 둥글고 긴 악기 모양이 되어 굵기와 길이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이때 피리처럼 작은 구멍을 내어 좀 더 다양한 소리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버들피리소리가 잘 나고 안 나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모여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 피리를 만들었다는 것도 뿌듯한 자신감을 키워주기에 충분하였다.

활쏘기

삼짇날 이후로 활쏘기 대회를 갖는데, 활쏘기는 위험하므로 대체로 장년층에서 많이 시행되었다. 오늘날에는 활쏘기를 하나의 스포츠로 즐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무술로서 익혔던 병과(兵科) 과목에 속했다. 우리 민족은 말을 타고 활쏘기를 즐겨했으며, 활쏘기는 기품 있는 자세를 갖추는 데도 한몫하였다.

궁술(弓術)은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일부지역에 사정(射亭)이 있어서 활쏘기를 하고 있다. 예전에 활쏘기 대회를 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심지어 기생들도 궁사들의 뒤에서 소리를 하며 기운을 돋우어주었다. 강원도 평창과 충남의 연기군에서는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통을 이어오다가 보존에 한계성 및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문화재지정이 해지되고 말았다.

활쏘기 대회에는 여러 명의 궁사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대로 활을 쏘는데, 누가 과녁을 많이 명중시켰는가로 승부를 낸다.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면 깃발을 아래로, 화살이 과녁을 넘으면 깃발을 위로, 과녁에 맞으면 깃발을 둥글게 원을 그린다. 과녁이 중앙에 명중하면 북을 울리고 기생들은 지화자 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 춤을 추면서 한바탕 흥을 돋운다. 이 활쏘기는 조선 시대에 하나의 예절로 여겨 3월 3일과 9월 9일에 연 2회 실시하였다. 이때 노인들을 모신 가운데 고을의 규칙을 낭독하여 규약(規約)을 확인하고, 술을 마시면서 벌이는 하나의 잔치이기도 했다.

풀놀이

풀로 하는 놀이를 통틀어 말하며 여러 종류의 풀을 뜯어다가 누가 많은 종류의 풀을 뜯었는지 내기를 하거나, 질경이 풀을 뜯어다가 서로 얽어서 잡아당기는 질경이싸움도 하였다. 또 '솔잎걸기'는 크고 굵은 솔잎을 따서 서로 얽어 잡아당기는 놀이로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야산이나 들판에서 띠풀의 어린 새순인 삘기를 뽑는데, 누가 더 긴 것을 뽑았는지 겨루는 놀이도 있었다. 삘기는 지방에 따라 삐비라고도 불렀다. 어떤 지역에서는 삘기를 한 움큼 뽑아서 누가 많이 뽑았는지 개수로 겨루기도 하였다. 삘기는 얇은 겉껍질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을 먹기도 하는 데, 오래 씹으면 부드러우면서 달착지근해진다. 그러나 이것으로 식량을 대신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아이들 간식으로 먹었던 풀이었다.

머리감기

이날 머리를 감으면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워지고 소담스럽다고 하여, 부녀자들 사이에는 머리감는 풍속이 전해진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비누를 사용한 것도 아니니 삼짇날 머리감았다고 특별히 부드러워진다면 어느 누구의 머리가 부드럽지 않을 것인가. 아마도 이것은 한겨울 추위 때문에 마음대로 감지 못하던 머리를 삼짇날을 기하여 추위를 이기고 머리를 감아보자고 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강릉(江陵)지방에서 노인을 공경(恭敬)하는 의미로 좋은 계절에 해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해서 명승지(名勝地)로 모셔다가 위안잔치를 벌인다. 이때 70세 이상 된 노인이 비록 머슴이나 노비(奴婢)라 할지라도 모두 이 잔치에 참가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경주에서는 사절유택이라고 하여 각 계절마다 실시하였고, 익산의 용안에서는 향음주례(鄕飮酒禮), 남원에서는 음주가무와 활쏘기대회를 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환난구휼(患難救恤)이며 효우충신(孝友忠臣)을 공고히 하는 행사였다.

장담그기

농가에서는 삼짇날에 장(醬)을 담갔는데, 주로 이른 봄에 담았다. 장은 길일을 택하여 고사를 지낸 후 담글 정도로 부정(不淨)을 멀리하였는데, 정월의 말날(午日) 또는 그믐날, 손 없는 날, 정묘일(丁卯日), 제길신일(祭吉愼日), 정일(正日)에도 담았다. 여기서의 장이란 간장, 고추장, 된장을 의미한다.

어떤 집의 음식 맛을 알려면 그 집의 장맛을 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장이란 된장을 의미하며, 대대로 내려오는 잠담기 비법이 있기도 하다. 이때 담근 지 2년 이하의 새 맛장은 ‘청장(淸醬)’, 적어도 5년 이상 숙성된 된장은 ‘진장(眞醬)’, 그리고 10년 이상 된 된장은 ‘수장(壽醬)’이라 할 정도로 묵을수록 귀하게 여기는데, 시간이 지나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다.

간장 역시 큰 항아리의 묵은 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계속 섞어서 먹는데, 오래된 간장 즉 대략 30년 이상 묵은 간장은 ‘씨 간장’이라 하여 약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때의 간장도 오래될수록 검게 변하는 데, 짠맛은 줄어들면서 특유의 단맛이 가미된다. 종가(宗家)에서 100년 혹은 300년 묵은 간장이라는 말은 포도주처럼 어떤 항아리를 밀봉한 채로 300년이 지났다는 말은 아니며, 씨간장에 계속 첨가하여 이어져온 것으로 동일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시제(時祭)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보면 유현(儒賢)과 사대부(士大夫)가 많아지면서 시제를 중히 여겼으나 연간 네 차례 지내던 것인데, 대개는 가난하여 사시제(四時祭)를 지내지 못하여 두 번만 지냈다. 봄의 중삼(重三), 그리고 가을의 중구(重九)에 행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다. 현재의 사전에서도 2월, 5월, 8월, 11월에 사당(祠堂)에서 지낸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설날, 한식, 중추, 동지에 5대조(代祖) 이상의 조상에 대하여 드리며, 절차는 집에서 지내는 4대조까지의 기제사(忌祭祀)와 같다. 하지만 근래에는 봄이나 가을에 정한 특정한 날에 한 번만 드리는 경우도 많이 생겨났다.

이 밖에도 깨금발싸움 일명 외발닭싸움, 중요무형문화재의 남사당놀이 일부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박첨지놀이’도 전한다. 또 김유정의『동백꽃』에 등장하는 닭싸움도 있다.

14.4 삼월삼짇날 시절 음식(時節飮食)

3월은 양춘(陽春)의 계절로 특정한 풍속을 찾는 것보다 한 달 내내 다양한 놀이가 이어지는 달이다. 이때는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시기답게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있어 다양한 시절 음식(時節飮食)을 만날 수 있다.

탕평채(蕩平菜)

탕평채는 묵청포를 말하며 이는 녹두로 청포묵을 만들어 잘게 썰고, 돼지고기와 미나리, 김과 함께 초장에 무쳐 먹는 음식이다. 탕평채는 차게 먹을수록 맛이 좋다. 초나물에 녹말묵을 썰어 넣고 섞은 근래의 묵청포와 같이 혼용된다.

탕평채는 조선 중기 당쟁(黨爭)이 심할 때에 여러 당파가 모여 서로를 아우르는 탕평책(蕩平策)을 구상하는 자리에 녹두묵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온 이후로 붙여진 이름이다. 탕평채를 만드는 재료는 겨자채, 죽순나물, 죽순찜, 달래나물, 냉이국, 쑥국, 산갓김치 등이다.

쑥국

쑥국은 다른 말로 애탕(艾蕩)이라고도 하며, 들에 무시로 나는 쑥을 뜯어다 끓이는 국이다. 입춘 전에 세 번만 끓여 먹으면 소 한 마리로 보양한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몸에 좋은 것이 쑥이다. 혈액순환을 돕고 특히 부인병과 관련하여 특효가 있다. 그런데 이른 봄에 줄기째 국으로 끓이는 쑥은, 가루를 내어 만드는 떡과 달리 어린잎으로 조리해야 먹기에 좋다.

쑥떡

옛사람들은 방울 모양의 흰떡을 만든 후 속에 팥을 넣고 쪘다. 이 떡에 다섯 가지 색깔을 넣었는데, 작은 것은 다섯 개씩 혹은 큰 것은 세 개씩 이어 산떡이라 불렀다. 또 찹쌀과 송기 그리고 쑥을 넣어 만든 고리 떡도 있었다. 한편 부드러운 쑥 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쑥떡을 만들었고, 쑥을 줄기째 넣고 쌀가루와 대충 버무려서 쪄내면 쑥버무리가 되었다.

산병(餠)과 환병(環餠)

산병(散餠)은 산떡이며 달리 밥풀과자로 풀이되고, 환병(環餠)은 둥근 모양을 한 떡이다. 멥쌀로 작은 방울 모양의 흰떡을 만드는 데, 그 속에 콩으로 소(巢)를 넣은 후에 머리 쪽을 오므린다. 이때 오색물감을 들여 다섯 개를 포개어 구슬처럼 꿴 떡이라 해서 산떡이다. 혹은 송편처럼 만들어 작은 것은 다섯 개, 큰 것은 두세 개를 대나무 꼬치에 꿰어 먹는다. 꼬치에 꿰어 적을 부치는 것을 산적이라 하는 것과 같다. 환떡은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기와 쑥의 한 종류인 제비쑥을 찧어 오색의 둥근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크게 만드는 떡을 말굽떡(馬蹄餠)이라고도 한다.

소어(蘇魚)와 제어(鱭魚)

경기도 안산 앞바다에서 소어(蘇魚)가 많이 잡혀 풍어를 이룬다. 이 소어는 밴댕이의 다른 말이며 반지, 근어, 해도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어(鱭魚)는 한강 하류의 고양과 행주지역에서 나는데, 조선조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던 관청인 사옹원(司甕院)의 관리가 임금께 진상(進上)하였다고 한다. 제어는 위어(葦魚), 싱어, 웅어, 우어, 멸어, 열어로도 불리는데 갈대잎 모양을 한 은백색의 풍천물고기로 귀한 물고기에 속한다. 여기서의 풍천은 바닷물과 민물이 뒤섞이는 포구를 의미하며, 제어 역시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서 잘 잡히던 물고기의 일종이다.

민속전통주(民俗傳統酒)

민속주는 주로 봄철에 많이 빚는 술로 우리와 친숙한 술이다. 가을에는 각종 열매와 뿌리를 이용하지만 봄에는 화려한 꽃을 이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맛 좋은 술로 전하는 전통주(傳統酒)는 개인 혹은 술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으로 고유의 맛을 자랑하는 술에 속한다.

진달래는 황화(黃花)와 함께 떡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다음으로는 두견주라 하는 술을 만들기도 하였다. 참고로 꽃을 이용한 술로는 도화주, 국화주, 개나리주, 매화주, 연화주, 해당화주, 인동꽃주, 송화주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진달래꽃에는 꿀이 많아서 술이 매우 달다.

화전(花煎)

찹쌀을 이용한 전병(煎餠)에 진달래꽃을 부쳐 먹는 풍속은 우리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다. 이것은 꽃을 음식 재료로 하였다 하여 화식문화(花食文化)라 한다. 이것은 일본의 음식문화인 화식문화(和食文化)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에는 진달래꽃 대신 국화꽃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그런가 하면 음식에 황색을 내는 재료로 쓰이는 꽃을 황화(黃花)라 부르고 이런 채소를 황화채라 한다. 이 황화채는 궁중에서 도라지나 미나리, 목이버섯, 숙주 등과 함께 고유의 색을 내는 재료로 쓰였다. 훤화(萱花)라 불리는 참나리 꽃도 황화채(黃花菜)의 원료가 되고 두견화도 두견화채를 만드는 재료에 속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드는 데, 이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진달래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화전을 만들기도 하며,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녹두가루에 붉은색 물을 들여 익힌 후 잘게 썰어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불렀고 제사상에도 올렸다.’고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 수면에 오미자국물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화면(花麵)

화전을 하기 위하여 진달래꽃을 녹두 가루와 섞어서 반죽하는 데, 이때 꽃이나 오미자 등 색깔 있는 재료로 붉게 물들여 만든 반죽을 꿀에 타서 만들면 모두 화면(花麵)이 되었다. 여기서의 화면은 면발을 뽑기 전의 반죽 상태를 의미하며, 이 재료를 사용하여 각종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녹두떡, 절편, 쑥굴레떡, 청면, 청주 등이 삼월삼짇날의 시절 음식에 해당한다.

14.5 삼월삼짇날과 현실

옛날 서당은 삼월 삼짇날에 학업을 시작하여 중양절(重陽節)인 구월 구일에 끝내는 것이 관례였다. 학부모는 유월 유두일이 오면 자식을 잘 가르쳐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의미로 싸리나무 회초리를 한 아름 들고 서당을 찾았다. 말하자면 지금의 촌지(寸志)였던 셈이다.

요즘 학교에서 봄소풍이나 가을소풍을 가는데 이는 봄 답청(踏靑)놀이나 가을의 중양(重陽)나들이에서 비롯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산천경개(山川景槪)가 좋은 곳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며, 실내에 갇혔던 답답함을 푸는 심신단련의 목적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런데 화전을 먹던 삼짇날을 전후하여 봄소풍을 가는 날에는 으레 송충이를 잡았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송충이를 잡은 후에야 본연의 봄소풍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산림녹화(山林綠化)와 사방공사(砂防工事)를 하던 때이니 성장한 수목을 지키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한 일에 속했었다. 당시 학생들은 공무원과 함께 인력을 동원하기 쉬운 대상의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각종 방제(防除)와 수종(樹種) 변경의 영향으로 송충이 개체 수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는 따져 보아야 하겠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화학약품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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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