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5. 한식(寒食)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05:31

15. 한식(寒食)

한식(寒食)은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을 말하는 데, 음력으로 3월이 되는 수도 있지만 2월에 드는 경우가 더 많다. 한식이 음력 2월에 들면 철이 빠른 경우로 2월 한식은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은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양력으로는 4월 5일이나 6일경에 들어 춘분은 지났으나, 곡우에는 아직 닿지 않은 청명에 더 가깝다. 그래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다.’는 말도 생겨났다. 사실 청명(淸明) 절기(節氣)와 겹치는 날도 많아서 한식과 청명을 같이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고려 중기 이전에는 동지 후 105일째가 아니라 동지로부터 98일 후인 3월 30일경이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 때에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는 마찬가지가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15.1 한식의 유래

한식(寒食)은 찬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므로, 이날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전날 만들어놓았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주 더운 삼복도 아닌데 어찌하여 찬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의 문왕 즉 진문공(晉文公)이 망명하였을 때 목숨을 걸고 도와주었던 개자추(介子推)가 있었다. 어느 날 개자추는 왕의 주위에 간신들이 들끓어 간언(姦言)이 계속되자 관직을 버리고 금산(錦山)으로 피신하여 은둔(隱遁)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문공(文公)이 뒤늦게 후회하면서 직접 산에 찾아가서 개자추에게 어서 나오라고 하였지만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계속하여 나오라고 하소연하여도 말을 듣지 않자, 마지막 수단으로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개자추는 죽으면 죽을지언정 간신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듯 그냥 불에 타죽고 말았다. 이것을 본 왕은 이날을 기려 불을 사용하지 말 것을 명하니 음식 만드는 일에도 불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한식 때는 차가운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

또 다른 얘기로 불을 보관하는 불씨에 관련된 내용도 있다. 예전에 불씨가 귀한 시절에는 각 가정에서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과에 속했다. 그만큼 불씨가 귀한 것이었기에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불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때 불씨는 청명한 봄날에 만들었다가 일정한 날에 하사하였고, 불씨를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불씨를 사용하고 묵은 불씨는 사용하면 안 되었다. 불에도 정령(精靈)이 있고 수명(壽命)이 있어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불씨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차가운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한(時限)이 지나 오래된 불씨로는 밥을 지을 수 없었던 때문이다. 이때 각 고을의 형편과 지리적인 조건에 의해 새로운 불이 도착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도착하는 날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하루는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얘기도 그럴듯하다.

그런데 조선 세종 13년 1431년에는 한식뿐 아니라 이후 3일 동안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지금처럼 자유자재로 불씨를 만들 수 없었던 옛날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식이 동지로부터 105일째 날이라고 하는 데, 이때에 심성(心星) 즉 별자리 28수(宿) 중 불을 관장하는 별이 뜨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한식청명은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는 날이다. 이날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올라 묘소를 돌보기도 하지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불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계절적으로 메마른 산에 산불이 번지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건조하면서 계절적으로 바람까지 많이 부는 한식청명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전자(前者)나 후자(後者)나 어떤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맞는 말로 여겨진다.

15.2 성묘(省墓)와 차례(茶禮)

조상들은 수많은 차례와 제사를 지냈으나, 특히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날은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에 국한되었었다. 어떤 분류에서는 동지(冬至)를 합하여 다섯 가지 절기에 지키는 제사를 다섯 절사(節祀)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성묘(省墓)하면서 지내는 제사(祭祀)를 묘사(墓祀)라 하는 데, 설날이나 단오에 비하여 계절적으로나 농사 시기적으로 여유가 있는 한식과 추석에는 반드시 지키는 풍속이었다.

한식에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祭享)을 지내는 것은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조상의 묘소에 술과 과일, 포(脯), 식혜(食醯), 떡, 국수, 탕(湯), 적(炙) 등의 제물(祭物)로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을 한식차례(寒食茶禮)라고 한다. 이 시기에 먹는 음식으로는 쑥탕과 쑥떡도 별미에 속한다.

15.3 사초(莎草)

이날은 산소에 흙을 덮거나 석물(石物)을 하는 등 손을 대도 탈이 없는 날에 속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한식날을 골라 묘를 손보고 있다. 성묘를 하면서 묘소에 잔디를 다시 입히거나 풀을 심어주는 것을 사초(莎草)한다고 하는 데, 기존에 있던 띠를 다시 손본다고 하여 개사초(改莎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초(莎草)란 원래 사초과(莎草科)에 속하는 풀을 말하는 데, 바닷가의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래서 묘소에서도 잘 자라라는 의미로 잔디, 향부자(香附子), 산사초, 선사초 등을 활용하였는데, 사용하는 풀의 종류가 약 220여 가지나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풀 자체뿐 아니라 사초를 입히거나 묘소를 손질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 되었다. 이때 비석을 세우거나 상석(床石)을 펴고, 벌 안을 손질하는 등 묘소에 관련된 일체의 일을 통틀어 사초라 부른다.

음력 3월 즉 사초가 끝난 양력 5월이 되면 묘소의 풀들이 이미 싹이 나면서 자리를 잡은 상태이며, 9월이 되면 여름내 자란 풀들이 겨울 준비를 시작함으로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사초를 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다. 이를 두고 3월 이전과 9월 이후에는 무덤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삼구부동총(三九不動塚)’이라 하였다.

이 외에도 달걀에 그림을 그려 누가 잘 그렸는지를 겨루는 투란(鬪卵)도 즐겼다.

15.4 한식의 농사일

이때는 아직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지 않은 시기다. 그래서 농사일과 별로 상관이 없는 일로 산소나 집 주위에 나무를 심는다든지, 채전(菜田)에 상추씨를 뿌리는 등 가벼운 일을 하면서 앞으로의 농사에 대해 준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상추는 파종하는 시기를 따로 정하지 않았고,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 내가 길러 먹기 좋은 때에 파종하는 편리한 식물에 속한다.

이날 하늘에서 천동(天動)하면 농사가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한식에는 대체로 맑고 건조하며, 하늘도 갠 청명한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한식을 양력 4월 6일로 보면, 1971년부터 2000년까지의 30년간 전주지방의 평균 강수량은 청명 전날 그리고 다음 날에 비해 0.65mm가 적었으며, 평균풍속은 0.1m/s가 빨랐다.

15.5 한식과 현실

한식은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다. 예전 아이들은 성묘하고 차례를 지내는 일에 억지로 끌려가 동참하였다고 하지만, 요사이는 어른들도 성묘 대신 사초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또 한식이 찬밥을 먹는 날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날에 찬밥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별도로 기억될 만한 날이 아니다 .

한편, 요즘 한식은 식목일과 겹치는 날이 많다. 따라서 식목일을 조금 앞당겨야 한다는 말들도 나오고 있는데, 그만큼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해마다 식목일에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나무를 심지만, 일부는 산불을 내어 더 많은 나무들이 소실되기도 한다.

2005년 4월 5일에 난 양양의 산불도 많은 나무와 문화재를 태우고 나서 진화되었다. 이때 관동팔경의 하나에 속했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인 낙산사(洛山寺)도 전소되었다. 산불은 소방헬기 10여 대와 진화인력 1천여 명을 동원하고도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동종(洛山寺銅鐘)을 열기(熱氣)로 녹여버려, 문화재지정에서조차 해제시키는 결과도 빚었다.

해마다 식목일에 되풀이되는 산불은, 식목일이 한식과 겹치거나 바로 전후에 있었는데도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세태(世態)가 아닌가 하여 아쉽기만 하다.

예전의 중국에서도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날을 정설로 여겨왔다. 후한시대에는 동지 105일에 각각 전후 하루씩을 더하여 3일간을 한식으로 정했으며, 한식과 청명이 겹치게 되면 청명(淸明)이 동지 후 107일째 날로 밀리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명나라 때에는 한식이 아예 폐지되기도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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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해당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