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17. 단오(端午) - 단오의 의미, 양의 날, 유래, 단오 풍속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05:54

17. 단오(端午)

17.1. 단오의 의미

단오(端午)는 음력 5월 5일로 양력으로는 6월 초순에서 중순에 달해 초여름에 속하며, 5월의 첫 번째 맞는 말의 날인 오일(午日)에서 비롯되었으나 세월을 거치면서 양(陽)의 날이 겹쳐진 5월 5일로 굳어졌다.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은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상태로,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되는 단계다. 논에서는 모내기가 끝나고 어느 정도 땅맛을 알았으며, 밭곡식도 벌써 뿌리를 내려 웬만한 가뭄에도 살아날 생명력은 갖추었다. 그래서 단오에는 봄에 심은 곡식의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예전의 모내기는 기계로 모를 심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린 모를 준비하는 과정부터가 현재와는 다르다. 우선 모를 심을 논의 한쪽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물에 불려 싹이 트인 나락을 직접 흩뿌려 파종을 한다. 이것이 모판인데 그 크기는 가로 1m에 세로 10m 정도가 된다. 모판에서 나락이 물에 잠길 정도로 물을 댄 후, 잎이 나고 뿌리가 내려서 자라 10cm 이상이 되었을 때 모내기를 한다. 물론 이때도 손으로 모를 뽑고 한 움큼씩 묶어서 해당하는 논의 모내기할 장소로 이동을 시킨다. 옮기는 수단 역시 지게에 바작을 얹고, 그 속에 한 주먹씩 묶어 놓은 모단을 실어 등짐으로 져 나르는 방법이었다.

계절적인 단오는 농경사회에서 이제 막 바쁜 시기가 지나고 약간의 휴식을 맞는 때이다. 그런가 하면 겨울을 난 보리는 벌써 수확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날을 전후하여 지친 심신을 달래기도 하며 조였던 긴장도 풀었다. 한편 추위가 늦게까지 이어지는 북쪽지방은 단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날이 완전히 풀리기 때문에 매우 의미 있는 날로 여겼다. 따라서 남쪽지방에서는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한가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북쪽지방에서는 단오를 더 중시했던 문화가 남아 있다.

17.2. 양(陽)의 날

예로부터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등과 같이 월과 일이 홀수로 겹치는 날은 양기(陽氣)가 가득한 날이라 하여 남자의 날이며 길일(吉日)로 알려져 왔다. 그중에서도 5월 5일을 가장 양기가 센 날이라고 여겼다.

시절에 따라 단오에 제사를 올리던 것을 비롯해 정월 초하루와 한가위, 한식을 아울러 4대 명절이라 불렀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4대 국경절은 개천절, 광복절, 제헌절, 삼일절로 예전과는 서로 비교하는 기준이 다르다.

탑이 홀수 층을 이룬 것은 양의 기운으로 하늘의 숫자를 의미하며 4각형 탑신 혹은 8각형 탑신 등 탑신이 짝수 도형으로 굽혀 둘러있는 것은 음의 기운으로 세상의 수 즉 땅의 수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뿐 아니라 피타고라스나 플라톤 같은 서양 학자들도 동일시하였던 내용이다. 아주 특이한 경우로 화순 운주사에는 원형을 이룬 탑신도 있다.

이날은 수릿날(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리라는 말은 고(高), 상(上), 신(神)을 의미하는 옛말이니 수릿날은 1년 중 최고의 날이란 뜻도 된다. 천중절은 5월 5일 오시(午時) 즉 11~13시 사이에 천체(天體)가 하늘의 중앙에 놓인다는 말이니 얼마나 기가 센 날이 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중오절은 숫자의 기초인 9까지의 숫자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5자가 겹친 날이니 그렇고, 단양이란 햇볕이 곧고 바르게 시작해 나오는 날이라는 뜻이니 이보다 더 좋은 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중절(天中節)의 진정한 말뜻만 풀어보면 하지(夏至)에 나타나는 것이니 단오는 하지와 겹쳐야 맞을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단오는 음력 5월 5일이며, 양의 기운인 태양이 중앙에 오는 하지는 양력이니 둘의 기운이 어느 지점에서 딱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17.3. 단오의 유래

자세한 기록으로 폭넓게 전하는 것은 없으나 설날 그리고 추석과 함께 단오를 명절로 정한 조선 중종 13년 15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에서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의 죽음을 초래한 왕의 둘째 아들 ‘자란’이 간언(姦言)한 내용을 들은 충신 ‘굴원’에서 기인한다. 내용을 보면 왕의 아들이 꾀하는 일에 반대하던 굴원(屈原)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BC 277년?) 충절을 표하였는데 이날을 기원한다는 설도 있다. 이때 굴원이 뛰어든 곳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강가(江邊) 즉 수뢰(水瀨)였기에 훗날 수리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17.4. 단오풍속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흥과 멋을 일상에 접목시키는 뛰어난 감각을 표출하였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혹은 농사일을 끝냈을 때에도 시간만 나면 노래를 불렀으며, 고유의 기예를 행하는 데도 익숙하였다. 따라서 단오에도 전하는 풍속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단오굿이며, 또한 창포물에 머리감고 그네를 타는 것이다. 한편 남자들은 씨름으로 힘을 겨루며 농사일로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는 지혜도 발휘하였다.

단오는 이제 시작될 논농사의 고단함을 미리 풀고 가자는 하나의 놀이에 속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단오 전에 모내기를 끝내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도 단옷날이 있으나 당고마쯔리라 하여 양력 5월 5일로 계산하고 있다. 이날은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건강과 소원을 비는 형식을 취하며, 3월 3일의 여자아이들 축제인 히나마쯔리와 대별된다.

단오제와 단오굿

단오에는 농악놀이가 으뜸이다. 오늘날에도 단오절을 지키는 곳이 많이 있는데 해서지방(海西地方)에서는 봉산(鳳山)탈춤, 강령(康翎)탈춤, 은율(康翎)탈춤 등을 놀며, 강릉지방에서는 남대천의 넓은 공터에서 단오굿판을 전승하고 있다.

국가에서 추천하는 종목을 모두 아우르는 정통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제와 제44호 경산자인단오제, 제123호 법성포단오제가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행사는 강원도의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다. 한 달 전인 음력 4월 5일부터 단오행사에 쓰일 술빚기를 시작으로, 여러 준비를 단오직전까지 실시한다. 영신제(迎神祭)를 비롯하여, 대관령의 서낭신과 여서낭신을 모셔다 제사를 지내는 등 여러 굿판을 벌인 후 5월 8일 송신제(送神祭)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慶山慈仁端午祭)는 원래 변복을 하고 춤을 추다가 왜병을 무찌른 한장군놀이로 전해왔는데,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 자인한장군놀이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후 1991년에는 한묘대제, 호장굿, 여원무, 무당굿, 자인8광대 등을 합하게 되었으며 2007년에 다시 경산자인단오제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법성포단오제(法聖浦端午祭)는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 펼쳐지는데, 조창과 파시가 열렸던 법성포에 난장(亂場)을 개설하면서 단오제가 태동되었다. 포구인 점을 고려하여 뱃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제, 난장기, 부녀자의 선유놀이(船遊), 법성포에서 열리는 예인(藝人)들의 경연이 특이하다.

이 밖에도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단오제를 열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창녕의 영산단오제는 음력 5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되며, 10여 명의 무당들이 모여 악사와 주민 모두를 아우르는 큰 굿이다. 영산단오제는 전설적인 인물 문호장(文戶長)을 기리는 제례가 문호장사당에서 올려지는 것이 다른 점이다. 조선의 4대 도시에 속했던 전주에서도 덕진 연못가에서 제법 성대한 단오제가 열린다.

창포놀이

이날은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흥겨운 마음으로 창포놀이와 물맞이 그리고 그네타기와 씨름을 즐겼다. 어린아이들은 창포탕에 세수를 하고 홍색과 녹색의 옷을 입었으며, 여자들은 창포 잎에 맺힌 이슬을 모아 화장수로 사용하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단오장을 꽂았다. 예나 지금이나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여인들의 자랑이었으니 단오에 창포물 머리감기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하나의 예(禮)였다. 창포는 물을 정화시키는 효험이 있으니 창포물을 이용하여 머리를 감아도 좋을 것은 당연한 이치로 보인다.

단오장(端午粧)

단오장은 창포뿌리로 비녀를 만들어서 수(壽) 또는 복(福)자를 새기고 그 끝에는 붉은색 연지를 바른 것으로, 머리에 꽂으면 재액을 물리친다는 속설이 있다. 붉은색은 양색(陽色)이므로 액(厄)을 가져오는 마귀(魔鬼)를 물리치는 축귀(逐鬼) 풍속으로 남자들은 액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단오장 대신 창포 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단오분(端午粉)

단오에 바르던 가루분을 말하는 데, 단오 아침에 상추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서 발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부가 고와지고 버짐이 안 생긴다고 믿었다. 또 아이들에게는 그해 땀띠가 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앵두, 벼, 오이순, 분꽃나무, 창포, 참깻잎에 앉은 이슬을 받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창녕, 고성, 거제, 진안처럼 단오분 대신 순수한 이슬을 받아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족탁(足濯)

단오가 되면 남정네들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개울에서 등물 일명 등목을 하는가 하면, 약수터에서 약수(藥水)를 마시고 몸에 바르는 물맞이도 하였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하던 양반들은 겨우 발만 담그는 족탁 정도로 만족하기도 하였다.

그네타기

여자들이 그네를 타는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놀이로, 고려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몸을 높이 올릴 수 있었던 그네타기는 오랜만에 외출한 여인들이 남의 집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발을 힘차게 굴러 높이 올라가 보면 울안에서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것도 잠깐잠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신기하기만 하다.

전통 그네의 줄은 3m에서 11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만약 11m의 줄에서 몸을 흔들어 내달리면, 그것은 정말 노래 가사처럼 창공을 날던 제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네타기가 그냥 앉아서 쉬는 놀이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정말 온몸을 허공에 띄울 만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전신운동으로서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광한루에서 춘향이가 그네를 타던 날도 단오였으니, 이몽룡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날이 단오였다는 말이다. 태양의 기운이 양중양(陽中陽)일 때 치마폭에 음기를 담아 거풍(擧風)하던 청춘남녀가 사랑을 불태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남원에서도 이를 기려 춘향제를 단오에 맞춰 열고 있다.

그네타기는 고려의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 언급될 정도의 오랜 풍속으로 전해온다. 처녀들이 타면 댕기그네, 남자들이 타면 장정그네, 아이들이 타면 떼떼그네, 두 사람이 타면 쌍그네라고 하였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혼자 타는 것은 모두 외그네라고도 하였다. 이때 그네를 타는 여인들은 치마 속에 속바지를 입어 보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널뛰기

유득공이 쓴『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널뛰기를 초판희(超板戱)라고 하였다. 또 판재를 이용하여 높이 도약(跳躍)하여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놀이라는 뜻으로 도판희(跳板戱)라 부르기도 하였다. 푸른색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綠衣紅裳)를 입은 여인들이 널뛰는 모습은 젊음의 약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널빤지에서 혼자 중심을 잡기도 어려운데, 몸을 공중으로 띄워 보내는 기술은 가히 일품이다.

고려 시대에는 여성들도 격구나 기마와 같은 활동적인 운동을 하였으며, 널뛰기 또한 하나의 놀이가 되면서 전신운동으로 심신을 단련시키는 데 필요한 기예(技藝)라 할 것이다.

약초말리기

단오에 캔 약초는 모두 효능이 좋다고 하였으며, 익모초(益母草)를 비롯한 쑥 등 여러 가지 향이 진한 약초를 준비하였다. 익모초는 더위 먹은 데 입맛을 돌려주며 한방에서는 산모의 지혈제, 강장제, 이뇨제로 사용하였다.

한편 게르만족은 하지 전후에 쑥을 채취했다고 한다. 게르만족은 약초는 약효를 가진 요정이나 여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면 쑥은 아르테미스 여신이 주관하므로 쑥의 속명이 ‘아르테미시아’로 정해졌다. 그런데 기독교 측에서는 ‘요하네스 약초’로 바꿔 부르는데 이는 기존의 신앙과 기독교적 관점을 결합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단오 이후의 쑥에는 독소가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하지가 지나면서 성장이 멈추고 줄기가 강해지면서 리그닌이나 헤미셀룰로오스와 같이 섬유질이 축적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산멕이기

강원도 명주 일대에 전하는 풍속의 하나로 단오날 새벽 동틀 무렵에 각자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산을 가져다 예를 드린다. 여기서의 산은 왼손으로 꼰 새끼를 말하기도 하며, 짚이나 싸리 등으로 만든 오쟁이 혹은 항아리를 일컫기도 한다. 부녀자들은 자기 식구들 이름으로 된 각각의 산을 가지고 산(山)에 오른 후, 식구 개개인의 소나무 혹은 가족을 대표하는 소나무에 얹어놓고 준비한 예물로 기원한다. 이때 해당하는 신은 성주신, 조상신, 혹은 산신이다. 더불어 이웃에서 가져온 음식의 일부를 덜어 산에 얹어 놓는 풍습도 전한다. 이것은 고수레라는 풍속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씨름

씨름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로, 단오가 되면 넓은 마당이나 백사장에서 서로의 힘과 기술을 겨루는 대회가 벌어진다. 이때는 장정들과 어른, 그리고 어린아이 씨름으로 나누어 시행하였다. 중국에서는 고려기(高麗伎)라고 하여 별도로 이름을 붙여 부를 정도로 성행하였다. 이때 최후 승자인 장사는 황소를 상품으로 받아 기세를 높였다. 요즘에도 설장사씨름대회와 추석장사씨름대회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타

이렇게 경사스런 날에 행여 마(魔)가 낄까 근심된 선조들은 부적을 붙였으며, 남자들은 창포주를 마시면서 재액(災厄)을 예방하였다. 가정에서는 대추가 많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추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는 기원풍습도 전해온다. 이런 행사를 두고는 대추나무를 시집보낸다고 하였다. 대추는 대체로 하지 직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추석이 지나고도 피는 과실이다.

농사에서 가장 요긴한 노동력이었던 소는 생후 10개월부터 12개월 사이의 단오에 코뚜레를 하였다. 코뚜레는 송아지의 코를 뚫는 작업임과 동시에 코를 뚫는 도구이며, 코를 뚫은 자리에 꿰어 놓은 막대기를 말하기도 한다. 이 도구는 1회용이며, 다래넝쿨이나 대나무뿌리, 혹은 노간주나무, 향나무를 불로 구워 소독도할 겸 휘면서 모양을 갖춘다. 코는 대추나무 송곳으로 뚫는데, 사람들이 소의 힘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송아지가 겪는 할례의식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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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의 행사 사진 500여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