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긍심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나라에는 고도특별법에 의하여 환경을 보호받으면서 동시에 개발이 제한되고 있는 4개의 고도가 있다. 고도란 옛 고대도시를 줄인 말로, 우리가 정한 고도는 고대국가의 중심도시를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그리고 부여가 들어있다.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현재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제외하고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백제의 또 다른 수도 익산을 추하가여 4개의 고도가 지정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라와 백제의 수도를 얘기하면 위의 익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 이유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익산에 있는 유물이 제대로 발굴되지 못하여 고도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 데에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익산의 왕궁지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성곽 등의 규모와 시설로 보아 한 나라의 왕이 거주하였던 곳임이 밝혀졌다.
역으로 이런 사실들은 근세인 조선의 왕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발견된 적이 없다. 경주와 공주 그리고 부여에서는 이제 막 왕궁터라고 주장하는 곳을 발굴하기 시작하는 단계이지만, 아직까지도 구체적이거나 자타가 인정하는 유물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익산 왕궁의 계속되는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더욱 놀랄만한 일은 당시에도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물로 씻어내는 형식은 아니지만, 물에 넣어 여과시킨 후 정화시킨 후 일정한 규모의 수로관을 이용하여 흘려보내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정화조방식을 의미한다. 이렇듯 왕궁과 주변 사찰 등 고대도시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익산이 백제 무왕시절의 수도였다는 것이 공식화되어가는 중이다.
정부에서 정한 고도의 조건에는 왕궁과 성곽, 호국사찰, 왕의 무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경주에서는 월성지구를 왕궁이라고 하면서 이제 발굴하기 시작하는 단계이고, 사찰로는 황룡사와 불국사 등을 들고 있지만 황룡사는 아직 완벽하게 발굴되지 않았으며 불국사는 초기부터 국가의 안위를 기도하는 호국사찰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천마총이니 금관총이니 하는 왕릉 역시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며,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죽으면서 다른 사람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렇게 무리지어 모여 있는 왕릉에 오히려 의아한 생각이 든다. 왕 옆에는 왕비 그리고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이 있어야 이해가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발견되는 부장품에서도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그냥 발견된 금관의 이름을 따서 금관총이라 부르거나 천마가 그려진 그림이 나왔다고 하여 천마총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인 실증방법이 못된다.
공주에서는 공산성이라는 성곽이 있지만 아직 왕궁의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덤으로 무령왕릉이 나왔지만 이렇다할 사찰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가까운 부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잘 아는 낙화암이 있는 곳은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으로, 이곳에서 타다 남은 쌀이 발견되어 군창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곳이다. 그러니 부소산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었으며, 최근에 와서야 관북리유적지를 왕궁터로 추정하여 발굴 중에 있는 정도다. 한편 능산리고분군을 백제 왕들의 무덤이라고 추측을 하지만 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문물이 발달한 백제 후기에 와서도 이리저리 어지럽게 마구잡이로 묻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누구의 무덤인지 표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호국사찰로는 정림사를 들기도 하는데 이는 명확하게 대응되는 사찰은 아니며 대체로 들어맞는 해석상의 사찰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비교하여 익산은 왕궁리의 왕궁과 성곽은 역사적으로 자세히 발굴 보도되고 있으니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국사 사찰을 보더라도 미륵사를 들 수 있는데, 무왕과 선화가 국가의 안위를 빌기 위하여 미륵산 중턱에 있는 사자사로 가던 중 연못을 메워 호국 사찰로 지었다는 전설이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계속되는 발굴에서 무왕이 직접 관여하여 지었다는 기록이 2009년 발견되어 전설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덤에 있어서도 쌍릉의 대왕묘는 무왕의 묘이며 소왕묘는 선화의 묘로 알려지고 있는데, 역사적인 정사에서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한씨의 선조묘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자조선의 무강왕이 남하하여 묻힌 곳이라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무덤 역시 비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주나 부여 혹은 공주처럼 많은 왕들이 평화롭게 살다가 죽은 후에 만들어진 무덤이 아니라, 백제 말기에 여러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왕궁인 부여를 떠나 익산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무왕의 당시 상황을 비교하여 보면 무왕의 묘에 별다른 표식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물론 내부는 오래 전에 도굴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익산은 우리나라 고도법에 의한 고도이다. 그것도 다른 고도에서는 증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는 도시다. 이것이 바로 익산이 가지는 자긍심이며 또한 전라북도가 가지는 자긍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긍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온고이지신이다. 그래서 익산은 해마다 서동축제를 열어 서동 즉 무왕의 뜻을 기리며 익산시민으로서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서동축제에 참가할 공연단체가 기피하는 수준까지 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 행사에 대략 50명 이상이 동원되는 경우에도 1회 출연에 100만 원 정도의 비용만 지급되기 때문에, 버스 대여 및 식사 그리고 간단한 소품 등의 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다른 부분에서의 예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출연하는 비용과 무대장치 및 준비하는 모두를 합한 총 금액이 10억 원을 넘지 못하니 제대로 된 종합축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에 가까운 부여만 하더라도 궁남지의 서동연꽃축제를 비롯하여 백제 대제전 등 크고 작은 행사가 호화롭게 열리고 있다. 물론 돈만 많이 들어간다고 하여 좋은 축제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익산보다 작은 공주나 경주 그리고 부여에서도 한 지역을 알리고 시민의식을 높이는 방법으로 국가수준급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는 것이다. 1박2일로 열리는 공주와 부여를 잇는 대백제전은 낙화암아래 백마강변 모래밭에서 시작된다. 아무 쓸모가 없는 모래사장을 하나의 구심체로 만들어 대동단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국비를 포함하여 대략 300억 원 이상이지만 정작 외지 사람들은 대백제전이 무엇인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럼 지금 익산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천년 고도를 자랑스럽게 외치는 전주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익산과 전주의 자존심싸움도 필요 없고, 누가 예산을 얼마나 더 투입하였느냐 하는 것도 필요 없다. 다만 있어야 할 것은 옛 마한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의 수도였던 익산과 근세 조선에서 가장 번창했던 지방도시 전주가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온고이지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30326새전북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작하는 것과 잘하는 것 (0) | 2014.09.15 |
---|---|
김장과 소금 간 (0) | 2014.09.15 |
투표가 가지는 의미 (0) | 2014.09.15 |
득(得)과 실(失)의 허상 (0) | 2014.09.15 |
잃어버린 권세 (0) | 2014.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