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석탑 복원의 의미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석탑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의 석탑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을 살펴보면 백제 시대에 미륵사라는 절이 있었고, 거기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석탑이 있었다. 그 중 서쪽에 있는 탑이 서탑이며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석탑을 의미한다. 동쪽에 있었던 나머지 석탑은 동탑인데, 발굴당시 무너져있어 원형을 갖추지 못했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서탑과 옛 문헌들을 근거로 하여 복원한 것이 바로 미륵사지 동탑이다.
따라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익산의 미륵사지에 가면 서탑은 옛 모습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어 빛이 바랜 상태이며, 동탑은 새로 만들어져서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서로 대조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동탑을 복원하면서도 말이 많았었다. 옛 석탑은 모난 부분을 정으로 하나하나 쪼아가며 다듬고 문질러서 만든 탑인데 비해, 현재의 동탑은 편리해진 기계기술의 보급으로 석공의 피땀 어린 정성이 결여된 모조탑이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만 두고 보면 요즘의 숭례문 복원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없다고, 옛 기술을 전수한 기술자가 없다고, 또는 복원에 필요한 예전의 재료를 구할 수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옛 모습 그대로의 복원이 아니라서 그 가치가 없다는 말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새로 만드는 문화재가 아니라 옛 것을 복원하는 것이라면 옛 것과 같게 혹은 거의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복원이라는 말에 어울릴 것이다. 그러니 요즘처럼 형태만 갖추어놓고 복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된다.
2013년 11월 25일 미륵사지석탑 즉 서탑에 대한 복원을 시작하였다. 그간 10여 년에 걸쳐 해체하고 연구한 결과, 옛 모습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복원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요즘의 기술이나 장비의 도움을 받는다면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원이라는 말을 할 때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건축물을 만들어야 하며, 옛 방식을 따르는 것이 바로 문화재의 보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건을 들어 옮기는 일까지 사람의 힘으로 목도를 하여 나르자는 얘기는 아니다. 돌을 가공하는 방법이나 접합하는 방법 등 복원 후에 드러나는 부분에 대하여 만큼은 옛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런 미륵사지석탑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미륵사지는 미륵사가 있었던 절터를 말하며, 백제 무왕 때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연이 담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의 공주와 백제의 왕자가 사랑을 하였다는 부분에 대하여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들이 익산에서 국립사찰을 짓고 익산천도의 꿈과 함께 지배하였다는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이다.
이때 미륵사는 옛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의 어느 사찰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음으로써 왕권을 회복하고 지배세력의 결집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동양 최대의 사찰이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찰 한 개에 대웅전이 3개가 있다는 점과, 이와 대응하여 중앙의 목탑과 양쪽의 석탑을 합하여 3개씩이나 세웠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절 3개를 한 울타리 안에 넣어 둔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절을 상징하는 깃발 즉 당을 하나씩 걸어두지만, 이곳에서는 두 개나 달아두었다. 현재 남아있는 두 개의 당간지주를 보면 그런 사실이 입증되는데, 신라의 황룡사와 더불어 국립사찰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예전에 목재로 만들어진 목조탑에서 석재를 이용한 최초의 탑으로 분석되며, 옛 목탑의 제조기술을 그대로 인용하다보니 모양과 형태 그리고 크기마저 목탑과 같이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후에는 석재를 이용한 석탑 중에서도 이렇게 크고 웅장하면 섬세한 작품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목재에 비하여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게다가 어렵게 세워진 석탑이라 하더라도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훼손되고 파손되게 마련이지만,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그 정도가 현저하게 적다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것은 사용된 돌이 국내 최양질의 화강암인 익산시 황등면에서 생산되는 황등돌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국내 최고의 석질을 가진 재료로 약 1,400년이나 되었다는 최고로 오래된 탑을, 그것도 가장 크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냥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익산미륵사지석탑이 가지는 의미가 큰 것이다.
차제에 이런 탑이 복원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목적에 의해 졸속하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해체하는 데만 10여 년이 걸린 것을 보면 복원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만에 하나 문화재 복원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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